성명 | 피어스 개버스턴 Piers Gaveston | |
생몰년도 | 1281년에서 1283년 사이 ~ 1312년 6월 19일 | |
출생지 | 가스코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블랙로우 힐 | |
아버지 | 아르노 드 개버스턴 | |
어머니 | 마르산의 클라라몽드 | |
형제 | 아르노기욤, 제라르, 레이몽아르노, 에이미 | |
아내 | 마거릿 드 클레어 | |
자녀 | 잔, 에이미 | |
직위 | 초대 콘월 백작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 그의 동성 연인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회자될 정도로 두터운 총애을 받았고, 이를 토대로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잉글랜드 귀족들의 반감을 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생애
2.1. 기원
개버스턴 가문은 베아른 자작령의 작은 마을인 개버스턴에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베아른 자작 가스통 7세를 섬기는 기사로, 대지주 아르노기욤 드 마르산의 딸로, 형제인 포르타네르 드 레스콩과 공동 상속인인 클라라몽드와 결혼해 가스코뉴에서 상당한 양의 토지를 얻고 베아른의 저명한 남작이 되었으며, 아키텐 공작을 겸임했던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 형제로 아르노기욤, 제라르, 레이몽아르노, 에이미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피어스의 생년월일과 출생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1304년 제2대 위그모어 남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사망한 뒤, 에드워드 1세가 장남 에드워드 왕자의 요청에 따라 에드먼드 모티머의 미성년 후계자인 로저 모티머의 후견인으로 피어스를 지명한 것을 볼 때, 1304년에는 적어도 20세가 넘었을 것이다. 따라서 1283년 이전에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1284년생인 에드워드 2세와 동년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1281년보다 늦게 태어났을 것이다.
아버지 아르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충실한 가신이었다. 1282~1283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상당한 분견대를 이끌고 참여해 잉글랜드가 웨일스를 정복하는 데 일조했으며, 에드워드 1세가 가스코뉴를 놓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대립할 때 에드워드 1세를 시종일관 지지했다. 특히 1287년 2월 4일 아내 클라라몽드가 사망한 뒤 아내의 상속 재산을 놓고 그녀의 친정이나 이웃 영주들의 소유권 주장에 맞서기 위해, 에드워드 1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1288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아라곤 왕국에 인질로 보내졌고, 1294년에는 프랑스 궁정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1297년 잉글랜드로 탈출했다. 그 후 1300년, 두 아들 아르노기욤, 피어스와 함께 에드워드 1세의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1302년에 사망했다.
2.2. 에드워드 1세의 궁정
이렇듯 에드워드 1세를 전적으로 따르는 아버지를 따라 잉글랜드로 건너간 피어스는 에드워드 1세로부터 씩씩한 언행과 토너먼트에서의 무술 실력을 인정받았다.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웨일스 공이자 장남 에드워드의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그를 에드워드 왕자의 수행원으로 삼기로 했다. 그 후 피어스는 에드워드 왕자의 왕실 경비대원이 되었다. 1303년 8월부터, 피어스는 웨일스 궁정에서 발행한 헌장에서 "sucifer"(종자)가 아닌 "socius"(동료)로 지칭되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재치 있고, 활기차고, 날카로우면서도 무례한 면이 있는 피어스를 최고의 친구로 여기고, 그에게 엄청난 명예와 선물을 퍼부었으며, 심지어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1304년에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에드워드 왕자의 추천에 따라 위그모어 남작령을 계승한 로저 모티머의 후견인이 되었다. 모티머 가문은 웨일스 공국과 아일랜드 영지에서 광대한 토지를 누리는 영향력 큰 집안이었기에, 이 가문의 계승자를 후견할 이는 명문 귀족이 맡는 게 원칙이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장남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가스코뉴의 하급 귀족이었던 피어스를 후견인으로 삼기로 했다. 피어스는 이때부터 잉글랜드 귀족들의 경계를 받았다.
1305년 여름, 에드워드 1세는 왕실 재무관 월터 랭턴으로부터 에드워드 왕자가 두 친구 피어스와 길버트 드 클레어에게 지나치게 많은 선물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 웨일스 궁정의 수입을 줄이며, 두 사람을 궁정에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분개한 에드워드 왕자는 아버지와 몇 달간 다툼을 벌였고, 1305년 8월 4일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서신을 보내 젊은 계모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아버지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하라고 부탁했다. 나중에는 본인이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서신을 보내 친구를 잃은 슬픔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런 아들과 몇 달간 다퉜다가, 결국 분노를 가라앉히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1306년 5월 26일 에드워드 왕자와 귀족 자제 266명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지 4일 후, 피어스도 기사 작위를 받고 웨일스 공의 가신으로 복귀했다.
1306년 여름 스코틀랜드와의 원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피어스는 에드워드 왕자가 스코틀랜드를 떠나자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고 로저 모티머를 비롯한 기사 22명과 함께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 진영을 무단 이탈해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사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이에 격노한 에드워드 1세는 이탈자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개버스턴과 동료들은 에드워드 왕자에게 자기들을 대신하여 왕에게 용서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지지를 받고 왕에게 그들의 입장을 변호했고, 에드워드 1세는 1307년 1월 그들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주기로 했다.
2.3. 첫 번째 추방
에드워드 왕자는 피어스와 항상 함께 싸우고, 서로를 보호하고, 모든 소유물을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로 마음먹고, 피어스에게 퐁티외 백작령을 넘기고 백작에 선임하기로 했다. 퐁티외 백작령은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 왕의 가신으로서 유럽 대륙 내에서 소유한 영지였다. 14세기 연대기 작가 기스버러의 월터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자는 재무관 월터 랭턴을 아버지에게 보내 피어스를 퐁티외 백작으로 진급시키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가 왕자를 보내 랭턴을 자기에게 보낸 이유를 직접 설명하라고 명령했다."피어스에게 퐁티외 백작령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왕의 허가를 요청하려고 그를 보냈습니다."
아들의 답을 들은 에드워드 1세가 격노해 소리질렀다.
"이 불쌍한 놈아! 이제 땅을 분배하려 하는구나. 아직 아무 땅도 정복한 적이 없는 너희들이여! 내가 맹세하건대, 왕국을 망칠까 봐 두려워하느니 네놈이 상속할 땅을 누리게 하지 않겠다!"
왕은 그 직후에 아들의 머리카락을 꽉 쥐고 잡아당겨 땅에 내동댕이친 뒤, 지칠 때까지 아들을 폭행했다고 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월터가 사건을 극적으로 묘사하려고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에드워드 1세가 아들의 요청에 분노한 건 분명하다고 본다. 에드워드 1세의 입장에서 본다면, 미래의 군주가 어떤 종류의 음모로부터 적절하게 보호받을 수 없는 종자와 맹세로 묶이는 것은 터무니 없으며, 더구나 그 맹세가 왕국의 소유물과 통치를 공유한다는 것으로, 이게 실현되면 왕실의 위엄이 훼손될 테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1307년 2월 26일, 에드워드 1세는 칼라일에 영주들을 소집했다. 그 후 4월 30일에 왕국에서 개버스턴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에드워드 왕자에게 자기 허락 없이는 다시는 피어스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피어스에게는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듯하다. 피어스는 비록 왕국에서 추방당했지만, 에드워드 1세로부터 연간 100마크의 넉넉한 연금을 받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피어스와 함께 도버로 간 뒤, 피어스가 떠나기 전에 260파운드에 달하는 거액과 말 다섯 마리, 태피스트리 16개, 양털 튜닉 2개를 선물로 줬다. 에드워드 왕자는 나중에 피어스에게 녹색 벨뱃 창시합복 2개를 추가로 보냈는데, 그 중 하나는 진주와 금으로 장식되었고, 다른 하나는 은으로 장식되었다.
2.4. 에드워드 2세의 총애
1307년 7월 7일, 에드워드 1세가 칼라일에서 사망했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 1세는 죽기 전에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아들을 충실히 따라줄 것이며, 피어스의 귀환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런던이나 도싯 인근에 있었던 에드워드 왕자는 7월 11일에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자마자 피어스를 잉글랜드로 소환하기로 했다. 피어스는 8월 초에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8월 6일에 이제 에드워드 2세가 된 친구로부터 초대 콘월 백작에 선임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조카딸인 마거릿 드 클레어와 피어스를 약혼시켰으며,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연금인 4,000 파운드를 수여했다. 피어스가 콘월 백작으로서 누리는 영토는 콘월 외에도 데번의 일부 지역, 버크셔의 월링포드 일대, 옥스퍼드셔의 일부 영토, 링컨셔 동부, 요크셔의 나레스버러 등지가 포함되었다.1307년 11월 2일 버킴스테드에서 피어스와 마거릿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결혼을 기념하는 수많은 축제와 사냥이하트퍼드셔의 킹스 랭그리에서 거행되었으며, 12월 2일 월링포드 성에서 토너먼트가 거행되었다. 이때 토너먼트에 참가한 피어스의 젊은는 기사들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을 따르는 나이든 기사들을 상대로 승리했다. 토너먼트를 지켜본 이들은 중재자들이 피어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여겼고, 귀족들은 불만을 품었다. 특히 결승전에서 피어스에게 당한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은 피어스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다.
피어스는 에드워드 2세의 치세 첫 크리스카스를 와이 강변의 배틀 수도원에서 왕과 함께 보냈다. 1308년 1월, 에드워드 2세는 당시 12세였던 프랑스의 이자벨과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면서, 피어스를 왕국의 섭정으로 선임했다. 귀족들은 왕이 왕자나 경험 많은 대영주를 임명할 것으로 여겼는데, 피어스가 그 자리를 맡게 되자 깊은 반감을 품었다. 에드워드 2세가 불로뉴에서 이자벨과 결혼식을 거행한 직후, 링컨 백작, 헤리퍼드 백작, 서리 백작, 펨브로크 백작은 불로뉴에 서한을 보내 피어스를 비롯한 궁정 인사들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다.
이자벨 왕비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온 에드워드 2세는 1308년 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잉글랜드의 모든 귀족은 금으로 수놓은 천을 입었는데, 피어스 만이 진주로 장식된 보라색 의복을 착용했다. 보라색 의복은 오직 왕실 인사만이 입을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게다가 피어스는 수도원으로 향하는 에드워드 2세와 이자벨 바로 맞은 편에 앉았으며, 세인트 앤드류스 왕관을 쓰고 왕의 박차 하나를 달고 있었다. 대관식 이후에 거행된 연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아내와 가족을 제쳐두고 모든 사람의 주의를 피어스에게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또한 피어스는 왕의 지시에 따라 연회 준비를 맡았지만 음식은 해가 져서야 나왔고, 요리가 형편없어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에드워드 2세는 이 행사를 위해 5파운드짜리 태피스트리를 주문했는데, 거기에는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의 문장이 새겨 있었지만, 이자벨의 문장은 새겨지지 않았다.
2.5. 아일랜드 보안관
피어스가 대관식에서 보인 일련의 상황에 분노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피어스를 왕궁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이자벨 왕비의 아버지인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도 딸에게 행한 처우에 불쾌감을 드러내자, 에드워드 2세는 압박감을 느끼고 1308년 6월 25일에 결정을 내렸다. 피어스는 콘월 백작령을 몰수당했지만 연금 3,000 마크를 받을 수 있는 가스코뉴의 토지를 받았고, 잉글랜드 궁정을 떠나되 아일랜드 영지를 지키는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피어스가 다시 잉글랜드에 발을 디디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피어스는 리처드 드 버그의 뒤를 이어 아일랜드 보안관이 된 뒤,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현지 게일인들의 반란이 종종 벌어졌던 아일랜드 영지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반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고, 뉴캐슬 맥키네건과 케빈 성을 요새화했으며, 케빈 성과 글렌달록 사이의 도로를 재건했다. 이 도로는 더블린 동쪽의 위클로 산맥을 평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블린 시민들이 도시 성벽에 부과되는 통행료가 과도하다며 항의한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일랜드를 무난하게 잘 다스렸으며, 그가 사익을 챙겼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잉글랜드에서 대귀족들과 심한 마찰을 벌였던 것과는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의 복귀를 준비했다. 그는 후원금을 분배하고 반대 세력에게 정치적 양보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몇몇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308년 여름,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가 왕과 화해했고,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왕의 요청에 따라 1309년 4월 25일 피어스가 잉글랜드를 밟는 것을 금지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교령을 해제하기로 했다. 1309년 6월 23일, 피어스는 에드워드 2세의 복귀 명령을 접수하고 아일랜드를 떠났다. 6월 27일 스탬퍼드에 도착한 뒤 7월 스탬퍼드 의회에서 국왕의 권력 양도를 공식화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이때 발행된 소위 '스탬퍼드 조례'는 에드워드 1세가 1300년에 합의한 조례인 <Articuli super Cartas>(헌장에 관한 기사)를 기반으로 하며, 마그나 카르타의 준수 보장과 왕권의 범위 설정을 명시했다.
2.6. 스코틀랜드 원정과 두 번째 추방
1309년 8월 5일, 피어스는 콘월 백작에 재차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오만한 언행을 일삼아 귀족들에게 깊은 반감을 품었다.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피어스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을 "유대인 요셉"이라고 불렀으며,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을 "아르덴의 검은 개"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촌뜨기"로,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를 "벨리-브리크 씨"(Mr. Belly-Break)로, 그리고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를 "뻐꾸기" 또는 "창녀의 아들"[1]로 부르며 조롱을 퍼부었다고 한다.1309년 여름, 피어스는 왕을 설득해 왕실에 서 일하던 랭커스터 백작의 가신을 해임하도록 했다. 이에 분노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1309년 10월 요크 의회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의회 개최를 1310년 2월까지 연기하면서 참석을 종용했다. 그는 일단 참석하기로 했지만, 왕명을 어기고 무장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요크에 나타나 왕에게 개버스턴에 대한 지나친 총애를 중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3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토머스 및 귀족들의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귀족 21명으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 설립에 동의했다. 토머스는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위원회에는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처럼 왕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랭커스터 백작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뤘다.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로 마음먹고, 당시 스코틀랜드를 재정복하고 잉글랜드 북부 습격을 잇달아 벌이던 로버트 1세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징수한 뒤, 1310년 9월 8일에 군대를 베릭으로 소집했다. 그러나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그리고 피어스만 왕을 따랐고, 다른 귀족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베릭에 집결한 병력은 기병 1,700명, 보병 3,000명이었다.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가 늦어도 1310년 6월까지 아일랜드에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가일에 상륙해 왕을 도울 계획이었지만, 악천후와 역풍 때문에 함대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대신 일부 군대는 맨 섬의 수비대를 지원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2세는 1310년 9월 중순에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9월 16일, 에드워드 2세는 록스버러에 도착했고, 9월 23일경에는 셀커크에 도착했으며, 9월 26일경에는 비가에 도착했다. 10월 중순, 잉글랜드군은 로버트 1세와 그의 군대가 스털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병력이 너무 적어서 정면 대결을 벌일 수 없었다. 10월 중순에 렌프루와 글래스고로 이동했고, 더 나아가 린리스고까지 진군했다. 이후 에든버러에 잠시 머무르면서 포스 강 남쪽에 있는 수비대를 지원한 뒤, 남쪽으로 후퇴하여 11월 11일경 다시 베릭에 도착했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이 이동하는 동안, 로버트 1세는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적 식량 수집대를 끈질기게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1310년 10월 28일, 에드워드 2세는 궁정과 국고를 요크로 이전하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베릭에 1311년 7월까지 머물렀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 역시 1310년~1311년 겨울 동안 스코틀랜드 국경에 머물렀다. 그러나 군사 작전을 재차 감행하지 못했고, 로버트 1세가 로디언을 침공했을 때야 소규모 병력으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와 협상하기로 하고,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로버트 피츠페인을 파견했다. 두 사람은 1310년 12월 17일 셀커크에서 로버트 1세와 접견해 협상했다. 그러나 피어스와 글로스터 백작이 멜로즈 수도원에서 만나자고 한 제의는 로버트 1세가 배신을 우려해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국내의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에드워드 2세는 원정을 중단하고 1311년 7월 웨스트민스터로 돌아가면서, 피어스를 스코틀랜드 국경의 왕실 부관으로 선임했다.
1311년 8월 16일 런던에서 열린 의회에서, 개혁 위원회는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피어스의 추방을 재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가 잉글랜드에 계속 머무르는 대신에 개혁안을 수용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귀족들은 거부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자기 권한을 제한하는 41개 법령을 승인했다. 이때 제20 조항에서는 피어스 개버스턴을 "국왕과 그의 국민의 공공연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왕국 바깥으로 추방한다고 선언헀다. 피어스는 11월 3일 잉글랜드를 떠나 플란데런 백국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2.7. 잉글랜드 귀환과 최후
1311년 12월,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를 잉글랜드에 비밀리에 소환했다. 피어스는 1312년 1월 13일 나레스버러 성에서 왕과 합류했고, 왕은 이 시기에 태어난 피어스의 딸 잔의 세례 행사를 거행했다. 1월 18일,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에 대한 판결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그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반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다른 대귀족들은 왕과 피어스가 의회의 결의를 독단적으로 어겼다고 규탄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캔터베리 대주교 로버트 윈첼시는 피어스를 파문했다. 그 후 개혁 위원회는 왕국을 여러 개의 방어 구역으로 나누고, 펨브로크 백작과 서리 백작에게 피어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1312년 5월 4일, 랭커스터 백작은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함께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가 있는 뉴캐슬로 쳐들어갔다. 두 사람은 스카버러 요새로 피신하면서 돈과 보물을 전부 내팽개쳤고, 랭커스터 백작이 이를 압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요크로 향했고, 피어스는 스카버러에 홀로 남겨졌다. 이후 대귀족들이 스카버러 성을 포위하자, 피어스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5월 19일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8월 1일에 열릴 의회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재판에 출두할 테니, 그 전까지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피어스를 옥스퍼드셔로 이송해 데딩턴 교구에 남겨뒀다.
15세기 연대기 삽화,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에게 짓밟힌 피어스 개버스턴.
그러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재판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워릭 백작이 총대를 매기로 하고, 6월 10일 피어스를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갔고, 랭커스터 백작 등이 그곳에 모여서 약식 재판을 거행했다. 토머스는 피어스가 추방령을 3번이나 어겼으니 죽어 마땅하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가 피어스를 8월 1일에 열리는 재판 때까지 신변을 보장하기로 한 자신의 약속을 상기하며 당장 풀어달라고 요구했지만, 토머스 등은 듣지 않고 6월 19일 밤 참수형을 집행하게 했다. 개버스턴은 자비를 간청했지만, 그는 이를 묵살하고, 헤리퍼드와 아룬델 백작에게 개버스턴을 자기 영지로 끌고 가서 처형을 감독하게 했다. 피어스는 블랙로우 힐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두 웨일스인에게 참수되었다.
3. 사후의 이야기
연대기 <에드워드 2세의 생애>(Vita Edwardi Secundi)에 따르면,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청난 슬픔을 느꼈고, 이내 친구의 원수를 갑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랭커스터 백작을 위시한 반대 파벌의 위세가 워낙 공고했기에, 즉각적인 복수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피어스를 정식 재판을 받거나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죽여버린 일은 잉글랜드 정계에 큰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성직자들은 부당하고 잔혹한 처사였다고 비난했고, 초대 윈체스터 백작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 등 여러 영주 역시 토머스가 왕권을 실추했다고 규탄했다. 하지만 토머스의 추종자들은 나라를 망친 간신을 정당하게 처형했을 뿐이라며 토머스를 옹호했다. 에이머 드 발랑스는 자기가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하게 한 토머스에게 반감을 품고, 이때부터 에드워드 2세 지지로 돌아섰다.1312년 8월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는 토머스와 에드워드 2세 간의 갈등을 조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토머스는 워릭 백작, 헤리퍼드 백작과 함께 9월 3일에 군대를 일으켜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실군이 웨이크 마을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이제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듯 했지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와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를 저지하고 협상을 중재했다. 이자벨 왕비의 삼촌인 에브뢰 백작 루이 데브뢰와 교황 특사들도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양자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로 했다. 협정은 1313년 2월 13일에 체결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살해한 자들을 사면하기로 했고, 토머스 등은 왕권을 더이상 침해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원정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개버스턴을 범죄자로 규탄하라는 토머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응어리가 잘 해소되지 않았고, 토머스 등 일부 귀족은 개버스턴의 처형을 합법화하지 않은 것에 항의하며 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1313년 10월,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중재에 따라 랭커스터, 워릭, 헤리퍼드 백작과 그들의 지지자 500명을 정식으로 사면했다.
피어스는 살해된 뒤 처형 장소에 남겨졌다. 한 연대기 작가는 구두장이 4명이 시체를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에게 가져갔지만, 워릭 백작은 시체를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관할 구역 밖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후 피어스의 유해는 옥스퍼드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넘겨졌고, 수도자들은 그의 머리를 다시 꿰맨 후 방부처리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의 간절한 요청으로, 교황청은 1313년 5월에 피어스에게 걸렸던 파문을 해제하고 옥스퍼드의 도미니코외 수도원에 매장하는 걸 허락했다.
1315년 1월 2일, 에드워드 2세는 1038년에 세운 랭글리 수도원에 피어스의 유해를 안장했다. 이때 거행된 장례식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왕은 친구의 유해를 입히기 위해 금옷 3벌을 300 파운드에 구입했고, 와인 23통을 주문했다. 그 후 왕은 랭글리 수도원에 매년 500 마크를 기부했고, 1315년 10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있는 모든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들에게 피어스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매일 미사를 거행하라고 명령했다. 1322년 피어스를 살해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참패하고 체포된 뒤 처형된 뒤, 에드워드 2세는 피어스를 공개적으로 추앙하기로 했다. 1324년, 그는 피어스의 사망일을 기념일로 삼고, 자신의 고해사제를 랭글리 수도원으로 파견했으며, 1325년에는 랭글리 수도자들에게 100실링씩 나눠줘서 그들이 피어스를 기리는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통치 마지막 해인 1326년에는 여러 종교 단체의 성직자 몇 명에게 돈을 줘서 친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도록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아들 에드워드 3세를 앞세원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의 쿠데타로 폐위된 뒤, 피어스 개버스턴 추모는 중단되었고, 그의 무덤도 사라졌다.
4. 가족
- 마거릿 드 클레어(1293 ~ 1342):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딸, 에드워드 2세의 조카딸. 피어스가 살해된 뒤, 에드워드 2세로부터 2,000마크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을 받는 등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고, 에드워드 2세의 중재에 따라 1317년 초대 오들리 남작 휴 오들리와 재혼했다. 1322년 남편 휴 오들리가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한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체포된 뒤 왕에게 호소해 남편의 목숨을 구제받았지만, 남편이 월링포드 성에 투옥됙고 자신은 링컨셔의 셈프링엄 수도원에 갇혔다. 1326년 에드워드 2세가 몰락한 뒤 풀려났다.
- 잔 개버스턴(1312~ 1325): 1316년 에드워드 2세의 주선으로 제2대 리델의 웨이크 남작 토머스 웨이크와 약혼하는 듯 했지만, 토머스 웨이크는 이를 거부하고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조카인 블랜치와 결혼했다. 그 후 1317년 에드워드 2세의 중재로 초대 에그레몬트의 멀튼 남작 토머스 드 멀튼과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의 딸 엘레노어 사이의 아들 존 드 멀튼과 약혼했다. 1322년 계부가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일어난 반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는 바람에 계부와 어머니가 각각 월링포드 성과 셈프링엄 수도원에 감금되었지만, 에드워드 2세는 잔을 보호해줬다. 그러나 잔은 결혼이 거행되기 전인 1325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 에이미 드 개버스턴(사생아): 에드워드 3세의 왕비 에노의 필리파의 시녀로 활동했고, 왕실을 위해 일하던 자장농인 존 드리비의 아내가 되었다.
5. 에드워드 2세의 동성 연인이었는가?
마커스 스톤 작,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 개버스턴>, 1872년.
후대의 연대기들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가 동성 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폴리누스의 연대기>는 에드워드 2세가 피어스를 "모든 면에서" 사랑했다고 주장했고, <라네르코스트 연대기>는 두 남자 사이의 친밀감이 "과도했다"고 기술했다. 멜사 연대기는 에드워드 2세가 "동성애적 악행을 즐겼다"고 언급했지만, 피어스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2세의 생애>의 저자는 피어스가 왕을 홀렸다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그렇게나 사랑하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요나단은 다윗을 소중히 여겼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쳤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의 왕은 온건한 호의를 베풀 줄 몰랐고, 피어스에게는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 그래서 피어스는 마법사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2세와 피어스의 관계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토머스 프레드릭 투트(Thomas Frederick Tout, 1855 ~ 1929)는 두 사람이 동성 연인이었다는 주장은 정적들의 모함이라고 일축했다. 반면에 1988년 피어스의 전기를 쓴 JS 해밀턴은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건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피에르 샤플레는 에드워드 2세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를 낳았으며, 14세기 연대기 작가들은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인지에 대해 침묵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에드워드 2세가 정말로 피어스와 동성애 관계였다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기 딸을 에드워드 2세에게 시집 보내는 걸 허락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주장했다. 존 이스트번 보스웰은 저서 <기독교, 사회적 관용, 동성애>에서 피어스가 에드워드 2세의 연인이었으며, 유럽의 세속 세력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른 성적 도덕성에 대한 우려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이 마틴 헤인스는 2003년 에드워드 2세의 전기에서 피어스가 살해된 것은 왕의 총애를 독차지했기 때문이지 왕의 침실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