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20:59:20

에드먼드 모티머(제2대 위그모어 남작)

성명 에드먼드 모티머
Edmund Mortimer
생몰년도 1255년경 ~ 1304년 7월 1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
아버지 로저 모티머
어머니 모드 드 브라오스
형제 랄프, 이사벨라, 마거릿, 로저, 제프리, 윌리엄
아내 마거릿 드 피엔
자녀 로저, 모드, 에드먼드, 휴, 엘리자베스, 조앤, 이졸데
직위 제2대 위그모어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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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정복전과 스코틀랜드 정복전에 참여했으며, 모티머 가문의 영토를 대폭 확대했다.

2. 생애

1255년경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위그모어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초대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이고, 어머니는 제10대 에버게브니 남작 윌리엄 드 브라오스와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 에바 마셜의 딸인 모드 드 브라오스이다. 형제로 랄프(? ~ 1275), 이사벨라(? ~ 1292)[1], 마거릿(? ~ 1297)[2], 로저(? ~ 1326){* 치크 남작], 제프리(? ~ 1273), 윌리엄(1259 ~ 1297)[3]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가 성직자이자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다. 이에 따라 1265년에 요크의 재무관이 되었고, 1268년 요크 대주교의 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때 헨리 3세는 젊은 모티머에게 사금 고기를 보내줬다고 전해진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1274년, 형 랄프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상속인이 되었지만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1282년 3월에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고 나서야 영지로 돌아갔다. 그 후 아버지와 함께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해 웨일스 중부에서 활약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교묘한 계책을 써서 웨일스 반군 지도자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로 했다. 그는 허웰린에게 자신이 그의 친척임을 상기시키며, 빌스 성에서 만나서 자기 형제인 로저, 제프리, 윌리엄과 함께 허웰린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약속했다. 허웰린은 이를 믿고 소규모 분견대를 이끌고 빌스 성으로 가다가, 도중에 매복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다. 그 후 그의 머리는 에드먼드와 형제들에 의해 루들런 성에 있던 에드워드 1세에게 보내졌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허웰린이 빌스 성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283년 기사로 선임햇다. 2년 후, 에드먼드는 피엔과 텡그리 영주인 기욤 드 피엔의 딸 마거릿 드 피엔과 결혼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위그모어 경으로서 의회에 정기적으로 소환되었으며, 1294년부터 가스코뉴에 근무했고, 1298년부터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또한 장남 로저 모티머와 월터스톤의 기사인 피어스 드 제네빌의 딸이자 제2대 제네빌 여남작으로, 아일랜드와 웨일스에서 상당한 영지를 소유한 조앤 드 제네빌의 결혼을 주선해, 이를 통해 모티머 가문의 영지를 대폭 늘렸다.

다만 에드먼드와 왕실 간의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았다. 1290년, 몽고메리셔의 한 왕실 관리가 에드먼드가 재판을 위해 왕에게 넘겨져야 할 범죄자를 임의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에드워드 1세는 위그모어 성을 몰수했지만, 곧 이 조치를 철회하고 100마크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벌금 납부를 거부했고, 위그모어 성을 다시 압수되었다. 이후 양자간의 협의 끝에, 에드워드 1세는 벌금을 받는 대신에 위그모어 성을 돌려줬고, 그가 영지에서 재판권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1297년, 에드워드 1세가 플란데런 백국으로 진군할 준비를 했을 때, 에드먼드는 가신으로서의 서약 때문에 원정에 참여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한 영주들 중 한 명이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들과 깊은 갈등을 벌이다가,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레스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들에게 대폭 양보했다.

1304년 여름, 에드먼드는 빌스 성에서 봉기를 일으킨 웨일스인들과 교전하던 중 치명상을 입었고, 7월 17일 위그모어 성에서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 사후 장남 로저 모티머가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마거릿 드 피엔(1269년 이후 ~ 1333): 피엔과 텡그리 영주인 기욤 2세 드 피엔과 프랑스 대집사 장 드 브리엔의 딸 블랑슈 드 브리엔의 딸.
    • 로저 모티머(1287 ~ 1330): 제3대 위그모어 남작, 초대 마치 백작.
    • 모드 모티머: 제2대 베르됭 남작 티보 드 베르됭의 부인.
    • 에드먼드 모티머: 요크 민스터 재무관.
    • 휴: 신부.
    • 엘리자베스: 수녀.
    • 조앤: 수녀.
    • 이졸데: 초대 오들리 남작 휴 오들리의 부인.



[1] 제7대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과 초혼, 로버트 헤이스팅스와 재혼.[2] 제6대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레의 부인.[3] 로버트 드 무세그로스의 딸이자 상속인인 하와이즈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