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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프리 드 보훈(제4대 헤리퍼드 백작)

파일:험프리 드 보훈(제4대 헤리퍼드 백작).jpg
성명 험프리 드 보훈
Humphrey de Bohun
생몰년도 1276년 ~ 1322년 3월 1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스요크셔 버러브리지
아버지 험프리 드 보훈
어머니 마리아 드 파인스
배우자 루들란의 엘리자베스
자녀 엘레오노르, 존, 험프리, 윌리엄, 에드워드, 아그네스, 이네아스, 이사벨라
직위 제4대 헤리퍼드 백작, 제3대 에식스 백작, 잉글랜드 최고 순찰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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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부자를 축출하기 위한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2. 생애

1276년경 제3대 헤리퍼드 백작, 제3대 에식스 백작, 잉글랜드 최고 순찰관인 험프리 드 보훈과 파인스 영주 앙게랑 2세 드 파인스의 딸 마리아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129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헤리퍼드 백작, 에식스 백작, 잉글랜드 최고 순찰관 직위를 물려받았으며, 윌트셔, 에식스, 웨일스 변경지대에 있는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1300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케아라버록 공방전에 참여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의 여러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동시에 다양한 기사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그런데 기사 토너먼트에 너무 열광한 나머지, 한 번은 스코틀랜드 원정 도중에 피어스 개버스턴 및 여러 젊은 귀족과 함께 군대를 이탈해 잉글랜드로 가서 기사 대회에 참여했다. 나중에 이걸 알게 된 에드워드 1세는 격분해 그들을 군대 이탈 혐의로 처벌하려 했지만, 에드워드 1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가 간절히 설득하자 화를 풀고 용서했다.

1302년 에드워드 1세의 딸인 루들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고, 지참금으로 버크셔 영지를 받았다. 1306년 2월, 로버트 1세가 에드워드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하자,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던 로버트 1세의 영지를 몰수하고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이때 그는 영지 일부를 자기 것으로 삼았다. 또한 험프리는 스코틀랜드 원정 도중 로크메이벤 성을 점령헀고, 나중에 에드워드 1세로부터 애넌데일 전체를 받았다. 또한 로버트 1세의 아내이자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드 버그가 체포된 뒤 험프리에게 넘겨지기도 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가 피어스 개버스턴을 일방적으로 총애하자, 험프리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비롯해 군주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귀족을 보호하는 여러 헌장을 준수하도록 강요하고자 했다. 1310년,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강력한 요구에 못 이겨 잉글랜드에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험프리를 포함한 귀족들로 구성된 개혁 위원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1311년, 개혁 위원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자 41개 항목으로 구성된 칙령을 공포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은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얼마 후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로 떠난 뒤 개버스턴을 불러들였다. 이에 귀족들은 칙령을 위반한 걸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키기로 했다.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제10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그리고 험프리는 군대를 일으켜 요크로 진군했다. 개버스턴이 스커버러 성으로 도피하자,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 등이 스커버러 성을 포위했다. 그 후 개버스턴은 5월 19일에 재판이 열릴 때까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에이머에게 투항했다. 에이머는 개버스턴을 옥스퍼드셔로 이송하여 데팅턴 교구에 남겨뒀다.

그러나 에이머가 없는 사이에, 험프리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모의해 개버스턴을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간뒤 1312년 6월 19일에 처형했다. 여론은 개버스턴 처형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여러 성직자는 왕의 허가 없이 귀족을 처형하는 건 부당하다고 비판했지만, 많은 이들은 왕의 눈을 흐리고 국정을 농단한 개버스턴 처형은 정당하다고 여겼다. 1312년 9월 3일, 험프리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군했다. 이에 왕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웨이크 마을에서 이들을 저지했다. 이후 양자가 무력 충돌을 벌이는 듯했지만, 제8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가 중재해 이를 막았다.

그 후 개버스턴을 처형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와 협상했고, 1312년 12월 20일 교황 특사들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중재로 험프리와 랭커스터 백작, 워릭 백작,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 500명이 왕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한 뒤 사면받았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서 갈수록 위세를 더해가는 로버트 1세를 토벌하기로 마음먹은 에드워드 2세가 소집령을 내렸을 때, 험프리는 이에 응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군대 지휘관을 잉글랜드 최고 순찰관인 험프리가 아닌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에게 맡겼다.

1314년 6월 23일, 잉글랜드군은 적에게 포위된 스털링 성에서 남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배넉번 강에 도착했다.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그곳에서 잉글랜드군을 기다렸고, 양자는 배넉번 전투를 치렀다. 양군이 처음 전투 대형을 형성했을 때, 험프리의 조카 헨리 드 보훈이 로버트 1세가 선두 대열을 사열하는 걸 보고 분견대를 이끌고 느닷없이 뛰쳐나가 로버트 1세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로버트 1세는 뛰어난 무술을 발휘해 헨리를 해치웠다. 그 후 본격적으로 벌어진 전투에서, 로버트 1세의 탁월한 지휘와 잉글랜드 지휘부의 엉성한 지휘로 인해, 잉글랜드군이 참패했다. 총사령관 글로스터 백작은 전사했고, 험프리는 여러 영주 및 기사들과 함께 보스웰 성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곧 적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항복했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의 처남으로서 중요한 죄수로 취급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간청을 받아들여 험프리를 로버트 1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그, 로버트 1세의 딸 마조리, 주교 2명, 그리고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과 교환하기로 했다.

1314년 9월 요크에서 열린 의회에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군사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에드워드 2세에게 돌리고,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그는 여기에 더해 왕실 유지 비용을 절감하라고 요구했다. 배넉번 전투 참패로 위신이 추락한 에드워드 2세는 개혁 위원회의 요구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고, 개혁 위원회의 지도자 토머스가 잉글랜드의 비공식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토머스는 실정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이 점차 쇠퇴했고, 왕의 측근들 사이에서는 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디스펜서 가문이 글로스터 백작의 옛 영지를 온전히 독차지하려 하자,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 등 웨일스 변경 영주들이 반발해 1321년부터 디스펜서 가문에 맞섰다. 곧 토머스가 그들에게 합류한 뒤 디스펜서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무렵,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캔터베리로 가던 중 개혁 위원회의 일원이자 왕실 집사인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가 소유한 리즈 성에 들리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그 후 성 수비대와 왕비의 수행원들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왕비의 하인 6명이 살해되었다. 이에 1321년 10월 말,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지휘하는 왕실군이 리스 성벽 외곽에 주둔하여 압박을 가했다.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리즈 성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왕실군에 감히 대적하려 핟지 않았다. 10월 31일, 리즈 성이 항복했고, 성주와 그의 병사들은 처형되었으며, 베들스미어의 가족들은 런던으로 보내졌다.[1]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에드워드 2세의 복수를 두려워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1321년 12월 중순, 에드워드 2세는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다고 선언헀다. 그 후 왕실군이 추격하자, 로저 모티머와 험프리는 서둘러 도주했다. 이중 로저 모티머는 폰트프랙트 성에 피난처를 마련하고 토머스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었다. 결국 모티머는 1322년 1월 22일 슈루즈버리에서 에드워드 2세에게 항복하고 런던 탑으로 압송되었다. 그 해 2월, 에드워드 2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영지로 진군해 테트버리 성을 함락했다. 토머스는 버튼온트렌드에서 왕실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한 뒤 북쪽으로 진군해 험프리와 합류했다. 1322년 3월 16일, 초대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지휘하는 왕실군이 버러브리지 인근 나무 다리에서 반란군과 대면했다. 이어진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험프리는 다리를 뺴앗으려 했다가 전사했고,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패전 후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했다. 험프리의 작위와 영지는 몰수되었지만, 1326년 에드워드 2세가 폐위된 뒤 정권을 잡은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에 의해 복권되었고, 그의 자식들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루들란의 엘리자베스(1282 ~ 1316):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와 카스티야의 엘레오노르[2]의 딸. 험프리와 결혼하기 전에 홀란트 백작 얀 1세와 결혼했다.
    • 엘레오노르(1304 ~ 1363): 오몬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와 초혼, 에식스 남작이자 기사 토머스 다그워스와 재혼.
    • 존(1306 ~ 1336): 제5대 헤리퍼드 백작.
    • 험프리(1309 ~ 1360): 노샘프턴 백작.
    • 에드워드(1312 ~ 1334): 윌리엄 드 보훈과 쌍둥이 형제.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할리돈 힐 전투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1334년 스코틀랜드 원정 도중 강에 빠져 익사하려는 중장병을 구출하려다 익사했다.
    • 윌리엄(1312 ~ 1360): 노샘프턴 백작, 가터 기사, 종신 잉글랜드 무관장.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 아그네스(1313~ ?): 차틀리의 초대 페러스 남작 존 드 페러스의 부인.
    • 이네아스(? ~ 1322년 이후): 1322년 험프리 드 보훈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만 언급되었따.
    • 이사벨라( 1316년 5월): 출산 직후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사망.


[1] 당시 바스톨로뮤 배들스미어는 옥스퍼드에 있었다.[2]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3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