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에드먼드 피츠앨런 Edmund Fitzalan | |
생몰년도 | 1285년 5월 1일 ~ 1326년 11월 17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말버러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 | |
아버지 | 리처드 피츠앨런 | |
어머니 | 살루초의 앨리스 | |
누이 | 엘리노어, 앨리스, 마거릿 | |
배우자 | 앨리스 드 워렌 | |
자녀 | 리처드, 에드먼드, 마이클, 메리, 앨리스, 엘린, 캐서린, 엘리노어 | |
직위 | 제9대 아룬델 백작, 잉글랜드 왕실 수석 술잔 담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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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휴 르 디스펜서 부자와 함께 에드워드 2세의 총신으로 활동하다가 에드워드 2세가 축출된 뒤 처형되었다.2. 생애
1285년 5월 1일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의 말버러 성에서 제8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살루초 후작 토마스 1세의 딸인 앨리스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엘리노어[2], 앨리스[3], 마거릿[4]이 있었다. 1302년 아버지 리처드가 사망했을 때, 에드먼드는 아직 16세가 안 되어서 미성년자로 간주되었고,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존 드 워렌은 자신의 피후견인을 손녀 앨리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에드먼드는 처음에는 결혼을 거부했지만, 존 드 워렌의 압박에 못 이겨 1305년 결혼했다.1306년 4월 성인이 된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1세로부터 아룬델 가문이 지고 있던 4,234 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면제받았다. 같은 해 4월 22일 에드워드 1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뒤 에드워드 2세가 등극했다. 에드먼드는 8월 6일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이 콘월 백작으로 선임될 때 증인으로 참석했으며, 1308년 2월 25일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해 수석 술잔 담당자와 오아실 예복 담당자를 맡았다.
그러나 아룬델 백작은 곧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불만을 품고, 개버스턴을 반대하는 귀족 세력에 합류했다. 1310년 3월 16일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강력한 압박에 못 이겨 향후 18개월 동안 "법과 이성에 따라 왕국과 왕실을 강화"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귀족 21명의 개혁 위원회를 설립하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이 위원회에는 아룬델 백작도 가담했다. 1311년,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못 이겨 개버스턴을 추방했지만, 1312년 1월 요크에서 개버스턴을 불러들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군대를 일으켜 개버스턴을 체포하기로 했다.
1312년 5월 4일, 에드먼드를 비롯한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접근하자,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은 탈출했다. 개버스턴은 나중에 견고한 요새인 스카버러 성에서 포위되었다. 5월 19일, 개버스턴은 8월 1일 의회에서 재판이 열릴 때까지 월링포드 성에서 가택 연금을 유지해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그리고 에드먼드 등은 재판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개버스턴을 납치해 워릭으로 데려갔고, 6월 19일에 개버스턴을 참수했다.
1313년 10월 14일, 개버스턴을 살해한 자들은 사면되었고, 이틀 후에는 에드먼드도 왕에게 반기를 든 모든 귀족 중 한 사람으로서 사면받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에드워드 2세에게 불만을 품었고, 랭커스터 백작, 워릭 백작, 서리 백작 등과 함께 1314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헀다. 그들은 그 이유로 왕은 법령에 따라 의회의 허가 없이는 스코틀랜드를 떠날 수 없는데, 의회의 허가 없이 떠난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은 배넉번 전투 참패로 끝났고,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의 지도하에 잉글랜드의 지배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다.
1316년 2월, 에드먼드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설립한 개혁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에드먼드는 토머스의 거듭된 실정에 환멸을 느끼고 에드워드 2세의 새로운 총신이 된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와 정치적 제휴를 맺었다. 두 디스펜서가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이를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자, 귀족 대부분은 왕에게 불만을 제기했지만 에드먼드는 오히려 왕을 지지했다. 그는 장남 리처드를 휴 디스펜서 더 영거의 딸 이사벨라와 약혼하기도 했다.
1316년 11월 19일, 에드먼드는 스코틀랜드 변경 지대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317년 4월 23일, 제드버러 남쪽의 린탈리에서 로버트 1세의 최측근인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게 격파되었다. 1318년 8월, 그는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및 추종자들의 일시적 화해를 이끈 리크 조약에 서명했고, 왕에게 조언하는 임무를 맡은 의회 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319년 9월,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2세의 베릭 탈환 작전에 참여했지만, 베릭 성이 굳건히 버티는 사이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북부를 대거 약탈하자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자기 영지를 지키기 위해 이탈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1321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등이 디스펜서 부자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키고 디스펜서 가문 영지를 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그는 이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아들 리처드와 이사벨라 디스펜서의 결혼을 거행했다. 1321년 8월 내전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디스펜서 가문의 일시적인 추방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지만, 3개월 후 리즈 성 수비대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 일행을 모욕하고 급기야 하인 6명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지자, 왕실군에 가담하여 리즈 성을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왕을 대신해 성직자들에게 디스펜서 가문의 추방이 불법이라고 인정해 줄 것을 촉구했다.
1321/1322년 겨울, 에드먼드는 제7대 서리 백작이자 처남인 존 드 워렌과 함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이끄는 귀족 반란군에 대적하는 왕실군을 지휘했다. 1322년 1월 5일, 에드먼드는 웨일스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같은 달에 토머스에게 가담했던 위그모어 남작 로저 모티머의 항복을 받아냈다. 3월 11일, 에드먼드는 토머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반역자로 선포되는 것을 지지했다. 3월 22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랭커스터 반란군을 섬멸하고 토머스가 체포된 뒤, 에드먼드는 폰터프랙트 성에서 토머스에게 교수형을 선고한 판사 중 한 사람이었다.
에드먼드는 반란군에 맞선 공적을 인정받고 후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반군에게서 몰수한 많은 영지를 받았는데, 여기에는 모브레이 영지에 있는 엑스홀름 성과 오스웨스트리 가문 영지에 합병된 모티머 영지가 포함되었다. 1322년, 에드먼드는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23년 웨일스 북부와 남부의 수석 재판관으로 이명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325년에는 웨일스 변경 지방의 수호자로 선임되었고, 서리 백작령의 계승권을 받았다. 한편, 그는 처형된 토머스의 주요 동맹자였던 헤리퍼드 백작과 워릭 백작의 아들들에게 두 딸을 약혼시켜서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의 결혼 동맹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헤리퍼드 백작 존 드 보훈과 딸 앨리스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1326년, 에드워드 2세는 로저 모티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군대에 의해 축출되었다. 에드먼드는 왕과 함께 서쪽으로 도망쳤지만, 파위스의 영주 존 찰튼에게 슈루즈버리에서 체포되었다. 그 후 헤리퍼드에 머물던 이자벨 왕비에게 압송되었고, 디스펜서 가문의 공범이라는 혐의와 랭커스터 백작의 처형에 동의하고 왕비를 모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약식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로저 모티머의 주장에 따라 11월 17일에 참수되었다. <랜다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최악의 악당"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그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기 위해 매를 22번이나 맞았다고 한다.
에드먼드의 유해는 호몬드 수도원에 있는 피츠앨런 가족 납골당에 묻혔으며, 그의 막대한 재산은 약탈당했고 대부분은 이자벨 왕비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는 반역자로서 심판받았기 때문에, 재산과 직함은 상속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몰수되었다. 1년에 600파운드의 수입을 보장하는 아룬델 성과 그 주변 영지는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에게 넘어갔고, 슈롭셔의 영지는 로저 모티머에게 넘어갔다. 그러다가 1330년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친위 쿠데타로 인해 처형된 후, 1331년 2월 8일 아들 리처드 피츠앨런이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앨리스 드 워렌(1287 ~ 1338):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손녀이자 서리 자작 윌리엄 드 워렌의 딸.
- 리처드 피츠앨런: 제10대 아룬델 백작.
- 에드먼드 피츠앨런: 1349년에 사망.
- 마이클 피츠앨런: 유년기에 사망.
- 메리 피츠앨런(? ~ 1396): 블랙미어의 4대 스트레인지 남작 존 르 스트레인지의 부인.
- 엘린 피츠앨런(? ~ 1386): 노킨의 스트레인지 남작 로저 르 스트레인지의 부인.
- 엘리스 피츠앨런(? ~ 1326): 제5대 헤리퍼드 백작 존 드 보훈의 부인.
- 캐서린 피츠앨런(? ~ 1375/1376): 제2대 허시 남작 헨리 허시와 초혼, 기사 앤드류 피브렐과 재혼.
- 엘리노어 피츠앨런(? ~ ?): 제1대 리슬 자작 제러드 드 리슬의 부인.
- 엘리자베스 피츠앨런(? ~ ?): 제4대 라티메르 남작 윌리엄 라티메르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