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20:18:36

존 드 워렌(제7대 서리 백작)

파일:존 드 워렌(제7대 서리 백작).jpg
성명 존 드 워렌
John de Warenne
생몰년도 1286년 6월 24일 또는 6월 30일 ~ 1347년 6월 30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서리 백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서리 백작령
아버지 윌리엄 드 워렌
어머니 조안 드 베레
배우자 바르의 조안, 모드 드 네르포드
직위 제7대 서리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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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과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에드워드 2세와 대귀족 사이의 갈등이 벌어질 때 편을 자주 바꾸었다.

2. 생애

1286년 6월 24일 또는 6월 30일에 윌리엄 드 워렌과 조안 드 베레 사이의 외아들로 출생헀다. 그의 아버지는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외아들로, 잉글랜드 여러 주에 걸친 광대한 영지의 상속자였다. 워렌 가문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방계 가문이었으며,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아내 앨리스 드 뤼지냥은 헨리 3세의 이복 누이였다. 또한 어린 존 드 워렌은 에드워드 2세의 사촌이기도 했다.

아버지 윌리엄 드 워렌은 아들 존이 태어난 지 불과 6개월 만인 1286년에 벌어진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죽었다. 그 후 어린 존이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1304년 조부가 사망한 뒤 서리 백작위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1306년 5월 22일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와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5월 30일부터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의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1307년 2월, 에드워드 1세는 조부가 왕실에 진 빚인 6,693 파운드를 탕감했다.

1307년 7월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는 그 해 8월 6일 총신인 피어스 개버스턴을 콘월 백작위에 선임했다. 존은 이에 서명한 귀족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후 개버스턴이 에드워드 2세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개버스턴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1308년, 존은 다른 영주들과함게 왕에게 개버스턴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개버스턴은 결국 추방되었고, 1311년 개버스턴이 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을 때,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가 긴급 체포한 뒤 참수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분노핸 랭커스터 백작과 워릭 백작을 적대헀고, 존은 왕의 명령 없이 참수까지 한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2세 편으로 돌아섰다.

1313년, 존은 에드워드 2세로부터 그때까지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1년 후 배넉번 전투로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왕과의 사이가 나빠졌지만, 1317년 2월 9일 클라렌던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을 때 에드워드 2세와 화해했다. 5월 9일, 그는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아내인 앨리스 드 라시를 앨리스의 동의 하에 납치했다. 토머스는 이에 분노했고, 요크셔와 북부 웨일스 일대에서 존과 토머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1318년 8월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리크 협약이 체결되었지만, 존의 이익은 고려되지 않았고, 그는 곧 랭커스터 백작과 불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1321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존은 처음에는 반란군을 지지했다가 곧 왕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는 반란에 가담한 로저 모티머를 체포한 백작 4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1322년 3월 22일 폰트프랙트에서 반란 수괴 토머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1325년에서 1326년까지 에드워드 2세의 차남 우스스톡의 에드먼드의 수행원으로서 기옌으로 갔다. 이후 유럽 대륙으로 달아난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2세에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자, 에드워드 2세는 존과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존에게 여러 영지와 엑스홀름 섬의 수호자 직위, 북부 주의 수석 감독관 직위를 넘겨줬다.

1326년 9월 프랑스의 이자벨과 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에드워드 왕자를 내세워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존은 제9대 아룬델 백작 에드먼드 피츠앨런과 함께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다. 그런ㅏ 잉글랜드 귀족 대부분은 이자벨과 모티머 편으로 가담했다. 아룬델 백작은 모티머의 명령으로 참수되었지만, 존은 대세가 기울어진 걸 확인하자마자 모티머 편으로 돌아선 뒤 1327년 1월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런던 탑에 감금된 에드워드 2세에게 퇴위를 요구해 관철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3세의 섭정 위원회에 포함되었고, 1327년 3월 대관식에 참석했다. 존은 엑스홀름 섬을 모브레이 가문에 돌려줘야 했지만, 그 대가로 왕실로부터 땅과 돈 등 여러 가지 보조금을 받았다.

존은 에드워드 3세 치하에서 스코틀랜드 문제에 가담했다. 1327년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고, 1329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사망하자 전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의 장남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332년, 1333년, 1335년에 스코틀랜드로의 원정에 참여했으며, 에드워드 3세는 133년 2월 27일 존에게 스트래선 백작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에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 칭호는 헛된 이름일 뿐이었다.

존은 에드워드 3세가 부재한 동안 명목상의 섭정자인 콘월 공작 에드워드의 통치 하에서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의회에 여러 번 포함되었다.(1338년, 1340년, 1345년) 그는 1342년에 "나이와 병약함으로 인해 던스터블 토너먼트에 참가할 수 없었던" 백작들 중 한 명으로 언급되었다. 1347년 6월 30일에 사망했고, 루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워렌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고, 그의 재산과 작위는 그의 조카인 리처드 피츠앨런이 물려받았다.

3. 가족

  • 바르의 조안(1295 ~ 1361): 헨리 3세와 바르 여백작 엘레노어의 딸. 1306년 5월 25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존 드 워렌과 결혼했다. 그러나 존은 곧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코니스브러 성으로 보내버린 뒤 교황청에 조안과 자신은 친척 관계라서 근친 결혼이니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존은 끝내 조안을 거들떠 보지 않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장 2세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갔을 때, 조안을 애인으로 두었다고 한다.
  • 모드 드 네르포드: 노퍽 기사 윌리엄 드 네르포드의 딸이다. 존은 조안과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정부로 삼았으며, 1311년 교황청에 조안과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모드와 약혼했었다고 주장했다. 교황청은 조안과의 결혼 무효를 허가하지 않았지만, 존은 모드를 사실상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위협을 받았고, 왕실의 압력도 가해지자, 존은 별 수 없이 1320년경에 모드를 자기 영지에서 내보내야 했다.
    • 에드워드 드 워렌: 사생아. 스키튼 영지의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