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헨리 퍼시 Henry Percy | |
생몰년도 | 1273년 3월 25일 ~ 1314년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서식스 피츠워스 성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안위크 성 | |
아버지 | 헨리 퍼시 | |
어머니 | 엘리노어 드 워렌 | |
형제 | 윌리엄, 존 | |
배우자 | 엘리노어 피츠앨런 | |
자녀 | 헨리 퍼시, 윌리엄 퍼시 | |
직위 | 탑클리프의 퍼시 남작, 초대 퍼시 남작, 뷰컨 백작, 캐릭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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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퍼시 가문의 일원.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2. 생애
1273년 3월 25일, 제7대 탑클리프의 퍼시 남작인 헨리 퍼시와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의 딸 엘리노어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윌리엄과 존이 있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인 헨리가 1293년 7월 20일 아버지 사후에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다. 1294년 6월 11일, 성인이 된 뒤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10년간 에드워드 1세가 벌인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헀다. 1296년 3월 30일 베릭 공략에 기여한 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96년 9월 갤러웨이와 에어셔의 수호자이자 덤프리스의 순회 판사로 선임되었고, 이후 수년간 이 직책들을 여러 번 맡았다. 1297년 7월, 퍼시는 스코틀랜드의 성직자와 귀족으로부터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1297년 9월, 퍼시의 외조부인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반군에게 패배했다. 그 후 퍼시는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와 함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갤러웨이를 침공할 군대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클리퍼드와 퍼시는 즉시 갤러웨이로 진군해 별다른 문제 없이 해당 지역의 반군을 물리쳤다. 1298년, 퍼시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중기병 500명을 파견한 잉글랜드 귀족 중 한 명으로, 폴커크 전투에 참여해 윌리엄 월레스 격파에 일조했다. 1300년 케어라버럭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306년 4월 5일 에드워드 1세에 의해 국왕의 부관이자 랭커스터, 웨스트모어랜드, 컴벌랜드, 에어, 위그타운, 덤프리스, 그리고 갤러웨이 전역의 기병대 및 보병대 대장으로 선임되어 다른 잉글랜드 북부 귀족들과 함께 로버트 1세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듯 에드워드 1세의 핵심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퍼시는 에드워드 1세에게 후한 보상을 받았다. 1299년 2월 20일, 그는 사촌인 잉헬람 드 벨리올이 소유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모든 영지를 받았다. 이 영지에는 잉글랜드에 있는 영지 2개와 에어의 영지, 엥거스의 레드 성이 포함되었다. 1304년, 퍼시는 뷰컨 백작 존 코민이 잉글랜드를 상대로 맞섰다가 몰수된 뷰컨 백작령을 받았다. 하지만 코민 가문은 곧 에드워드 1세의 편으로 돌아섰고, 뷰컨 백작령은 도로 코민 가문에 반환되었다. 그 대신, 에드워드 1세는 퍼시에게 거금을 보상했다. 1306년 4월, 퍼시는 로버트 1세가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몰수된 캐릭 백작령을 받았다. 1307년 2월, 퍼시는 튠버리 성에서 로버트 1세에게 포위되었다가 에드워드 1세의 군대의 구원을 받았다. 이 기록은 퍼시가 적어도 한동안 캐릭 백작령 일부를 점령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그는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된 최초의 퍼시 남작이었다. 1298년 1월 요크에서 처음으로 의회에 참석했으며, 1299년 2월 6일 퍼시 남작으로서 소환장을 처음 받았다. 그 후 1314년 7월 29일까지 의회에 꾸준히 참여했다. 1301년 2월 2일, 퍼시는 링컨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영주들이 교황청에게 보내는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의 집단 서한에 서명했다. 그는 에드워드 2세 치세 초기 의회에도 자주 참석했다. 그의 서명은 1309년 8월 9일에 귀족들이 교황에게 보내는 스탬퍼드 서한과 1310년 3월 17일자 성직자 청원서에 기재되었다.
퍼시의 주요 영지 중 하나는 노섬벌랜드의 안위크 성이었다. 이 성은 11세기에 질베르 드 테송이 건설했고, 나중에 베시 가문이 소유했다가 1288년에는 더럼 주교의 통치를 받았다. 1309년 11월 19일, 퍼시는 더럼 주교 앤서니 베크로부터 안위크 성을 구입했다. 이때 앤서니 베크는 이듬해 미카엘 축일 전에 성을 다시 살 기회를 얻었다. 동시대 사료에 따르면, 앤서니 주교는 1297년에 사망한 윌리엄 베시의 사생아인 윌리엄을 위해 성을 관리했지만, 퍼시에게 팔아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문서화된 증거는 없다. 안위크 성 인수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에서 퍼시 가문의 입지를 강화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퍼시는 노섬벌랜드의 주요 지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안위크 성은 나중에 퍼시 가문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재정난을 이유로 스코틀랜드에 군대를 보내지 않고 방치했다. 그 결과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세력을 확장했다. 게다가 에드워드 2세는 아버지에 의해 추방되었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을 궁정으로 다시 불러들여 콘월 백작에 선임하고 조카딸 마거릿 드 클레어와 결혼시켰다. 귀족들은 일개 가스코뉴 하급 귀족이었던 개버스턴의 급부상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하지만 퍼시는 처음에는 개버스턴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308년 6월 16일 개버스턴을 콘월 백작에 선임한다는 왕실 헌장에 서명한 소수의 귀족엔 그의 서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개버스턴에게 불만을 품고, 그에 대적하기 시작했다.
1310년 3월,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에게 불만을 품은 영주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향후 18개월 동안 개혁을 추진할 귀족 위원회를 수립하는 걸 동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법과 상식에 따라 왕국과 왕실을 정의하고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주교 6명, 백작 8명, 남작 5명이 포함되었다. 퍼시는 여기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1311년 10월 5일 세인트 폴 대성당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개혁 조하을 발표한 의원 그룹의 일원이었다. 다만 퍼시는 1310년 8월 노샘프턴으로 출두하여 로버트 1세 토벌전에 참여하라는 에드워드 2세와 개버스턴의 소환령에 응한 얼마 안 되는 귀족이기도 했다.
1311년 3월 20일, 퍼시는 더럼 교구의 수호자로 이명되었고, 12월 2일에는 트렌트 너머 산림의 순회판사가 되었으며, 12월 18일에넌 밤버러 성 수호자가 되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가 귀족 위원회의 개혁을 거부했을 때, 퍼시는 이에 항의했다가 트렌트 강 너머의 산림 순회판사직을 박탈당했다. 1312년 5월, 퍼시는 개버스턴이 피난처로 삼았던 스카버러 성 포위에 여러 귀족과 함께 참여했다. 5월 19일 개버스턴이 8월 1일 의회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때까지 월링포드 성에 가택 연금 당하는 것에 동의하고 항복하자, 퍼시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와 함께 개버스턴의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워릭 백작 기 드 뷰챔프는 개버스턴을 납치해 워릭으로 끌고 간 뒤 6월 19일에 참수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간의 대립이 격렬하게 벌어질 때 랭커스터 백작 편을 들었기에, 에드워드 2세가 랭커스터 백작을 정계에서 축출한 후에는 그의 땅이 왕에 의해 일시적으로 압류되었지만, 1313년 10월 16일 리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에드워드 2세와 랭커스터 백작 추종자들이 화해할 때 사면 받고 영지를 돌려받았다.
1314년 말에 안위크 성에서 사망했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중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배넉번 전투에서 참패하는 것으로 끝난 1314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하라는 소집을 받았지만 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파운틴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제8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엘리노어 피츠앨런과 결혼해 두 아들 헨리와 윌리엄을 두었다. 그 중 장남 헨리 퍼시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