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앤드류 하클레이 Andrew Harclay | |
생몰년도 | 1270년 ~ 1323년 3월 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웨스트모어랜드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컴브리아 칼라일 | |
아버지 | 마이클 하클레이 | |
어머니 | 조앤 피츠존 | |
형제 | 헨리 하클레이 | |
직위 | 초대 칼라일 백작 |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에드워드 2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2. 생애
하클레이는 웨스트모어랜드의 하틀리 마을에서 유래했다. 아버지는 웨스트모어랜드의 기사이자 클리퍼드 가문의 가신으로서 1285년부터 1296년까지 컴벌랜드 보안관을 역임한 마이클 하클레이이며, 어머니는 요크셔 지주 윌리엄 피츠존의 딸 조앤이다. 형제로 옥스퍼드 대학 총장이었던 헨리 하클레이가 있었다. 초년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1304년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에 거론된 것으로 처음 기록에 등장했다. 1309년, 스코틀랜드인들에 대항하여 국경을 방어하는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를 지원했다. 1311년 컴벌랜드 보안관으로 선임되면서 입지를 다졌고, 1312년 샤이어 기사로 선출되었으며, 1313년 12월 스코틀랜드군의 침략에 대항한 방어군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 1315년 여름, 로버트 1세가 칼라일을 포위 공격하자, 칼라일 성채 수비대 지휘관으로서 끝까지 분전해, 로버트 1세가 8월 1일에 공략을 포기하고 딴 곳으로 가도록 했다. 에드워드 2세는 그의 공적을 인정해 1,000 마크를 수여했다.
1315년 말 또는 13165년, 하클레이는 스코틀랜드인들과 교전하다가 생포되었고, 2,000 마크의 몸값을 요구받았다. 지난 수년 간 지위가 급격하게 상승한 그를 시기하던 자들은 하클레이가 스코틀랜드인들과 짜고 일부러 생포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이 소문을 믿지 않고 그를 석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을 줬다. 1319년 보안관으로 복직하는 동시에 칼라일 성 및 코커머스 성의 수호자가 되었고, 스코틀랜드 변경 서부 지역의 수석 관리인이 되었다. 1321년에는 의회에 직접 소환되기도 했다.
1322년 3월,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타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던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왕실군을 피해 북쪽으로 후퇴했다. 이때 하클레이는 컴벌래늗와 웨스트모어랜드에서 병력을 소집한 뒤, 왕의 지시에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요크셔의 리폰에 이르렀을 때, 그는 랭커스터 백작이 다음 날 인근의 버러브리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그곳을 먼저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즉시 군대를 돌려 버러브리지를 선점해 적군이 강을 건너는 걸 막았다.
1322년 3월 16일 버러브리지에 도착한 랭커스터 백작은 하클레이의 군대가 가로막은 걸 목격했다. 왕실군이 뒤쫓아오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다리를 건너야 했던 그는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에게 다리를 막을 적을 돌파하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후미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헤리퍼드 백작이 기병대를 이끌고 다리로 진격하자, 하클레이는 파이크나 창을 손에 든 보병들애게 밀집 대형을 형성해 적 기병들을 저지하게 했다. 헤리퍼드 백작의 기병대는 끝내 그들을 뚫지 못했고, 헤리퍼드 백작은 다리 위에서 전사했다. 그 후 랭커스터 백작은 하클레이의 궁수들이 쏟아내는 화살비에 질려 도주했다. 그 후 밤 사이에 왈실군이 도착했고, 부하들이 대거 도주하자, 랭커스터 백작은 다음 날 항복했고 3월 22일에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2세는 하클레이가 다리를 가로막아 준 덕분에 반역자 랭커스터 백작을 처단할 수 있었다고 여기고 그에게 후하게 보상했다. 1322년 3월 25일, 하클레이는 초대 칼라일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1,000 마크의 수입을 매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연락망 관리 책임자로도 선임되었다. 1322년 8월, 에드어드 2세는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을 자행한 스코틀랜드인들을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 그리고 하클레이와 함께 2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가 전투에 불응하고 청야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후 잉글랜드로 철수한 에드워드 2세는 겨울이 다가왔기 때문에 올해 전쟁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여기고 군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로버트 1세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공세를 재차 펼치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로버트 1세가 인근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급히 각지에 전령을 보내 소집령을 전달했다.
하클레이는 왕명을 접수하고 급히 군대를 끌어모았지만, 그가 미처 현장에 도착하기 전인 1322년 10월 14일 올드 바이랜드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왕실군을 격멸하고 잉글랜드 사령관 장 드 브르타뉴를 생포했고, 에드워드 2세는 요크로 간신히 도피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하클레이는 에드워드 2세가 무능해서 로버트 1세의 침략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칼라일 주변을 포함한 잉글랜드 북부가 초토화하고 있으니, 더 이상 로버트 1세에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에드워드 2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기로 했다.
1323년 1월 3일, 하클레이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에 4만 마크를 지불하고 에드워드 2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가 이 조약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 로버트 1세와 하클레이는 동맹을 맺기로 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해, 하클레이를 당장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하클레이는 지지자들을 소집하려 애썼지만, 2월 25일 파프캐슬의 소유권을 놓고 그와 경쟁했던 초대 코커머스의 루시 남작 앤서니 드 루시에게 체포되었다.
1323년 3월 3일, 하클레이는 칼라일에 있는 왕의 재판소에 출두한 뒤,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 끌려가기, 사지 절단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처형당할 당시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자신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머리는 요크셔의 나레스버러 성으로 옮겨져 왕에게 전달되었고, 나중에 런던 브리지에 매달렸다. 그의 신체는 4부분으로 잘려나가 칼라일, 뉴캐슬, 브리스톨, 도버에 보내져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가 처형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와 13년간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클레이의 머리는 5년 후인 1328년 런던 브리지에서 제거되었고, 그의 형제 헨리가 에드워드 3세에게 절단된 신체를 기독교 장례를 위해 가족에게 돌려달라고 청해 허락받았다. 이후 그의 조카가 그에게 걸린 반역 혐의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