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3 10:14:46

올드 바이랜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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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바이랜드 전투
영어: Battle of Old Byland
시기 1322년 10월 14일
장소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올드 바이랜드
원인 잉글랜드 왕실을 압박해 자신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게 하려는 로버트 1세의 공세
교전국 파일:스코틀랜드 국장.svg스코틀랜드 왕국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왕국
지휘관 파일:Arms_of_Bruce.svg.png 로버트 1세 파일:Arms_of_Jean_de_Bretagne.svg.png 장 드 브르타뉴
결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영향 에드워드 2세의 위상 추락.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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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22년 10월 14일,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를 사로잡으려 하면서 벌어진 전투.

2. 배경

1322년 8월, 에드워드 2세잉글랜드 북부 대약탈을 벌인 로버트 1세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고,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 그리고 라우스 백작 존 드 버밍엄과 함께 2만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북상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수중에 넘어간 베릭 성을 우회한 뒤 에든버러로 진군했다. 로버트 1세는 이들과 대적하는 걸 회피하고자 군대를 포스 강 건너편으로 철수하면서, 잉글랜드군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져갔다. 에드워드 2세는 로디언에서 적군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8월 19일 머슬버러에서 야영한 뒤, 함대의 보급을 받고자 항구 도시인 리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수송 함대는 폭풍우로 인해 곳곳으로 흩어지면서 리스에 도착하지 못했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8월 말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이때 에드워드 2세의 사생아인 아담 피츠로이가 사망했다. 9월 2일 잉글랜드에 도착한 에드워드 2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남을 의사를 밝혔고, 9월 26일 밤버러, 워크워스, 던스턴버러, 올닉 성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의 침략에 직면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한편, 로버트 1세는 잉글랜드군이 돌아가자 공세를 재차 벌이기로 했다. 9월 30일, 솔웨이 만에서 배를 타고 원더미어의 보우네스 인근으로 이동한 그는 10월 5일 칼라일 주변 지역을 파괴해,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가 군대를 모집할 여력이 없도록 했다. 그 후 페나인 산맥을 통과하면서 스콧비, 칼라튼, 컴류 교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군이 이렇게 빨리 쳐들어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한 뒤 리보 수도원에 머물렀다.

3. 경과

10월 12일,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요크셔의 노샐러튼에 도착했다. 이곳은 에드워드 2세가 머물던 리보 수도원으로부터 불과 24km 떨어졌다. 에드워드 2세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여러 귀족과 군대에 복귀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스코틀랜드군이 그 사이에 그를 잡으러 진격했다. 10월 14일 아침, 노샐러튼과 리보 수도원 사이의 바이랜드 수도원에 겨우 도착한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는 스코틀랜드군을 저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 도중, 스코틀랜드군 일부가 잉글랜드군 전선을 우회한 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서 후방 기지를 급습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고, 리치먼드 백작은 랄프 코브햄, 프랑스 기사이자 대 술잔 담당자 앙리 드 쉴리와 함께 생포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2세는 바이랜드 수도원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패배 소식을 접했다. 그는 급히 도망쳐야 했고, 왕의 인장을 비롯한 수많은 귀중품을 남겨뒀다. 이후 스코틀랜드군의 추적을 받자, 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와 함께 브리들링턴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그곳 수도원장은 왕을 버스트윅으로 인도했고, 에드워드 2세는 그곳에서 숨을 돌린 뒤 10월 18일에 요크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브리들링턴 수도원을 파괴하고 요크셔 동부 지역을 철저히 약탈했다.

한편, 타인머스 수도원에 머물던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는 스코틀랜드군이 접근하자 남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에드워드 2세는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의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를 적대햇던 이자벨은 단호히 거부하고 다른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그러지 못했고, 타인머스는 곧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게다가 해상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란데런 백국 함대가 순찰했다.

이자벨은 적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호위대 일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배를 징발하도록 했다. 그 후 이자벨과 수행원들이 배에 타는 동안, 스코틀랜드군이 도시로 진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자벨의 수행원 2명이 사살되었다. 이자벨은 배에 오른 뒤 플란데런 선박들을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륙한 뒤 요크로 가서 남편과 합류했다. 이자벨은 에드워드 2세가 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에게 속아서 자신을 저버렷다고 비난했다. 에드워드 2세는 이에 맞서 이자벨과 동맹을 맺은 더럼 주교 루이스 드 보몽이 이자벨이 제때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이리하여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다.

4. 이후

1322년 11월 14일,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추가 공세를 막기 위해 겨울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 머물기로 결의했다. 또한 칼라일 백작 앤드류 하클레이를 스코틀랜드 변경 전체의 방어자로 선임했으며, 토머스 드 그레이 등 지역 사령관들에게 노럼 방어를, 루이스 드 보몽 주요게에 더런 방어를 맡겼다.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새로운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과했고, 1323년 2월 2일에 새로운 군대가 요크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를 이길 가망은 없다고 여겼기에, 왕을 더 이상 도우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에드워드 2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변경 전체 방어자로 선임된 앤드류 하클레이는 에드워드 2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와 협상하기로 했다. 1323년 1월 3일, 하클레이는 로크마벤에서 로버트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받고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그 대가로 잉글랜드 왕국에 4만 마크를 지불하고 에드워드 2세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워드 2세가 이 조약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해 무력 사용이 필요한 경우, 로버트 1세와 하클레이는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하클레이가 자기 허락 없이 그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노했다. 그는 즉시 체포령을 내렸고, 하클레이는 2월 25일 체포된 뒤 3월 3일 모든 직위와 영지를 박탈당하고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