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3eaa 0%, #005eb8 30%, #005eb8 70%, #003eaa);"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던바 전투 | 스털링 다리 전투 | 폴커크 전투 | 로슬린 전투 | 해프루 전투 |
메스번 전투 | 달리그 전투 | 라이언 호 전투 | 글렌 트룰 전투 | 라우던 힐 전투 | |
인버루리 전투 | 브랜더 고개 전투 | 배넉번 전투 |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 | 베릭 공방전 | |
마이톤 전투 | 1322년 로버트 1세의 잉글랜드 대약탈 | 올드 바이랜드 전투 | 웨어데일 전역 | }}}}}}}}}}}}}}} |
메스번 전투 영어: Battle of Methven | ||
시기 | 1306년 6월 19일 |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 서쪽 메스번 | |
원인 |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왕위 등극과 에드워드 1세의 토벌 명령.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4,500명 | 3,000명 |
피해 | 궤멸. | 미미함. |
결과 |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로버트 1세의 패주. |
[clearfix]
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06년 6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퍼스 서쪽 메스번에서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한 전투.2. 배경
1304년 2월 9일, 스코틀랜드 수호자 존 3세 코민 및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다. 그 후 그 해 2월 20일 해프루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의 잔여 반란군을 섬멸하고 7월 말 스털링 성을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면서 전쟁을 일시적으로 종결한 에드워드 1세는 전후 수습에 나섰다. 그는 자기에게 저항했던 이들 대부분을 용서하고 영지를 돌려줬으며,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윌리엄 램버튼 주교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서 직위를 유지하는 걸 허락했다.1305년 봄,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의회를 소집한 뒤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 로버트 브루스, 존 모브레이를 자문위원으로 선임하여 스코틀랜드를 자기 대신에 다스리게 했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스코틀랜드인 10명(주교 2명, 수도원장 2명, 백작 2명, 남작 2명, 포스 강 북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 포스 강 남쪽의 스코틀랜드인 대표 한 명)을 선출하게 했다. 여기에 로디언의 총독으로 존 시그레이브를 선임했고, 스코틀랜드 대재판장으로 존 센데일을 선임했다.
스코틀랜드 대표 10인은 1305년 9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참석했고, 이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행정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장 드 브르타뉴가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베버코츠의 윌리엄이 재상으로, 존 샌달이 내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 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의회는 스코틀랜드인과 잉글랜드인으로 구성된 4쌍의 판사를 임명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보안관과 성주가 임명되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에는 잉글랜드인 보안관이 맡았다. 또한 스코틀랜드 위원 22명이 구성되어 총독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는데, 이 위원의 구성원으로는 주교 4명, 존 3세 코민과 로버트 브루스를 포함한 백작 5명, 남작 9명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는 자기가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어야 하는데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아예 잉글랜드 왕국에 병합한 건 불합리하다며 불만을 품고, 극비리에 램버튼 주교와 접촉해 새로운 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에드워드 1세가 중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1306년 2월 10일, 브루스는 덤프리스의 프란치스코회 교회에서 존 3세 코민과 만나 자신의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존 3세 코민은 존 발리올이 왕이 되어야 하지, 그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어진 논쟁 와중에, 브루스는 코민을 살해했다.
그 후 로버트 브루스는 교회에서 살해를 저질렀기 때문에 파문 당했지만, 글래스고 주교 로버트 위셧을 찾아가서 그에게 사면받았다. 그 후 6주 만에 스콘에서 뷰컨 백작부인 이사벨라 맥더프 등의 추대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등극했다.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은 여세를 이어가 덤프리스, 달스윈튼, 티버스, 에어 성을 공략했고, 커닝햄의 로버트 보이드는 로데세이 성을 점령하고 인버킵을 포위했다. 또한 그는 두나버티 성을 확보함으로써, 클라이드만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부 성 5개를 소유했다. 브루스는 일부 귀족으로부터 반란을 지지받았지만, 잉글랜드군이 확고하게 장악한 로디언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 케이스네스, 서덜랜드, 로스, 뷰컨, 던바 등 다수의 귀족도 브루스의 반란에 반대했다. 그들은 존 발리올 만이 정당한 군주라고 여겼고, 존 3세 코민을 살해한 것을 비난했다. 특히 코민 가문은 로버트 브루스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한편,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는 1306년 4월 5일에 에이머 드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발랑스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역시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스트라스보기의 존을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3. 경과
1306년 6월,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는 퍼시 남작 헨리 퍼시,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클리퍼드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 주에서 모은 3,000명을 이끌고 퍼스로 이동해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6월 18일, 로버트 1세는 적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병사 4,500명을 이끌고 퍼스 서쪽의 구릉 지대를 넘어 퍼스로 진군했다. 연대기 작가 기스버러의 월터에 따르면, 로버트 1세는 기사들에게 문장 위에 흰 옷을 입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기사들의 문장과 반군의 정체성이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로버트 1세는 적진에 사절을 보내 전투를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발랑스는 전투를 벌이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다음 날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로버트 1세는 발랑스의 말을 믿고 알몬드 강 남쪽의 메스번 평원에 숙영지를 세우고 야영했다. 이때 일부 스코틀랜드인들은 식량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다른 이들은 더 나은 거주지를 찾아 흩어졌다. 발랑스는 적이 무질서해졌다는 걸 눈치채고, 6월 19일 새벽에 스코틀랜드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처음에는 격렬하게 저항헀지만, 금세 압도당해 사방으로 패주했다. 로버트 1세는 수백 명의 군인과 함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의 부하 다수는 죽거나 생포되었다.
매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뒤, 펨브로크 백작은 반란을 지지했던 램버튼 주교와 위셧 주교를 체포했다. 두 주교는 스콘의 수도원장과 함께 잉글랜드 남부로 끌려가서 지하 감옥에 갇혔다. 로버트 1세는 메스번 전투 패배 후 소수의 추종자와 함께 인치프레이의 모리스 수도원장의 도움을 받아 드럼알반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1306년 7월 또는 8월에 스트라스필란 계곡에서 아가일의 영주 존 맥두걸에게 가로막혔고, 이어진 달리그 전투에서 참패해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군대를 해산한 뒤 잉글랜드군의 추적을 피해 오래도록 도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