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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릭 공방전 영어: Siege of Berwick | ||
시기 | 1318년 4월 1일 ~ 4월 2일 | |
장소 | 베릭어폰트위드 | |
원인 |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재정복 | |
교전국 | ||
지휘관 | ||
병력 | 미상 | 미상 |
피해 | 미상 | 미상 |
결과 | 스코틀랜드 왕국의 승리. | |
영향 | 로버트 1세의 스코틀랜드 재정복 완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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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인 1318년 4월 1일 ~ 4월 2일,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군의 스코틀랜드 내 최후의 거점인 베릭을 공략한 공방전. 잉글랜드 왕국은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왕국을 침략한 이래 확보했던 영토를 완전히 상실했다.2. 상세
베릭어폰트위드는 트위드 강 남쪽 기슭에 있는 항구 도시다. 본래 노섬브리아에 속했다가 1018년 노섬브리아군이 카람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의 국왕 말 콜룸 2세에게 패배한 뒤 알바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12세기 초, 알바 국왕 다비드 1세는 베릭에 별궁을 세웠다. 그 후 베릭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로 발전했고, 13세기에는 이 나라의 모든 세관 수입의 1/4 이상이 이곳에서 창출했으며, 목재, 곡물, 연어 수출을 통해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그러던 129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이때 그는 베릭을 먼저 공략한 뒤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 후 베릭은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로 진입하는 교두보이자 물자 수송대가 통과하는 거점이 되었다. 1307년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뒤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재정복을 단행하면서 베릭의 입지가 위험해지자, 잉글랜드 당국은 베릭 요새의 방어력 강화에 힘썼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대군을 격멸한 후, 스코틀랜드군은 베릭에 점점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육지에서는 스코틀랜드군이 종종 습격해서 피해를 입혔고, 플란데런 백국 출신의 해적 존 크랩은 로버트 1세와 손잡고 베릭을 통과하는 잉글랜드 선박들을 습격했다.
1316년 1월 7일, 모리스 드 버클리가 이끄는 베릭 수비대는 로버트 1세가 급파한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간신히 물리쳤다. 1316년 2월 또는 3월, 제임스 더글러스,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헨리 발리올이 이끈 스코틀랜드군이 콜드스트림 근처의 스캐이스뮤어 전투에서 머스와 티비엇 강어귀를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려 했던 베릭의 기병 수비대 300명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피어스 개버스턴의 조카 에드몽 드 카유를 비롯한 여러 기사가 전사했고, 잉글랜드인 50명 만이 무사히 탈출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베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투에서 잉글랜드 기병대를 격파했고, 그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라비의 로버트 네빌을 사살했다.
1317년 12월, 로버트 1세는 베릭에서 20km 떨어진 올드 캠퍼스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공성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해, 장차 베릭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베릭의 시민인 스폴딩의 피터가 찾아왔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마리샬 백작 로버트 키스와 친척이었는데, 로버트 1세에게 야간에 공격한다면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버트 1세는 처음에는 이 제안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지만, 면밀한 검증 작업 끝에 그가 정말로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에 따라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월터 스튜어트에게 베릭 성을 기습하라고 지시했다.
1318년 4월 1일에서 2일 사이의 밤, 제임스 더글러스와 월터 스튜어트는 기습 공격을 이끌었다. 스폴딩의 피터는 더글러스와 그의 부하들이 자기가 지키는 성벽 구간에 로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걸 도왔다. 이후 격렬한 시가전 끝에, 스코틀랜드군은 도시를 점령했다. 베릭 수비대는 성채로 후퇴해서 농성했지만,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6월 18일에 항복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던 유일한 잉글랜드 왕국의 요충지인 베릭이 스코틀랜드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기로 마음먹고, 5월에 요크셔로 쳐들어가 하보트, 워크 및 미트포드 성을 점령한 뒤 노샐러튼, 리폰, 폰트프랙트까지 진군했다. 리폰 주민들은 대성당으로 피신한 뒤 도시가 파괴되지 않는 조건으로 1,000 마크를 지불했다. 그 후 스코틀랜드군은 나레스버러를 불태운 후 스키튼을 거쳐 철수했다.
베릭이 함락된 사건은 잉글랜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이에 에드워드 2세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화해한 뒤 1319년 늦여름에 함께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군해 9월 7일부터 베릭을 포위했다. 그러나 월터 스튜어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적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제임스 더글러스와 모레이 백작 토머스 랜돌프는 적이 포위를 저절로 풀도록 유도하고자 베릭을 우회하여 요크셔를 위협했다. 요크의 대주교 윌리엄 멜튼과 보안관 존 호담이 그를 물리치기 위해 군대를 모았지만, 9월 12일 마이톤 전투에서 임스 더글러스와 토머스 랜돌프에게 패배했다.
랭커스터 백작은 마이톤 전투 소식을 접하자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영지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2세는 9월 17일에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철수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는 요크에 병사 600명과 함께 남았지만, 제임스 더글러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잉글랜드 북부를 향한 새로운 공세를 벌여 1319년 11월 1일 길슬랜드 시를 파괴했다. 에드워드 2세는 스코틀랜드에 다시 휴전 협상을 제의했고, 1319년 12월 22일에 최소 2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 측은 이 협정에 따라 1년 이내에 성을 철거하거나 스코틀랜드에 반환한다는 조건으로 노섬벌랜드에 있던 하보틀 성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