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18:35:30

사이먼 프레이저

이름 사이먼 프레이저
Simon Fraser
출생 1270년
스코틀랜드 왕국 피블스셔 트위즈뮤어
사망 1306년 9월 7일 (향년 35~36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사이먼 프레이저
어머니 메리
자녀 마거릿, 조앤
직위 트위즈뮤어 영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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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윌리엄 월레스의 동지로서 에드워드 1세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체포된 후 처형당했다.

2. 생애

1270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피블스셔 트위즈뮤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사이먼 프레이저는 트위즈뮤어 근처에 영지를 소유한 스코틀랜드 귀족으로, 트라콰이어와 셀커크의 왕립 숲 관리인을 역임했다. 1291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네이드패스와 올리버 성, 그리고 아버지의 다른 영지들을 물려받았다. 이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다른 스코틀랜드 영주들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1292년 말 새로운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이 잉글랜드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걸 지켜봤다.

1296년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던바 전투에 참여해 스코틀랜드 편에서 잉글랜드에 대적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했고, 1296년 10월에 다시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런던으로 끌려갔다. 그는 석방에 대가로 1297년 플란데런 백국으로 진군한 에드워드 1세를 따라갔고, 기사단장 및 왕실 기사로 선임되었으며, 나중에 영지를 돌려받았다. 1298년 폴커크 전투 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셀커크 숲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그는 숲에 숨어든 스코틀랜드 반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298년 말, 스코틀랜드 반군에게 포위된 스털링 성을 구원하려는 잉글랜드군의 시도에 참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99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그에게 접근해 편을 바꾸라고 설득하자, 그는 여기에 혹해 셀커크 숲을 스코틀랜드 반군 귀족들의 은신처로 사용하게 해줬다. 잉글랜드 관리들은 낌새를 눈치채고,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인들이 로우랜드를 공격할 때 그가 비밀리에 그들을 지원한다고 고발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고발을 접하고 사이먼을 의심했지만, 1299년 8월 스코틀랜드 수호자들이 로버트 키스를 셀커크 숲의 관리자로 선임하고 사이먼을 체포해 1300년 6월 12일까지 감옥에 가두자 의심을 거뒀다. 사이먼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셀커크 숲의 관리인으로 재차 임명되었다.

1300년 여름 던바 백작 페트릭 4세 드 던바를 지원해 케를라버록 성 공방전에 참여했다. 1301년 3월 링컨에서 왕의 기사로서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급여와 망토를 바꿨다. 그러나 1301년 9월 이전에 다시 편을 바꾸어 스코틀랜드의 독립 투쟁을 지원했다. 많은 학자는 셀커크 숲 관리인이 휴 오들리로 바뀌고, 자신에게 주어진 급여가 낮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곧 로우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지배에 저항하는 스코틀랜드 반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301년 여름 휴버트 모람과 협력해 라나크셔의 스트라헤이븐 인근에서 에드워드 1세의 군대에 대항하여 유격전을 전개했다. 1302년 마지막 몇 달 동안에는 존 코민 3세, 윌리엄 월레스와 함께 셀커크 숲에서 잉글랜드 북부의 아난데일, 레데스데일, 컴벌랜드 일대를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1303년 초, 록스버러 성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후 윌리엄 월레스와 함께 셀커스 숲에서 잉글랜드군이 새로 세운 필 타워를 습격해 점령했다. 뒤이어 린리스고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고, 1303년 2월 24일 존 코민 3세와 함께 로슬린 전투에서 존 시그레이브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1303년 6월에는 에드먼드 코민과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습격해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반군을 지원하던 프랑스가 1303년 5월 20일 파리에서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은 후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끊으면서, 스코틀랜드 반군의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했다.

1304년 2월, 존 시그레이브, 윌리엄 라티머, 로버트 브루스는 피블스 인근 해프루에서 사이먼 프레이저와 윌리엄 월레스를 공격해 적군을 궤멸시켰다.(해프루 전투) 사이먼과 윌리엄 월레스는 적에게 거의 잡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벗어났다. 이후 존 코민 3세 등 스코틀랜드 귀족 대부분은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다. 사이먼도 항복하려 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그가 충성서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3년간 망명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다. 사이먼은 스코틀랜드나 영국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프랑스에 있는 영국령에도 머물 수 없었다.

사이먼은 이에 불복해 저항을 이어가기로 했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304년 3월 사이먼과 윌리엄 월레스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범죄자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그 후 사이먼은 산간지대를 떠돌아다니다가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고, 에드워드 1세는 충성심의 표시로 윌리엄 월레스를 잡으라고 요구했다. 1305년 4월, 사이먼은 추가 협상을 위해 베릭으로 가는 걸 허락받았다. 1305년 9월 윌리엄 월레스가 체포된 뒤, 에드워드 1세는 사이먼이 연간 수입의 3배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몰수된 영지를 다시 받는 걸 허락했다. 그 대신, 사이먼의 추방 기간은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렇게 해외로 추방될 준비를 하던 사이먼은 1306년 2월 로버트 1세가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자 다시 편을 바꿔서 로버트 1세에게 가담했다. 스코틀랜드 총독 에이머 드 발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트위드데일에 있는 사이먼의 영지를 불태웠다. 에드워드 1세는 당초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생포한 반군을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나중에 로버트 1세와 사이먼을 체포하면 죽이지 말고 런던으로 압송하라고 지시했다.

사이먼은 1306년 6월 메스번 전투에 참여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하고 잉글랜드군에 체포되었고, 곧바로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1306년 9월 7일 런던에서 재판을 받은 뒤 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교수형에 처해진 뒤 사지가 절단되어 잉글랜드 왕국 여러 지역에 보내졋다. 그의 잘린 머리는 1305년 9월에 처형된 윌리엄 월레스의 머리 옆 기둥에 전시되었다.

사이먼은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두 딸 마거릿과 조앤을 낳았다. 마거릿은 로코트와트의 영주 길버트 헤이와 결혼했고, 네이드배스 영지를 헤이 가문에게 물려줬다. 조앤은 비가의 영주 패트릭 플레밍과 결혼해 올리버 영지를 플레밍 가문에 물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