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존 드 스트라스보기 John de Strathbogie |
출생 | 1266년경 |
스코틀랜드 왕국 퍼스셔 | |
사망 | 1306년 11월 7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 |
아버지 | 데이비드 1세 드 스트라스보기 |
어머니 | 이사벨라 드 도버 |
부인 | 마조리(또는 마거릿) |
자녀 | 데이비드 2세, 존, 이사벨라 |
직위 | 제9대 아솔 백작 |
1. 개요
제9대 아솔 백작.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존 발리올을 위해 에드워드 1세와 맞섰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했다. 1306년 로버트 1세의 반란에 가담했지만 메스번 전투에서 생포된 뒤 런던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2. 생애
1266년경 제8대 아솔 백작 데이비드 1세 드 스트라스보기와 칠럼 남작 리처드 드 도버의 딸인 이사벨라의 외아들이다. 그는 잉글랜드 국왕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의 외증손자였다. 1270년 아버지 데이비드 1세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튀니스로 향했다가 도중에 사망한 뒤, 아솔 백작령, 에버딘셔에 있는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데이비드 1세 사후 카버스의 알렉산더 드 발리올 경과 재혼했고, 알렉산더는 미성년자인 존의 양육권을 맡았다.1284년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스콘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한 뒤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요청에 따라 알락산더르 3세의 유일한 손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마르그레트는 1290년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다가 심한 뱃멀미로 인해 오크니 제도에서 사망했고, 14명에 달하는 왕위 주장자가 나타나 분쟁을 벌였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이 사태를 좀처럼 해결하지 못하다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1292년, 존은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지명한 존 발리올이 대관식을 거행하면서 에드워드 1세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참여했다.
그 후 에드워드 1세의 지나친 간섭에 지친 존 발리올은 잉글랜드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했다. 1296년 2월, 존은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프랑스로 파견되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접견해, 양국이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왕국을 공동으로 대적하기로 합의했다. 그 해 3월 베릭을 공략한 에드워드 1세가 학살을 자행하자, 존은 이에 보복하기 위해 로스 백작 윌리엄 2세, 멘티스 백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함께 제드버러에서 출격해 헥섬을 포함하여 노섬벌랜드의 수많은 마을, 교회, 수도원을 불태웠다.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서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선봉대와 격돌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된 뒤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1년간 수감된 후, 플란데런 백국으로 출전하는 에드워드 1세를 섬긴다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존 드 스트라스보기를 비롯한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은 프랑스로 망명했고, 필리프 4세의 지원 덕분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윌리엄 월레스에게 합류했다.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했고, 1299년 여러 귀족과 함께 잉글랜드군이 점령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남동부를 상대로 습격 작전을 이끌었다. 얼마 후, 피블스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귀족 회의에 참석했고, 에버딘의 스코틀랜드 보안관으로 취임했다. 이후 루터글렌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해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과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 사이의 분쟁에서 주교를 지지했다.
1303년 에드워드 1세의 연이은 공세로 영지가 파괴된 데다, 프랑스 왕국이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더 이상 돕지 않기로 하자, 존은 더 이상 저항하는 건 의미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스코틀랜드 귀족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1304년 3월 29일, 에드워드 1세는 그를 포스 강 북쪽 스코틀랜드의 보안관이자 판사로 선임했다. 그 후 존이 포스 강 북쪽에 4개 성을 보유한 알렉산더 코민의 존재 때문에 자신이 제대로 된 통치를 못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서신을 보내자, 에드워드 1세는 알렉산더 코민으로부터 2개 성을 빼내서 그에게 하사했다. 존은 판사로서 자신의 대리인인 스트래선 백작의 재판에 참석했는데, 이 재판은 그가 이전에 지지했던 스코틀랜드 정부의 행동을 조사한 것이었다.
1305년, 에드워드 1세는 그에게 포스 강 북쪽에 새로운 성을 건설할 부지를 선택하는 역할을 위임했다. 1305년 7월, 존은 자신의 급여가 직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불만을 받아들여 급여를 높여줬지만, 그는 여전히 급여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1306년 2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즉위하자, 그는 로버트 1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고 그와 함께 잉글랜드에 대적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를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임명해 반란을 진압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발랑스는 '드래곤 깃발'을 들 수 있었는데, 이는 그가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는 걸 용인받았음을 의미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고 명령했지만, 곧 반란 주모자 로버트 브루스, 추방령을 어기고 브루스에게 가담한 사이먼 프레이저, 그리고 반란에 또다시 가담한 아솔 백작 존을 생포해 런던으로 끌고 오라고 명령했다.
1306년 6월 19일, 로버트 1세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은 메스번 전투에서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참패했다. 존은 로버트 1세와 함께 전장을 빠져나간 뒤 아가일로 피신하다가, 달리그 전투에서 존 맥두걸이 이끄는 맥두걸 가문 사병대에게 기습당해 참패했다. 그 후 로버트 1세는 병사들을 해산한 뒤, 존과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동생 닐 브루스, 알렉산더 린제이,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산을 넘어 애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고,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그 후 아솔 백작은 브루스 가문의 여성들과 함께 도주하다가 테인에서 생포되어 런던으로 압송되었다. 1306년 11월 7일 런던에서 평소보다 30피트 높은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난 230여 년간 잉글랜드에서는 백작이 처형된 적이 없었다. 그의 유해는 불에 태워졌고,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 올려졌다.
3. 가족
- 마조리(또는 마거릿): 마르 백작 돔놀 1세의 딸.
- 데이비드 2세 드 스트라스보기(? ~ 1326): 제10대 아솔 백작, 초대 스트라스보기 남작. 아버지와는 달리 에드워드 2세를 위해 스코틀랜드군과 대적했다.
- 존 드 스트라스보기: 기사.
- 이사벨라: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내 또는 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