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21:26:57

험프리 드 보훈(제3대 헤리퍼드 백작)

성명 험프리 드 보훈
Humphrey de Bohun
생몰년도 1249년 ~ 1298년 12월 3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주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플리시
아버지 험프리 드 보훈
어머니 엘리노어 드 브로스
형제 길버트, 엘리노어, 마조리
배우자 마리아 드 파인스
자녀 험프리
직위 제3대 헤리퍼드 백작, 제2대 에식스 백작, 잉글랜드 최고 순찰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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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과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브레컨 영주 험프리 드 보훈과 브레컨, 에버게이브니, 빌드의 영주 윌리엄 드 브로스와 에바 마셜[1]의 딸인 마리아 드 파인스의 장남이다. 형제로 길버트[2], 엘리노어[3], 마조리[4]가 있었다.

아버지 험프리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다가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채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생포된 뒤 체셔의 비스턴 성에 감금되었다가 부상이 악화하여 10월 27일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그는 처음엔 조부이자 제2대 헤리퍼드 백작인 험프리 드 보훈의 영지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는 나중에 반란에 가담했던 귀족들의 후손들이 영지를 물려받는 걸 허락하기로 했고, 그 덕분에 1275년 조부가 사망한 뒤 윌트셔와 에식스에 있는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또한 그는 웨일스 변경지대에 있는 어머니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지였던 브레컨과 어머니의 영지들은 단지 영주라는 직함만 얻었는데, 잉글랜드의 내전을 이용해 영토를 확장한 웨일스 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실질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험프리는 조부가 누렸던 잉글랜드 고위 순찰관의 직위를 물려받았으며, 부모의 영지를 되찾기 위해 사병을 일으켜서 허웰린 압 그루퍼드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실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가 노년기인데다 중병에 걸려서 정사를 더 이상 이끌지 않았고, 헨리 3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려야 했던 에드워드 왕자는 십자군에 나가 1274년까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1277년, 1274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통치를 시작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허웰린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웨일스 원정을 단행했다. 그는 브레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뒤, 왕의 군대에 가담했다. 에드워드 1세의 원정은 1278년 1월 2일에 끝났고, 험프리는 영지를 되찾았다. 그 후 그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순례를 떠났다.

1282년, 웨일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험프리는 이 전쟁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제7대 글로스터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지휘하에 남부 웨일스를 휩쓸었다.이 원정 결과, 허웰린 압 그루퍼드는 살해되었고,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일부 귀족들과는 달리 정복한 영토에서 별다른 영지를 받지 못했다. 1294~1295년, 험프리는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129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스코뉴 몰수를 선언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에드워드 1세는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여러 세금을 도입했다. 그리고 1297년 2월 솔즈베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귀족들에게 가스코뉴로 가서 프랑스군을 막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잉글랜드 마셜이자 제5대 노퍽 백작 로저 비고드는 왕이 플란데런 백국으로 항해하는데 그의 봉신인 귀족들이 가스코뉴로 파견되는 것은 왕 아래에서만 군 복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따는 마그나 카르타에 위배되며, 왕은 잉글랜드 대귀족을 가스코뉴에서 복무하도록 강요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제8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 그리고 험프리가 로저 비고드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반발한 것은 왕이 웨일스,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에서 전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바람에 세금이 너무 많이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런던 외곽에서 열린 회의에서, 험프리는 왕의 권력 남용에 반대하고 고대 특권의 회복을 요구하는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로저 비고드와 함께 왕에게 세금을 너무 많이 거두는 것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했다. 에드워드 1세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험프리는 로저 비고드 등과 함께 웨일스의 영지로 은퇴한 뒤 의회를 따로 열면서, 다른 여러 귀족과 동맹을 협상했다. 그들이 왕의 소집령을 무시하자, 에드워드 1세는 그들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로저와 험프리 등은 왕이 마그나 카르타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군사적 목적을 위한 특별세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의 승인 없이 군주가 세금을 인상하고, 높은 세금과 위임장을 도입하고, 연 소득이 20파운드 미만인 지주들을 군대에 징집하는 것에 항의했다. 이제 에드워드 1세와 로저를 비롯한 대귀족 간의 내전이 임박한 듯 했다.

그러던 중 윌리엄 월레스 등이 코틀랜드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이 급격하게 흔들리자, 에드워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하기로 했다. 그는 마그나 카르타와 삼림헌장[5]을 확인하는 'Confirmatio cartarum'(헌장 확인령)에 서명했고, 영주들은 에드워드 1세의 원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1298년 7월 22일, 험프리는 폴커크 전투에 참전해 윌리엄 월레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1298년 12월 31일, 험프리는 플리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에식스의 윌든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파인스 영주 앙게랑 2세 드 파인스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여 외아들 험프리를 낳았고, 그가 사망한 뒤 아들 험프리가 아버지의 모든 영지와 작위를 계승했다.


[1]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마셜의 딸[2] 유년기에 사망[3] ? ~ 1314, 제6대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의 부인[4] 베르됭 남작 티보 드 베르됭의 부인[5] 1225년 헨리 3세가 반포한 헌장. 마그나 카르타를 개정한 것으로, 왕실 산림에 ㄷ관한 법률 조항을 개정하고, 자유민의 권리를 확대하며, 왕실 산림 특권 위반에 대한 처벌 시스템을 완화했다. 1225년 이래 대헌장의 일부로 간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