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18:56:34

헨리 드 라시

파일:헨리 드 라시.jpg
성명 헨리 드 라시
Henry de Lacy
생몰년도 1249년 또는 1251년 ~ 1311년 2월 5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링컨 백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런던
아버지 에드먼드 드 라시
어머니 살루초의 아델리자
누이 마거릿
배우자 마거릿 롱게스피, 조안 마틴
자녀 에드먼드, 존, 앨리스
직위 제3대 링컨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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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1249년 또는 1251년경에 제2대 링컨 백작 에드먼드 드 라시와 살루초 후작 토마스 1세의 딸이자 헨리 3세의 왕비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친척인 살루초의 아델리자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에버게이브니 남작 조지 드 콘텔로의 아내가 된 마거릿이 있었다. 아직 어렸을 때인 1257년 솔즈베리 여백작 마거릿 롱게스피와 결혼하면서 법적으로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1258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잉글랜드의 중부, 북부, 남서부에 있는 광대한 영지는 어머니가 관리했다. 1272년 10월 13일, 콘월의 리처드의 둘째 아들인 콘월의 에드먼드의 결혼식에서 총각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성인으로 인정되었고, 링컨 백작 작위를 확인했다.

그 후 헨리는 에드워드 1세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 되었고, 1276~1277년에 기사 100명을 이끌고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다. 1278년 브라반트에 사절로 파견되어 에드워드 1세의 딸 마거릿과 브라반트 공작 장 1세의 아들 장 2세의 결혼을 협상했으며, 같은 해 에드워드 1세와 봉신 서약하려고 찾아온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를 영접했다. 에드워드 1세가 1279년 4월에서 6월까지 프랑스로 떠났을 때, 헨리는 주교 2명과 왕의 사촌과 함께 에드워드 1세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했다.

1282~83년 에드워드 1세의 두 번째 웨일스 원정에 참여한 뒤 노스웨일스의 덴비셔를 보상으로 받았고, 즉시 덴비 성을 건설했다. 1286년부터 1289년까지 왕과 함께 가스코뉴로 갔고, 귀국 후 공무원들의 권력 남용을 조사하는 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290년 스코틀래드 섭정 의회와 협상하여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의 차기 국왕을 선임하는 걸 주관한다는 협약을 맺었으며, 1291년 스코틀랜드 왕위 경쟁자들을 평가하는 위원회에 참여했다. 1294년, 에드워드 1세의 동생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와 함께 휴전 협상하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이 임무가 실패하자, 그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유럽 대륙에 상륙하려 했다. 그런데 포츠머스에서 출항하기 전날 밤에 노스 웨일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그곳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이내 강력한 전력으로 밀어붙여 1295년 봄까지 노스 웨일스 반란을 진압했다.

1295년 12월 3일, 에드워드 1세는 헨리를 아키텐의 왕실 부관으로 선임했다. 그 후 헨리는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와 함께 가스코뉴로 가서 약 2년간 활동했지만, 별달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르도를 탈환하지 못했고, 7주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닥스를 함락하지 못했으며,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와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그 후 툴루즈로 약탈 원정을 떠났다가 1298년 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곧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 격파에 일조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험프리에게 윌리엄 월레스의 주요 추종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스튜어트의 렌프루 및 여러 영지를 수여했다. 1299년 요크에서 열린 귀족 회의와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의 마르그리트의 결혼식에 참여했고, 1300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케어라버록 성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말에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와 함께 로마로 가서 스코틀랜드 전쟁에서 교황청의 지원을 얻고자 노력했다.

1301년과 1306년에 에드워드 1세의 장남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 왕자의 가정교사 자격으로 새로운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으며, 1303년 프랑스와의 협상을 이끈 결과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전쟁을 종식했다. 그 후 헨리는 그랑송 남작 오토 드 그랑송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5세와 협력해, 프랑스가 잉글랜드 왕국에 반환한 아키텐 공국의 행정권을 확립했다. 1307년 에드웓 ㅡ1세의 마지막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그 해 7월 에드워드 1세의 임종을 지켜봤다.

새 국왕인 에드워드 2세의 치세에서, 헨리는 잉들랜드의 대귀족들 중 가장 나이 많고 경륜을 많이 쌓은 인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그가 에드워드 2세의 대관식에서 칼을 휴대하는 걸 허락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헨리는 다른 영주들과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의 급격한 출세에 불만을 품었고, 1308년에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는 귀족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헨리 2세는 이들의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개버스턴을 유럽 대륙으로 보내야 했다. 헨리는 이후에도 왕의 가장 가까운 고문으로 남았지만, 개버스턴은 얼마 후 궁정으로 돌아갔다. 1311년 2월 5일, 헨리는 런던에서 병사했다. 사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인 앨리스가 영지를 물려받았고, 그녀의 남편인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장인의 영지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반 개버스턴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3. 가족

  • 마거릿 롱게스피(? ~ 1309):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3세 롱게스피의 딸이자 솔즈베리 여백작.
    • 에드먼드: 우물에 빠져 사망.
    • 존: 폰트프랙트 성 난간에서 떨어져 사망.
    • 앨리스(1281 ~ 1348): 제4대 링컨 여백작.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부인.
  • 조안 마틴(? ~ 1322): 초대 마틴 남작 윌리엄 마틴의 딸. 헨리 드 라시가 사망한 뒤 초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오들리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