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08 22:07:41

브루난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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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난버 전투
영어: Battle of Brunanburh
기간
937년
장소
잉글랜드 북부
원인
잉글랜드 왕국의 팽창 정책에 대한 알바 왕국, 더블린 왕국,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반격.
교전국 및 교전세력
잉글랜드 왕국더블린 왕국
알바 왕국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지휘관
애설스탠
에드먼드 1세
올라프 고트프리슨
카우산틴 2세
오웨인 압 둘라흐
결과
잉글랜드 왕국의 승리.
1. 개요2. 전투 장소3. 배경4. 전투 경과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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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37년, 애설스탠이 이끄는 잉글랜드 왕국군과 더블린 왕국의 올라프 고트프리슨, 알바 왕국카우산틴 2세,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오웨인 압 둘라흐가 이끄는 연합군이 브루난버에서 맞붙은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 영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투이다.

2. 전투 장소

전투가 벌어진 브루난버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며, 17세기 이래 여러 학자들이 영국 남서부에서 스코틀랜드까지 40개 이상의 다양한 장소를 지목했다. 그렇지만 대다수 역사가들은 잉글랜드 북부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가장 유력한 장소는 잉글랜드 북서부 위럴 반도(Wirral Peninsula)의 브롬버러(Bromborough) 인근 평원으로,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유물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3. 배경

871년 즉위한 이래 20여 년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앨프레드 대왕의 활약으로 바이킹의 침략을 극복한 웨식스는 899년 아버지 앨프레드의 뒤를 이은 대 에드워드의 지도하에 머시아, 동앵글리아, 에식스를 공략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920년 대 에드워드는 요크를 지배하던 라그날드 1세, 버니시아의 엘드레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 압 둘라흐, 그리고 "스코트인(scottas)의 왕"의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는 평을 받지만, 당시 웨식스의 위상이 브리튼섬에서 가장 강력했다는 건 분명하다.

927년 대 에드워드가 사망하고 장남 애설스탠이 왕위에 올랐을 때, 남부 노섬브리아의 요크 왕국 만이 바이킹의 영역으로 남았다. 921년 라그날드 1세가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 시그트리그르 카흐가 927년에 잇달아 사망하면서 요크 왕국이 어수선해지자, 애설스탠은 이 기회를 틈타 요크로 진군하여 요크를 물려받으려고 진군하던 더블린 왕 고트프리트 우아 이마이르를 몰아냈다.

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브리튼 북부 왕들과 이몬트 다리에서 만나 "우상 숭배를 포기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이는 바이킹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후 7년간 브리튼 북부는 평온했고, 애설스탠은 웨일스를 제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934년 알바 왕국을 향한 원정을 단행했는데, 현존하는 사료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애설스탠은 934년 5월 28일 윈체스터에서 군대를 집결했고, 6월 7일 노팅엄으로 진군했다. 그 후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는 함대와 함께 북상했다. 스트래스클라이드 국왕 오웨인 압 둘라흐는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항복했고, 애설스탠은 여세를 이어가 하이랜드의 던노타와 마운트를 접수했으며, 그의 함대는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스네스까지 이르렀다.

'클론맥노이즈 연대기'는 알바인들이 애설스탠이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게 했다고 기록했다. 반면에, 헌팅던의 헨리는 잉글랜드군이 별다른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고 진격했다고 설명했다. 현대 학자들은 두 기록을 취합해서 카우산틴 2세가 군사적 저항을 관두고 애설스탠과 외교로 이 전쟁을 해결한 것으로 본다. 우스터의 존은 카우산틴 2세의 아들 한 명이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졌고, 카우산틴 2세 본인은 애설스탠과 함께 버킹엄으로 가서 '알바의 소왕'으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밝혔다. 카우산틴 2세는 935년에도 시렌세스터에 있는 애설스탠의 궁정에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발행된 헌장에서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과 웨일스의 하이웰 압 카델보다 중요한 애설스탠의 봉신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애설스탠의 팽창 정책에 위협을 느낀 군주들은 이대로 가다간 잉글랜드 왕국이 브리튼 제도를 완전히 석권하고 자신들은 더이상 통치를 행사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우려했다. 이에 더블린의 바이킹 왕 올라프 고트프리슨, 알바 왕국의 카우산틴 2세,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오웨인 압 둘라흐는 서로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 시기에 카우산틴 2세의 성명 미상의 딸이 올라프 고트프리슨과 결혼하기도 했다. 올라프는 937년 8월 아일랜드 해를 건너 카우산틴 2세와 오와인 압 둘라흐의 군대에 합세했다. 12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 더럼의 시므온은 올라프가 615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거느렸다고 기술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과장된 수치라고 간주한다. 워체스터의 존은 올라프가 험버 강을 따라 항해해 잉글랜드의 동쪽 해안에 상륙했다고 기술했지만, 다른 출처는 이 기록에 동의하지 않기에 현대 학자들은 오류로 간주한다.

연합군의 진군은 기록되지 않았다. 폴 카빌은 그들이 머시아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이클 우드는 어떤 출처도 머시아가 침략당했다는 걸 언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마이클 리빙스턴은 카우산틴 2세와 오웨인의 군대가 랭커셔를 거쳐 칼라일과 멘체스터 사이 어딘가에서 올라프의 군대와 합류하기 전에 잉글랜드 북부를 초토화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이클 디킨은 스코틀랜드군은 스테인모어 고개나 데어 길을 통해 잉글랜드로 쳐들어갔으며, 페나인 산맥 동쪽에서 전투를 치렀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리빙스턴이 제시한 경로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게 되는데, 그곳 지형은 대군이 이동하기에는 매우 불편해서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4. 전투 경과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애설스탠은 동생 에드먼드 1세와 함께 머시아와 웨식스에서 한 달간 군대를 소집한 뒤 적군과 교전하기 위해 머시아로 진군했다. 937년 10월 초에 브루난버에서 만난 양군은 한동안 대치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군이 먼저 공격했다. 하루 종일 격전이 이어진 끝에, 잉글랜드군이 승기를 잡았다. 그들은 밤이 될 때까지 적군을 추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올라프는 이 전투에서 아일랜드 소왕 5명, 대귀족 7명을 상실하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더블린으로 패주했고, 카우산틴 2세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셀라흐를 포함한 가까운 동료와 가족을 잃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스트래스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둘라흐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장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국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다. <클론맥노이즈 연대기>에 따르면, 애설스탠 왕의 조카인 애프와인과 애설와인이 전사했으며, 데 에드워드의 동생인 애설워드의 아들들도 전사했다고 한다.

5. 결과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브루난버 전투를 잉글랜드 왕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중세 초기 역사가이며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사라 로자먼드 어바인 풋(Sarah Rosamund Irvine Foot, 1961 ~)은 "이 전투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라고 밝혔고, 마이클 리빙스턴은 "브리튼 제도 전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다만 알렉스 울프는 피로스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브루난버 전투는 연합군에게 큰 타격이었지만 잉글랜드 왕국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애설스탠이 939년 사망하자마자 요크 주민들이 더블린의 왕 올라프 구트프리손을 새 왕으로 추대하면서 잉글랜드 북부에 대한 지배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에 애설스탠의 후계자인 에드먼드 1세가 재차 잉글랜드 북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올라프 구트피르손이 사망한 뒤 에드먼드 1세가 요크를 다시 지배하는 데 성공하면서 노섬브리아는 잉글랜드 수중에 들어갔다. 946년 에드먼드 1세가 죽자 요크 주민들은 재차 바이킹 왕을 추대했지만, 에드먼드 1세의 뒤를 이은 이드리드의 지속적인 공세 끝에 954년 노섬브리아 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가 전사하자 이드리드를 비로소 그들의 왕으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