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로버트 보이드 Robert Boyd |
출생 |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에어셔 킬마녹 | |
사망 | 1333년 7월 19일 (향년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할리돈 힐 | |
아버지 | 로버트 보이드 |
자녀 | 토머스, 앨런, 제임스 |
직위 | 킬마녹 영주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로버트 1세를 추종했으며,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에 할리돈 힐 전투에 참여해 에드워드 3세에 대적했다가 전사했다.2. 생애
로버트가 속한 가문 이름인 보이드(Boyd)의 유래는 노란색을 의미하는 게일어 'buidh'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게일어로 'Bhoid'인 뷰트 섬 출신임을 의미한다는 설로 나뉜다. 조부 로버트 보이드는 1263년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지휘하에 라그스 전투에 참여해 노르웨이군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때 그가 해변을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서 노르웨이군을 향해 출진하는 걸 지켜보던 알락산더르 3세가 "Confido!"(이길 거라고 믿는다!)라고 외치며 오른손의 첫 두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교차시켜 같은 뜻을 표시했다. 이후 보이드 가문은 오른 손의 첫 두 손간가락을 들어올리고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교차시킨 모양을 가문의 문장으로 삼았다. 아버지 로버트 보이드는 킬마녹 영주를 역임했다고만 전해질 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그스 전투에서 활약한 로버트 보이드의 손자 로버트는 1290년대에 에어셔 지역에서 반포된 여러 헌장의 증인으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가문 인사들과 함께 윌리엄 월레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반군에 가담해 에드워드 1세에 맞섰다. 1304년 2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지만, 1306년 3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즉위하자 즉시 가담했다. 이후 로버트 1세와 추종자들이 덤프리스, 달스윈튼, 티버스, 에어 성을 공략하는 동안, 그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데세이 성을 점령하고 인버컴을 포위 공격했으며, 두나버티 성을 뒤이어 접수함으로써 클라이드만에 있는 스코틀랜드 서부 성 5개를 소유했다.
그러나 1306년 6월 19일 로버트 1세와 함께 메스번 전투에 참여했다가 에이머 드 발랑스의 잉글랜드군에게 참패한 뒤, 로버트 1세가 서쪽으로 퇴각하여 아가일 산맥을 통과하는 걸 동행했다가 아가일의 영주 존 맥두걸의 기습으로 달리그 전투에서 또다시 참패했다. 로버트 1세는 달리그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뒤, 더 이상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병사들을 해산한 뒤, 아내 엘리자베스 드 버러, 동생 닐 브루스,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 알렉산더 린제이, 그리고 로버트 보이드를 데리고 에버딘 북서쪽의 킬드럼미 성으로 향했다. 나중엔 아솔 백작과 함께 브레달베네 산으로 도피했다.
그 후 로버트 보이드는 로번트 1세와 함께 레녹스를 거쳐 스코틀랜드 남서쪽의 킨타이어 반도로 피신한 뒤, 두나버티 성에 잠시머물렀다가 잉글랜드군이 거기까지 쳐들어오자 배를 타고 탈출해 헤브리디스 제도 또는 아일랜드에 은거했다. 한편, 그의 친척인 던컨 보이드는 1306년 8월 4일 킬드럼미 성에서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1307년 봄, 로버트 1세는 헤브리디스 제도와 아일랜드에서 모집한 병사 300명을 이끌고 스코틀랜드 남서쪽으로 항해했다. 로버트 1세의 심복인 제임스 더글러스와 로버트 보이드가 먼저 아란에 상륙한 뒤, 적장 존 헤이스팅스가 브로딕 성으로 보낸 장비와 물자를 노획했다. 로버트 1세는 아란에서 이들과 합류했고, 자신의 영지였던 캐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퍼시 남작 헨리 퍼시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텐버리 성을 접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텐버리 마을을 야간을 틈타 약탈한 뒤 아란으로 후퇴했다.
그 후 로버트 보이드는 글렌 트룰 전투, 라우던 힐 전투, 인버루리 전투, 브랜더 고개 전투 등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를 재정복하기 위해 단행한 일련의 전투에 모두 종군해 승리에 기여했으며, 1314년 6월 24일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사령관 중 한 사람으로서 에드워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로버트 1세의 고문을 맡아 잉글랜드와의 전쟁 수행과 내치에 관한 중요한 조언을 제공했으며, 1320년 4월 6일 아브로스 수도원에서 교황 요한 22세에게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청원한 아브로스 선언이 발표될 때 서명했다. 또한 잉글랜드 사절단과의 평화 협상에 항상 참여해 1323년 5월 말 13년간의 평화 협약을 맺는 데 기여했다.
로버트 1세는 이렇듯 자신에게 많은 기여를 한 로버트 보이드에게 보답하기 위해 존 발리올의 영지였던 킬마녹, 본딩턴, 허츠코와 고드프리트 드 로스의 영지였던 킬브리드와 아드넬 영지를 부여했고, 노델스데일의 영지에 대한 관리권과 헤르츠샤우의 숲 관리권도 받았다. 한편, 그는 몽고메리와 해밀턴 같은 라이벌 클랜과의 여러 불화와 갈등에 연루되기도 했다.
1333년 7월 19일 스코틀랜드의 수호자 아치볼드 더글러스의 지휘하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 맞서 할리돈 힐 전투를 치렀으나, 참패를 막지 못하고 전사했다. 사후 그의 장남 토머스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그 역시 1346년 10월 17일 데이비드 2세 지휘하에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되어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차남 앨런은 1339년 퍼스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전사했고, 삼남 제임스는 일찍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