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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
Henry, 3nd Earl of Lancaster
파일:제3대 랭커스터 백작 헨리.jpg
이름 랭커스터의 헨리
(Henry of Lancaster)
출생 1281년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백작령
사망 1345년 9월 22일 (향년 63~64세)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 성
배우자 모드 드 차워스 (1297년 결혼/1322년 사망)
자녀 블랜치, 헨리, 모드, 조앤, 엘리노어, 메리
아버지 랭커스터의 에드먼드
어머니 블랑슈 다르투아
형제 토머스, 존, 메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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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에드워드 2세의 폐위와 에드워드 3세의 등극에 일조했지만, 로저 모티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면서 실각했다.

2. 생애

1281년생으로, 아버지는 초대 랭커스터 백작이자 더비, 레스터, 샹파뉴 백작이며,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차남인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이고, 어머니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 다르투아의 딸 블랑슈 다르투아다. 형제로 토머스, 존[1], 메리[2]가 있었다. 1296년 6월 5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큰형 토머스가 아버지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고, 헨리는 1298년 또는 1299년 2월 6일 의회에 소환되어 '랭커스터 경'으로 불렸다. 1300년, 헨리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케어라버록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1322년, 형 토머스가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부자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패배하고 생포된 후 약식 재판에 회부된 뒤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후 랭커스터 영지는 왕실에 의해 몰수되었다. 당시 토머스의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던 헨리는 형의 땅과 작위를 돌려달라고 청원했다. 에드워드 2세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1324년 3월 29일에 헨리가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걸 확인하고 레스터 백작령을 넘겼다. 그 후 헨리는 형의 문장을 꿋꿋이 사용했고, 토머스를 기리기 위해 레스터 시 인근에 십자가를 세웠다.

1324년, 헨리는 토머스의 반란에 가담했던 헤리퍼드 주교 아담 올레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에드워드 2세에게 반역죄로 고발당했지만, 뛰어난 변호 실력과 가문의 높은 명성 덕분에 처벌을 면했다. 1326년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가 잉글랜드에 상륙해서 에드워드 2세를 상대로 쿠데타를 단행하자, 헨리는 즉시 반군에 가담했다. 그 해 10월 16일, 그는 사우스 웨일스의 란트리산트 인근에 숨어 있던 에드워드 2세를 체포한 뒤 런던으로 압송했다. 그렇게 에드워드 2세가 몰락하고 에드워드 3세가 왕위에 오른 뒤, 헨리는 가문의 영지를 모두 돌려받고 랭커스터 백작을 칭했다.

그 후 헨리는 랭커스터의 케닐워스 성에 한동안 갇혀 있던 에드워드 2세의 감시인으며, 에드워드 3세의 미성년 통치 기간에 수립된 영주와 주교 12명으로 구성된 섭정 의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1238년 초, 헨리는 로저 모티머가 이자벨 왕비의 애인으로서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가문의 영지 중 하나였던 링컨 백작령이 모티머와 그의 자식들 사이에 분할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로저 모티머가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와 노샘프턴 조약을 체결해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을 종결하면서 스코틀랜드에 영지를 두고 있던 잉글랜드 영주들이 영지를 잃게 되자, 그는 조약이 국왕과 국민의 동의 없이 이뤄졌다며 비판을 가했다.

1328년 여름, 헨리는 제2대 웨이크 남작이자 사위인 토머스 웨이크, 초대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과 함께 가스코뉴에 군대를 파견해 프랑스군과 대적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요크 의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해 9월 7일, 핸라는 무장 분견대를 이끌고 링컨 바를링스 수도원에 위치한 궁정에 도착했다.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가 헨리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자, 헨리는 그들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9월 16일, 이자벨 왕비와 로저 모티머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모든 집회를 금지했고,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보안관들을 해임했다. 모티머는 새로운 내전을 예견하고, 마치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한편, 헨리는 추종자인 하모 치그웰이 1327년 10월 런던 시장이 될 정도로 왕국으의 수도 런던에서 강력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런던의 길드홀에서 열린 회의에서, 헨리의 동맹자인 토머스 웨이크,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는 왕국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 충분한 자금을 할당하고, 이자벨 왕비의 영지를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고, 국왕과 그의 어머니를 부양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고, 모티머를 궁정에서 파문하고, 웨어데일 전역이 실패로 끝난 이유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런던 시민들은 의회가 솔즈베리가 아닌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열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1328년 9월 말, 헨리는 노샘프턴셔를 지나던 에드워드 3세를 잡으려 했지만, 왕은 경고를 받고 경로를 변경했다. 그 후 이자벨 왕비는 헨리를 왕의 적이며 거짓을 호도하는 자라고 공개적으로 규탄했다. 에드워드 3세는 올리버 잉햄과 바스톨로뮤 버거시를 런던으로 보내 하모 치그웰에게 자기 허락 없이 회의를 연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그 후 왕실 궁정이 의회에 출석하기 위해 솔즈베리에 이르렀을 때, 헨리의 부하들이 초대 홀랜드 남작 로버트 홀랜드를 살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버트 홀랜드는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기사로, 토머스가 휴 르 디스펜서 부자와 전쟁을 벌였을 때 이를 지지했지만, 1322년 3월 버러브리지 전투 직전에 500명 가량의 강력한 분견대를 이끌고 에드워드 2세에게 투항해 토머스가 패사하게 만들었기에, 랭커스터 가문의 증오를 받았고, 헨리의 가신 중 한 명인 윌리엄 위더가 하트퍼드셔의 숲에서 로버트 홀랜드를 습격해 살해한 뒤 그의 머리를 헨리에게 보냈다. 헨리는 윌리엄 위더를 즉시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보안상의 이유로 10월 16일에 개최된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헨리도 의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존 드 스트랫퍼드 주교는 헨리가 참석하지 않은 건 모티머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모티머는 십자가 앞에서 랭커스터 가문을 파괴할 의도가 없다고 맹세했고, 의회는 헨리에게 초대장을 보내기로 했고, 에드워드 3세도 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헨리는 솔즈베리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사절이 찾아와서 런던 회의에서 왕에게 전달된 요구 사항을 수락하고, 왕이 헨리가 무장한 기사를 대동하는 걸 허락할 경우에만 의회에 출두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헨리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헨리가 의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무거운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으며, 헨리가 자신의 요구 사항이 마그나 카르타에 근거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의회에 참석할 때 안전한 통행을 허용할 거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헨리는 끝내 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후 헨리는 무장 분견대를 이끌고 윈체스터로 이동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뒤, 솔즈베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그러나 의회가 그를 반역자로 선포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11월 3일에 윈체스터에서 철수했다. 그 후 런던 시장이 존 그랜섬으로 교체되자, 헨리는 그에게 서신을 보내 의회가 자신이 솔즈베리에 도착하기 전에 중단되었으며, 국왕의 수호자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왕실이 런던에 11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머무는 동안, 헨리는 2차례나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자벨 왕비로부터 왕을 모욕한 것에 책임을 지고 항복하라는 요구를 받자 그만뒀다.

1328년 12월, 헨리의 동맹자인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와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튼은 영주와 주교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들은 왕이 마그나 카르타와 대관식 선서를 위반했다는 구실을 들며, 최고 귀족들이 세인트 폴 대성당에 모여서 상황을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귀족이 이에 응했고, 12월 19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 모인 영주들은 추가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글로스터에 있던 왕은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런던 당국에 편지를 보내 왕관의 적들과의 싸움이 벌어졌을 때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와 동싱에, 글로스터에서 군인 소집령이 반포되었다. 국왕의 편지는 1328년 12월 21일 런던 길드홀에서 낭독되었고, 왕과 헨리를 모두 지지하는 시민들은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1328년 12월 말, 로저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를 대동한 채 랭커스터 백작령에 속한 워릭으로 진군했다. 이와 동시에, 에드워드 3세는 자기가 레스터에 도착하기 전에 귀순한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약속했다. 1329년 1월 1일, 국왕은 헨리의 주요 거점인 케닐워스 성에 도착했다. 케닐워스 수비대가 왕의 군대가 입성하는 걸 거부하자,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는 코벤트리에 남겨둔 뒤 랭커스터 백작령을 약탈하고 레스터 시를 점거했다. 1월 12일,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베드퍼드에 입성헀다. 한편, 헨리는 런던에서 약 600명의 지지자들을 모은 뒤 북쪽으로 진군해 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레스터가 모티머의 군대에게 접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초 헨리를 돕기로 했던 토머스 브라더튼,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등은 전부 왕의 편으로 돌아섰다.

헨리는 이제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베드퍼드로 가서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고, 자신은 "우리 국왕과 왕비, 그리고 의원들"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로저 모티머는 미오팜 주교의 중재를 받아들여 헨리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헨리가 소유한 영지의 절반 가치에 해당하는 11,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으며, 토머스 브라더튼, 우드스톡의 에드먼드 등 다른 주요 추종자들도 반란에 참가한 것에 대해 벌금을 부과받았다. 지난날 휴 르 디스펜서 부자가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조치였다.

그 후 헨리는 모든 권력을 잃고 영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1330년 10월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로저 모티머를 처단한 에드워드 3세는 헨리를 복권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에 실명한 상태라서 레스터 성에서 15년간 조용히 지냈고, 장남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그를 대신해 활약했다. 그는 레스터 성에서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다. 1345년 9월 22일 레스터 성에서 사망했고, 며칠 뒤에 열린 장례식에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 왕비가 참석했다. 사후 뉴어크의 성모 영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모드 차워스(1282 ~ 1322): 사우스 웨일스 카마던셔의 케드웰리 남작 패트릭 드 샤워스와 제9대 워릭 백작 윌리엄 드 뷰챔프의 딸 이사벨라 드 뷰챔프의 딸.
    • 블랜치(1302/1305 ~ 1380): 리델의 제2대 웨이크 남작 토머스 웨이크의 부인.
    • 그로스몬트의 헨리(1310 ~ 1361): 랭커스터 공작. 백년전쟁에서 맹활약한 잉글랜드의 명장.
    • 모드(1310 ~ 1377): 제3대 얼스터 백작 윌리엄 드 버그의 부인.
    • 조앤(1312 ~ 1345): 제3대 모브레이 백작 존 드 모브레이의 부인.
    • 이사벨라(1317 ~ 1347년 이후): 에임즈베리 수녀원장.
    • 엘리노어(1318 ~ 1372): 제2대 보몬트 남작 존 드 보몬트와 초혼,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재혼.
    • 메리(1320 ~ 1362): 제3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의 부인.


[1] 1286 ~ 1317, 보퍼트 영주[2] 1284 ~ 1289,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