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20:31:53

윌리엄 라티머(제2대 라티머 남작)

성명 윌리엄 라티머
William Latimer
생몰년도 1276년 ~ 1327년 2월 27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라티머 남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기스버러
아버지 윌리엄 라티머
어머니 앨리스 레데트
배우자 루시 트윙, 시빌 드 푸르노
자녀 윌리엄, 토머스, 크리스티나
직위 제2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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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으며, 디스펜서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 편에 섰다.

2. 생애

1276년생으로, 초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 윌리엄 라티머기사 월터 레데트의 딸 앨리스의 외아들이다. 1294년 웨일스 반란을 진압하는 군대에 복무한 뒤 기사 작위를 받았다. 1296년 가스코뉴에서 아버지와 함께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고, 1297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스코틀랜드 반군과 대적했다. 1299년 2월 6일 영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0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2대 코르비의 라티머 남작이 되었으며, 요크셔, 켄트, 베드퍼드셔, 서리에 위치한 모든 가족 영지를 물려받았다.

1307년 제2대 펨브로크 백작 에이머 드 발랑스의 지휘하에 로버트 1세를 상대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310년에는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도 참전했지만, 스코틀랜드군에게 생포된 뒤 8개월간 억류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한편, 그는 대귀족들과 피어스 개버스턴 간의 대립이 벌어졌을 때 피어스를 옹호한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고, 그 보상으로 노샘프턴셔의 로킹엄 성 보안관과 왕립 삼림 관리인의 직위를 받았다. 1312년 피어스가 대귀족들에게 살해되었을 때도 에드워드 2세를 지지했다.

1319년, 에드워드 2세에게 사사건건 맞서던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거래했다. 이 거래에 따르면, 그는 토머스로부터 링컨셔에 있는 영지를 받았고, 헌팅던셔와 노샘프턴셔에 있는 3개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도 받았다. 그 대가로, 그는 왕실과 토머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토머스에게 기사 단원 한 명과 일반 기사 10명, 그리고 기병 40명을 포함한 분견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 계약에 따라 토머스가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상실한 베릭 요새를 탈환하기 위한 에드워드 2세의 원정에 동행했을 때 분견대를 이끌고 가담했고, 그 보상으로 250파운드를 받아냈다.

그러나 1321년 토머스가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을 때 토머스를 지원하길 거부했고, 1322년 초 에드워드 2세가 반기를 일으킨 랭커스터 백작을 무찌르러 출진할 때 즉시 왕에게 가담했다. 1322년 3월 16일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반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왕실군 사령관 중 한 명이었다. 랭커스터 백작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는 요크의 수호자라는 직위를 얻었다. 1324년 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국왕의 수행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고, 1325년 4월 11일 뷰리외에서 발행된 왕실 헌장의 증인으로 언급되었다. 1327년 2월 27일에 요크셔의 기스버러에서 사망했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루시 트윙(1278 ~ 1346): 요크셔의 댄비 기사 로버트 트윙의 외동딸. 로버트 트윙은 요크셔, 링컨셔, 노섬벌랜드 일대에서 상당한 토지를 경영하던 대지주 마마듀크 트윙의 장남이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그 후 루시는 상당한 재산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영지와 작위는 그녀의 숙부인 마마듀크 트윙에게 넘어갔다. 1295년 에드워드 1세의 중재로 윌리엄 라티머와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윌리엄 라티머가 스코틀랜드 반군을 상대로 벌어진 전쟁에 참전했던 1304년 말, 로버트 콘스터블, 스티븐 호벨, 그리고 커크번의 여러 기사들이 루시를 납치했는데,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루시가 자발적으로 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납치 사건은 잉글랜드 전역에 상당한 주목을 끌었고, 에드워드 1세는 수석 판사들에게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1305년 4월, 법원은 윌리엄 라티머가 아내를 다시 데려오는 걸 허용했고, 마마듀크 트윙을 납치 사건 주도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루시는 요크의 코브리지 대주교 토머스를 찾아가 결혼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자신이 윌리엄 라티머와 근친 관계일 뿐더러, 윌리엄이 자신에게 잔혹하게 대우했기에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응해, 윌리엄 라티머는 1307년 4월 루시가 월를튼의 기사 니콜라스 마이넬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고 고발했다. 조사 결과 실제로 루시가 니콜라스 마이넬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니콜라스를 낳았다는 게 밝혀졌고, 1309년 법원은 루시에게 속죄를 위해 왓튼 수도원으로 물러나라는 처분을 내렸다. 루시는 이에 응하지 않았지만, 1310년 1월에 마이넬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었다.
    1312년 7월 22일, 루시와 윌리엄 라티머는 이혼하기로 합의했고, 라티머는 루시로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챙겼다. 루시는 이혼 후 왕실 기사인 아담 드 에버링엄의 남동생인 로버트 드 에버링엄과 결혼했다. 니콜라스 마이넬은 이에 불만을 품고 1312년 말에 루시를 에버링엄에서 납치해 자기 영지로 끌고 갔다. 이후 루시와 마이넬은 그들의 아들이 야름을 상속받고, 다른 재산은 에버링엄이나 그의 상속인에게 돌아가기로 합의했고, 루시는 에버링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316년 로버트 드 에버링엄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도중에 전사한 뒤, 루시는 바스톨로뮤 드 파나쿠르와 세 번째로 결혼했고, 1346년 1월 8일에 사망한 뒤 두 번째 남편인 로버트 드 에버링엄이 묻힌 기스버러에 안장되었다.
    • 윌리엄 라티머(1301 ~ 1335): 제3대 라티머 남작.
  • 시빌 드 푸르노(? ~ 1317년 이전): 기사 리처드 드 푸르노의 딸, 헌팅필드의 윌리엄의 미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