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말리스 3세 Malise III |
출생 | 1261년 |
스코틀랜드 왕국 스트래선 백작령 | |
사망 | 1313년에서 1317년 사이 (향년 미상) |
스코틀랜드 왕국 스트래선 백작령 | |
아버지 | 말리스 2세 |
어머니 | 마틸다 |
배우자 | 아그네스 코민 |
자녀 | 말리스 4세, 길버트, 로버트, 마틸다 |
직위 | 제6대 스트래선 백작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윌리엄 월레스 편에 서서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다가 1303년 귀순했다. 1306년 3월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을 때는 처음에 인정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로버트 1세의 침략을 두려워해 경의를 표했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 왕실의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2. 생애
12세기 초부터 스트래선 백작 작위를 유지한 오래된 게일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5대 스트래선 백작 말리스 2세다. 어머니 마틸다는 케이스네스와 오크니 백작 길버트의 딸로, 제5대 스트래선 백작 말리스 2세의 2번째 아내다. 1271년경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아직 미성년자였는데, 아마도 그의 재산을 관리하는 후견인이 있었을 테지만, 그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1281년 이후 아버지의 영지를 정식으로 계승했고, 제6대 스트래선 백작이 되었다.1284년 알락산더르 3세에 의해 소집된 스콘 의회에 참석한 뒤, 국왕의 외손녀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스코틀랜드 차기 여왕으로 받들겠다고 서약한 귀족 39명 중 한 명이 되었다. 1290년 버검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왕자와 마르그레트의 결혼을 승인했고, 몇 달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결혼 동맹을 확정한 솔즈베리 조약의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그레트가 1290년 10월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다가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은 불확실해졌다. 그는 존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라아 햔다고 주장하는 세력의 일원이 되었고, 1291년 7월 스코틀랜드 국왕을 정할 권한을 스코틀랜드 의회로부터 받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의 영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1292년 10월 또는 11월에 베릭에서 존 발리올이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출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의 과도한 간섭에 시달린 존 발리올은 1295년 에드워드 1세에게 했던 충성 서약을 취소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말리스 3세는 이에 지지를 표명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르던 에드워드 1세의 소환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존 발리올이 점점 더 커지는 잉글랜드 왕국의 압력에 굴복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그는 1297년 7월 스털링에서 열린 의회에 참여해 섭정 위원회를 선출하면서 왕의 권한을 사실상 박탈했다. 그는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일원이자 위원회에 들어간 백작 4인 중 한 명이었다.
1296년 초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을 주선했으며, 잉글랜드 북부의 칼라일을 습격한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 해 4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에드워드 1세가 파견한 잉글랜드 선봉대에게 참패하자, 말리스 3세는 스털링에서 에드워드 1세에게 귀순했다. 에드워드 1세는 말리스 3세가 스트래선 백작으로서 계속 군림하는 걸 인정했지만, 두 아들 길버트와 로버트를 인질로 보내라고 강요했다. 두 아들은 런던 탑에 감금되어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1297년 초 윌리엄 월레스가 로우랜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말리스 3세는 처음에는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윌리엄 월레스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파이프의 맥더프를 그 해 8월에 생포했다. 하지만 윌리엄 월레스를 따르는 반란군이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진압군을 격파하고 스코틀랜드 대부분을 석권하기에 이르자, 그는 방침을 바꿔 윌리엄 월레스에게 가담했다. 1297년 10월 윌리엄 월레스의 노섬벌랜드 습격전에 참여했지만, 이후 1303년까지 기간 동안 어떤 행적을 벌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스트래선으로 물러난 뒤 상황을 지켜봤을 거라고 추정한다.
1303년, 말리스 3세는 대세가 에드워드 1세에게 기울어졋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귀순했다. 1303년 늦여름, 그는 웨일즈 왕자 에드워드가 스코트랜드 북부로 진군할 때 그의 수행원 중 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는 남은 아들 말리스 역시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는 그를 포스 강 북쪽의 스코틀랜드 부 감찰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의 부하로 지내던 1306년 3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에드워드 1세에게 반기를 들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말리스 3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코민가의 일원인 이사벨라 코민이었으므로, 베드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살해한 로버트 브루스를 불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료에 따르면, 그는 로버트 브루스의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 브루스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1306년 6월 메스번 전투에서 로버트 브루스가 참패하자, 말리스 3세는 재빨리 잉글랜드 사령광 에이머 드 발랑스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는 그를 믿을 수 없는 인간이라 여기고 11월에 잉글랜드 남부의 로체스터 성에 가두었다.
1307년 7월 에드워드 1세가 사망한 후, 에드워드 2세는 말리스 3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 말리스 3세는 1306년 당시 잉글랜드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어기고 싶지 않아 로버트 브루스를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9대 아솔 백작 존 드 스트라스보기의 옛 부하들은 그가 주군을 체포한 뒤 로버트 브루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고 반박했다. 이에 의심을 품은 에드워드 2세는 1307년 11월 말리스 3세를 요크 성으로 이전해 1308년 11월까지 그곳에 갇혀 지내게 했다.
1308년 11월에 풀려난 뒤, 에드워드 2세로부터 소액의 연금을 받았지만 1310년까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걸 금지당했다. 이후 베릭 수비대에 가담해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싸우면서 충성심을 인정받았고, 1312년 퍼스의 잉글랜드 수비대를 지휘했다. 1313년 1월, 로버트 브루스를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장남 말리스 4세가 참여한 스코틀랜드군이 퍼스를 공략하면서 생포되었다. 로버트 브루스는 말리스 3세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했지만, 그에게 작위와 영지를 아들에게 바치라고 강요했다. 그 후 말리스 3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1317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가문의 공동묘지가 있는 인차프레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아그네스 코민(? ~ 1320년 8월 이후): 제6대 부컨 백작 알렉산더 코민의 딸. 1320년 8월 윌리엄 2세 드 소울스, 브레친 영주 데이비드, 로저 모브레이 등과 함께 로버트 1세를 암살하고 존 발리올의 장남 에드워드 발리올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당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말리스 4세(? ~ 1327년에서 1330년 사이): 제7대 스트래선 백작.
- 길버트(? ~ 1297년 이후)
- 로버트(? ~ 1297년 이후)
- 마틸다(? ~ 1384): 스코틀랜드 기사 로버트 드 토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