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8:17:35

푸크 판헤일

푸크 판헤일의 역임 직책
{{{#!folding ▼ 네덜란드 축구 국가 대표팀 역대 주장
헤유스 판데르묄런
(1931~1933)
푸크 판헤일
(1934~1938)
빌럼 안데리선
(1939)
}}} ||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Puck van Heel.jpg
<colbgcolor=#f0f0f0> 이름 푸크 판헤일
Puck van Heel
본명 헤라르뒤스 헨리퀴스 판헤일
Gerardus Henricus van Heel
출생 1904년 1월 21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망 1984년 12월 18일 (향년 80세)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소속 <colbgcolor=#f0f0f0> 선수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23~1940)
국가대표 64경기 (네덜란드 / 1925~1938)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뒷이야기5. 수상
5.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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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어린 시절

판헤일은 로테르담 남부의 가톨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판헤일의 아버지는 원래 북부 브라반트에서 일하던 도크 노동자였지만 푸크가 태어날 무렵엔 로테르담조선소에서 일했으며 11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판헤일은 페예노르트의 유스 클럽에서 축구를 배웠고 1919년 10월 12일에 아마추어 데뷔 경기를 치렀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판헤일은 데뷔 시즌이던 1923~24 시즌부터 우승을 맛보았다. 처음부터 페예노르트의 레귤러 멤버는 아니었지만 케이스 페일(Kees Pijl)의 올림픽 대표 차출로 판헤일에게 출전 기회가 주어졌고 페예노르트가 반드시 잡아야 했던 두 경기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 이 활약으로 페예노르트는 첫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코르 판데르벨더(Cor van der Velde)에 밀려 다음 시즌에도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고 판데르벨더의 양보 이후에 주전 선수가 되었다.

이후 판헤일은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5회의 에레시디비 우승과 2회의 KNVB 베이커 우승을 경험했고 팀의 주장으로도 몇 시즌을 보냈다. 당연하게도 더 카위프의 개장 경기에도 참가했으며 총 322회의 리그 출장과 43골의 기록을 남겼다.

2.2.2. 국가대표팀

판헤일은 1925년 3월에 21세의 나이로 오렌지 유니폼을 처음 입었지만 경기를 뛰지는 못했고 4월 19일에 스위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스위스에 1대4로 대패했고 그 이후 판헤일은 13년간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네덜란드 대표팀 소속으로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의 벽에 막혀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 경기에서 판헤일은 우루과이의 라이트 윙 하프였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에 막혀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이후 판헤일은 2번의 월드컵에도 모두 주장으로 출전했지만 네덜란드는 1934년엔 스위스,1938년엔 체코슬로바키아에 덜미를 잡히며 두 대회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판헤일은 총 64회의 A매치에 참가했으며 1937년 5월 2일, 해리 데니스의 56회 A매치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8년 10월 23일에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와의 원정 경기였으며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2대2로 비겼다. 그의 A매치 64회 출장 기록은 41년이 지난 1979년에서야 뤼트 크롤이 돌파했다.

2.3. 이후

선수 생활 당시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했던 네덜란드 축구계의 방침에 따라 그는 축구 선수로 뛰면서 마가린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페예노르트의 석탄 무역 이사직과 담배 판매업을 겸했다. 축구 선수 활동 이후에는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1969년에 생업에서 은퇴했다.

판헤일은 로테르담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4년에 사망했고 1997년엔 로테르담의 길에 그의 이름이 헌정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판헤일은 왼쪽 무릎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때문에 스피드는 느렸지만 넓은 시야와 기술적 능력을 갖고 있었고 특히 왼발을 이용한 좋은 패서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소속팀 페예노르트의 주장으로서 2차 대전 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 페예노르트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기도 하다.

4. 뒷이야기

  • 그의 별명인 푸크는 판헤일이 초등학생일 때 붙은 별명인데 가장 키가 작아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5. 수상

5.1. 클럽[2]

  • 에레디비시 우승 5회: 1923–24, 1927–28, 1935–36, 1937–38, 1939–40
  • KNVB 베이커 우승 2회: 1929-30, 1934-35
  • 에레디비시 준우승 4회: 1930-31, 1931–32, 1932–33, 1936–37
  • KNVB 베이커 준우승 1회: 1933-34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판헤일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의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클럽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