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14:37:07

프란체스코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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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양시칠리아 왕조
페르디난도 1세 프란체스코 1세 페르디난도 2세 프란체스코 2세
나폴리 왕국 · 시칠리아 왕국 · 양시칠리아 왕국 }}}}}}}}}
<colbgcolor=#ce2b37><colcolor=#fff> 양시칠리아 왕국 제4대 국왕
프란체스코 2세
Francesco II
파일:프란체스코 2세.jpg
이름 프란체스코 다시시 마리아 레오폴도
(Francesco d'Assisi Maria Leopoldo)
출생 1836년 1월 16일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나폴리 왕궁
사망 1894년 12월 27일 (향년 58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르코
재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
1859년 5월 22일 ~ 1861년 3월 20일
배우자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 (1859년 결혼)
자녀 마리아 크리스티나 피아
아버지 페르디난도 2세
어머니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형제 루이지, 알베르토, 알폰소, 마리아 안눈치아타, 마리아 임마콜라타, 가에타노, 주세페, 마리아 피아, 빈첸초, 파스쿠알레, 마리아 루이사, 젠나로
종교 로마 가톨릭
서명 파일:프란체스코 2세 서명.svg
1. 개요2. 초창기3. 양시칠리아 왕국의 멸망4. 퇴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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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2세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2. 초창기

양시칠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도 2세와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유일한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부왕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재혼했는데, 어린 프란체스코는 계모를 두려워했고 계모의 반동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59년 2월 바리에서 바이에른 왕국 비텔스바흐 가문마리 조피와 결혼했다.[1] 부부의 자녀는 결혼 10년 만에 태어난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유일했으나 생후 3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3. 양시칠리아 왕국의 멸망

1859년 5월 22일, 부왕의 뒤를 위어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가 즉위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중심의 통일 운동이 벌어졌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프랑스 제2제국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승리를 거두어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 전역을 손에 넣으면서 힘의 균형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반동주의 성향이었던 그는 입헌 헌법을 만들라는 카를로 필란지에리(Carlo Filangieri 1784~1867)의 조언을 무시하였고 카밀로 카보우르의 이탈리아 반도 분할안도 거부하였다. 그 사이 칼라브리아시칠리아에서는 양시칠리아 보르보네 왕조를 몰락시키기 위한 혁명 움직임이 벌어졌고, 카보우르의 지원을 받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남부를 기습할 준비를 마쳤다. 프란체스코 2세는 혁명 세력을 색출하여 주모자들을 처형했으나 곧 가리발디가 1,000인의 원정대를 이끌고 마르살라에 상륙해 시칠리아를 순식간에 정복했다.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점령 소식을 듣고 뒤늦게 입헌 헌법을 승인했으나 이미 양시칠리아 왕국은 망국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 몇몇 장관들은 사임했고, 교황령 침공을 결정한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피에몬테군이 교황령의 움브리아마르케를 정복한 후 양시칠리아 왕국까지 밀고들어왔다. 가리발디에게 나폴리를 점령당하자 가에타(Gaeta)로 피신했고 여기서 3개월을 버텼으나 결국 1861년 2월 13일 피에몬테군에게 항복했다. 가리발디는 자신이 정복한 양시칠리아 왕국을 테아노(Teano)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주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양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했다. 이로써 양시칠리아 왕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흡수되어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4. 퇴위 이후

증기선을 타고 교황령 로마로 망명한 프란체스코 2세 부부는 교황 비오 9세로부터 퀴리날레 궁에서 환대를 받은 후 과거 파르네세 가문[2]이 소유했던 파르네세 궁전을 받았다. 로마에 머물면서 1868년 가리발디의 군대가 로마 점령에 애를 먹자 복위를 시도했으나 1870년 교황령까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자 복위를 영구 포기하였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이후 아내의 친정 바이에른 왕국을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망명했다. 가리발디의 제안으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위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고 대신 양시칠리아 왕국을 부활시켜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제후국으로 편입시켜주겠다고 제의했으나 프란체스코는 "양시칠리아 망국의 군주는 자신이 맞으니까 부디 양시칠리아는 부활시키지 말아달라"면서 명예만큼은 팔 수 없다며 거부하고 양시칠리아 왕국의 후계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라는 것을 공식 인정했다. 이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전전하며 살다가 1894년 치료 차 들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티롤의 아르코(Arco)[3]에서 사망했다. 자녀를 두지 못해 명목상의 왕위는 이복동생 알폰소 왕자(1841~1934)가 계승하였다. 알폰소 왕자는 양시칠리아 왕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폰소 왕자의 장남이 1960년에 사망한 후 알폰소의 5남 라니에리와 알폰소의 차남 카를로의 장남인 알폰소가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면서[4] 현재 양시칠리아 왕가는 두 계통으로 분열되었다.


[1] 오스트리아 황후였던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의 여동생이다.[2] 파르네세 가문은 옛 파르마 공국의 통치 가문으로 프란체스코 2세의 고조할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어머니 엘리사베타가 파르네세 가문의 상속녀였다.[3] 트렌토 지역에 속한 곳이라 현재는 이탈리아 영토이다.[4] 카를로가 스페인 공주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와 결혼하면서 양시칠리아 왕가 수장 계승권을 포기하였는데, 그 장남 알폰소가 부친의 왕위계승권 포기는 카를로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게 될 때만 효력이 생긴다는 해석을 제시하면서 계승권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