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3:04:57

프레데군트

네우스트리아의 왕비
Fredegund | 프레데군트
파일:Fredegonde596.jpg
제호 한국어 프레데군트
라틴어 Fredegundis
프랑스어 Frédégonde
생몰 년도 미상 ~ 597년 12월 8일
재위 기간 네우스트리아의 왕비
568년 ~ 597년 12월 8일

1. 개요2. 행적
2.1. 시녀에서 왕비로2.2. 킬페리크 1세와 시게베르 1세의 내전2.3. 브룬힐트의 탈출과 프레데군트의 정치 개입2.4. 킬페리크 1세의 죽음과 부르군트 왕 군트람의 보호2.5. 말년
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의 네우스트리아 분국의 왕 킬페리크 1세의 세 번째[1] 왕비였다. 프랑크 왕국의 패권을 놓고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브룬힐트와 30년에 걸친 투쟁을 벌인 인물로 유명하다. 두 여인의 대립은 훗날 《니벨룽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2. 행적

2.1. 시녀에서 왕비로

'프레데군트'(Fredegund)는 프랑크어 단어 '평화로운'(fridu-)과 '전사'(gund-)의 합성어이다. 그녀의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아우도베라 왕비의 시녀였다고만 전해질 뿐이다. 다만 그녀의 최대 정적이었던 브룬힐트를 가리켜 "이민족 여자"라고 비방하던 프랑크 귀족들이 프레데군트에게는 그런 비방을 하지 않은 걸 고려하면 평범한 프랑크인 가정에서 출생했을 것이다. 그저 일개 시녀일 뿐이었던 그녀였지만, 프랑크 왕국의 서부 지역을 다스리는 네우스트리아 분국의 왕 킬페리크 1세의 눈에 들어 왕의 정부가 되었다.

8세기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연대기 《프랑크 왕국의 역사집》은 아우도베라 왕비가 축출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킬페리크 1세가 시게베르 1세의 작센 원정에 참여하러 간 사이에 아우도베라는 딸 킬데신다를 낳았다. 당시엔 세례식 때 아기의 대모를 정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원래는 킬페리크 1세의 누이가 대모를 맡기로 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대모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왕비에게 권유했다.
"왕비께서 궁중 여인 중 최고이시니 대모를 맡으십시오."
아우도베라는 그 말이 일리있다고 판단한 후 아기의 대모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아이의 대부모가 된 사람은 아이의 부모와 형제가 되기 때문에 아이의 부모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우도베라가 대모가 되었으니, 킬페리크 1세와의 결혼은 무효 처리되고 적녀였던 킬데신다는 졸지에 사생아 취급받는 격이 되어버렸다. 프레데군트는 원정에서 돌아온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사실을 고스란히 알렸고, 킬페리크 1세는 분노하여 아우도베라와 킬데신다를 망스의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가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본다. 《프랑크 왕국의 역사집》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민담과 소문이 뒤섞이고, 당대 사료와 교차검증이 되지 않은 점이 많아서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는데다가, '순진한 왕비' 아우도베라와 '교활한 시녀' 프레데군트를 극적으로 연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당대의 역사가였던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킬페리크 1세가 서고트 왕국의 공주 갈스빈트와 결혼하기 위해 합법적인 아내와 정부를 모두 내보내야 했다고 기술했다. 이로 볼 때 킬페리크 1세가 갈스빈트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우도베라를 수도원으로 보낸 것 자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566년, 프랑크 왕국의 동부 지역을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1세서고트 왕국의 국왕 아타나길드의 딸 브룬힐트와 결혼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형제들의 아내들이 왕비의 지위에 합당하지 않으며 오직 왕의 딸만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라는 칭호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시게베르 1세와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킬페리크 1세는 형제가 타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막대한 지참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 역시 그러기로 결정한 후, 서고트의 왕 아타나길드에게 브룬힐트의 여동생이었던 갈스빈트를 왕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타나길드는 킬페리크 1세가 음탕하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딸을 선뜻 내주지 않았다.

그러던 567년, 파리 일대를 다스리던 카리베르 1세가 승하했다. 이에 킬페리크 1세, 군트람, 시게베르 1세가 카리베르 1세의 영지를 분할했는데, 네우스트리아 왕 킬페리크 1세는 레몽, 퀘라르, 닥스, 보르도, 비고르, 베어른 등 피네스 상부 일대를 접수했다. 이리하여 서고트 왕국과 경계가 맞닿게 되자, 아타나길드는 그와 갈등을 벌이는 건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정부들과 깨끗히 헤어지는 조건하에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고, 킬페리크 1세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서고트 공주 갈스빈트는 막대한 보물을 실은 마차 여러 대와 이를 보호할 호위 병력을 이끌고 네우스트리아 왕국의 수도 수아송에 도착했고, 킬페리크 1세는 서고트 왕국과 인접한 아키텐 일대에 소속된 리모주, 보르도, 카오르, 베른, 비고르의 모든 영토와 인구를 지참금으로 정했다.

갈스빈트는 본래 아리우스파였지만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프랑크 왕국의 분국에 시집왔기 때문에 개종했다. 용모는 평범했지만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신하들에게 온화하게 대하고 신앙 활동에 힘을 쏟았으며, 빈민들을 대상으로 자선 활동을 즐겨해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성욕이 강했던 킬페리크 1세는 갈스빈트에게 관심을 잃고, 아름다운 용모에 성적 매력이 뛰어났던 프레데군트와 사랑을 나누었다. 갈스빈트는 국가간의 약속을 어긴 남편에게 실망해 자신을 조국인 서고트로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는 모든 보물과 지참금을 포기할 테니 홀몸이라도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와 사랑에 빠진 것을 부인하고 왕비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파일:Galswinthe_&_Chilperic00.jpg
자고 있는 갈스빈트 왕비를 목 졸라 죽이는 모습

그러던 567년 12월, 장인이었던 서고트 왕 아타나길드가 승하했다. 그후 서고트 왕국이 혼란에 빠지면서 위상이 떨어지자, 킬페리크 1세는 서고트 왕국과 친선관계를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어졌고, 배후 세력이 없어진 왕비 갈스빈트에게 연연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결국 킬페리크 1세는 그녀를 몰아내고 정부인 프레데군트를 새 왕비로 세우기로 했다. 568년경, 갈스빈트 왕비는 잠자던 도중 노예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왕비를 수녀원으로 보내는 당대의 일반적인 왕실의 이혼 방식을 택하지 않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킬페리크 1세가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설과 프레데군트가 사주했다는 설이 양립하는데, 정황상 프레데군트가 주도했고, 킬페리크 1세는 이를 방조 또는 방관했을 가능성이 높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크 1세는 갈스빈트의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한 후 며칠 후에 프레데군트를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2.2. 킬페리크 1세와 시게베르 1세의 내전

여동생 갈스빈트가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비 브룬힐트는 극도로 분노했고, 남편인 시게베르 1세에게 복수해달라고 간청했다. 시게베르 1세는 아내의 간절한 설득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 킬페리크 1세의 영지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두 형제에게 자제할 것을 촉구했고, 그들은 569년 전국에서 소집한 대표들이 집결한 궁정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궁정회의 결과, 킬페리크 1세는 살인에 관여한 책임을 지고, 처형이었던 브룬힐트에게 아키텐의 5개 도시(보르도, 리모주, 카오르, 베른, 비고르)를 넘겨야 했다. 몇년 후, 킬페리크 1세는 영토 손실을 만회하고자 시게베르 1세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를 탈취했다. 여기에 573년 시게베르 1세의 포로였다가 풀려났던 테우데베르[2]에게 아키텐 일부를 약탈하도록 했다. 테우데베르는 아키텐을 철저히 약탈했는데, 특히 리모주를 공략할 때는 성직자까지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이에 격노한 시게베르 1세는 이참에 킬페리크 1세를 처치하고 그의 영지인 네우스트리아를 자신의 영역으로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다. 575년, 시게베르 1세는 라인 강 너머 게르만인들을 대거 고용해 강대한 군사력을 갖춘 뒤 수아송으로 쳐들어갔다. 킬페리크 1세는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 손을 잡고 대항했지만, 군트람이 보낸 장군이었던 군트람 보손이 돌연 편을 바꿔버리는 바람에 테우데베르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킬페리크 1세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투르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농성했다. 이때 그와 함께 있었던 왕비 프레데군트가 아들을 낳았다. 신생아는 투르의 주교에 의해 세례를 받았는데, 프랑크 전통과는 달리 '삼손'(Samson)이라는 게르만식 이름을 받았으며, 빈민들이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도록 했다.
파일:640px-Emmanuel_Herman_Joseph_Wallet_-_Frédégonde_armant_les_meurtriers_de_Sigebert.jpg
프레데군트가 자신의 추종자 두 명에게 마약 성분이 든 술을 먹인 후 가서 시게베르 1세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모습

투르 공방전이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킬페리크 1세는 절망에 빠진 나머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파리 일대의 프랑크 귀족들은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후, 킬페리크 1세를 떠나 시게베르 1세에게 귀순하고자 대표단을 보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프레데군트가 무기력한 남편을 대신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자신을 흠모하던 두 사람을 불러낸 뒤 마약 성분이 든 술을 마시게 한 후, 독이 든 단검을 쥐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시게베르 왕을 먼저 죽이는 자는 나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
파일:Grandes_Chroniques_de_France_-_XIVème_siècle_-_Assassinat_de_Sigebert_Ier.jpg
프레데군트가 보낸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는 시게베르 1세

두 사람은 즉시 포위당한 투르에서 빠져나와 비트리 앙 아르투아에서 킬페리크 1세의 옛 신하들로부터 네우스트리아의 새 왕으로 칭송받던 시게베르 1세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시게베르 1세를 호위하던 아우스트라시아군 병사들에게 곧바로 처단당해 프레데군트 왕비와 하룻밤을 보낸다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지도자를 잃은 아우스트라시아군은 해산되었고, 킬페리크 1세는 잃어버렸던 영토와 재산을 쉽게 되찾은 후, 여세를 몰아 브룬힐트와 그녀의 아들 킬데베르 2세가 있는 파리로 향했다. 시게베르 1세의 후계자였던 킬데베르 2세는 시게베르 1세의 총신이었던 군도발트에 의해 아우스트라시아의 본거지인 메츠로 간신히 피신했지만, 브룬힐트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로잡힌 뒤 모든 보물을 빼앗기고 루앙으로 유배되었다.

2.3. 브룬힐트의 탈출과 프레데군트의 정치 개입

576년, 킬페리크 1세의 첫 번째 왕비였던 아우도베라의 또다른 아들 메로베가 브룬힐트를 사모한 끝에 그녀와 결혼했다. 이 어이없는 소식을 접한 킬페리크 1세는 분노해 아들을 만나려고 직접 떠났다. 오랜 협상 끝에, 킬페리크 1세는 브룬힐트와 결혼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는 아들의 요구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한편, 샹파뉴에서 온 이들이 수도 수아송을 습격해 순식간에 장악한 후 프레데군트와 킬페리크 1세의 아들 클로비스를 수아송에서 몰아냈다. 이에 킬페리크 1세와 메로베 부자는 잠정적으로 화해한 뒤 수아송으로 진군해 샹파뉴군을 몰아내고 수아송을 회복했다. 그러나 킬페리크 1세는 이 사건이 아들 메로베의 사주로 일어났다고 여겨 메로베를 긴급 체포한 뒤 감옥에 가두었다. 한편 브룬힐트는 부자가 서로 대립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루앙에서 탈출해 아우스트라시아의 메츠로 이동했다.

메로베는 상속권을 박탈당한 뒤 수도승에 의해 삭발된 후 아니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도중에 군트람 보손의 부하들에 의해 풀려난 뒤 투르로 도주했다. 이후 부왕 킬페리크 1세가 투르로 쳐들어오자, 577년 이를 피해 아우스트라시아로 도주하여 브룬힐트와 합류하려고 했지만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저지로 실패했다. 이에 메로베는 정체를 숨긴 채 랭스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었다. 주민들은 별장에 그를 가둔 뒤 킬페리크 1세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킬페리크 1세는 메로베가 구금되어 있는 곳으로 급히 갔지만, 메로베는 이미 살해된 뒤였다. 세간에서는 프레데군트가 아우도베라의 모든 아이들을 멸하려고 살인을 사주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킬페리크 1세는 아들이 살해된 것을 알게 되자 살인자를 처형했다.

또한 메로베와 브룬힐트의 결혼을 주선한 루아나 주교는 체포된 후 브룬힐트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킬페리크 1세에 대한 불복종을 부추긴 혐의가 적용되어 교회 법원에 회부되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를 포함한 여러 주교들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킬페리크 1세의 압력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루아나는 주교직을 박탈당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밤에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심하게 구타당한 후 저지 섬으로 보내졌다.

577년, 킬페리크 1세와 프레데군트의 아들이었던 삼손이 이질에 걸려 2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프레데군트 역시 병에 걸렸지만 곧 회복되었다. 579년,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의 조언에 따라 세금 징수량을 늘리기 위해 네우스트리아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밭, 숲, 집, 가축, 포도원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도입되었다. 580년 2월 갈리아-로마인 출신인 마르크가 리모주에 도착하여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3월 1일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크는 간신히 도시를 탈출한 뒤 킬페리크 1세에게 리모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고했다. 킬페리크 1세는 즉시 군대를 보내 리모주의 폭도들을 학살하고, 리모주의 대표 및 모든 저명한 시민들을 추방했다. 여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혐의로 기소된 성직자들을 잡아들인 뒤 도시 광장에서 다양한 고문을 가했다. 이때 처형되거나 추방된 이들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고, 리모주 시는 이전에 지불하기를 거부했던 세금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과세를 내야만 했다. 당시 킬페리크 1세가 이끄는 네우스트리아의 세금이 너무 무거워서, 많은 이들이 네우스트리아를 떠나 킬데베르 2세가 다스리는 아우스트라시아나 군트람이 지배하는 부르군트로 도주했다.

580년 8월, 천연두가 갈리아 전역을 휩쓸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때 킬페리크 1세 및 두 아들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도 병에 걸렸다. 킬페리크 1세는 병에서 회복되었지만, 두 아들은 모두 죽었다. 이 일련의 자연재해에 동요한 킬페리크 1세는 추가 세금을 폐지하고 인명부를 불태웠으며, 교회, 바실리카, 그리고 빈민들에게 많은 선물을 나눠줬다.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가 모두 죽자, 킬페리크 1세는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았고 현재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클로비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프레데군트는 클로비스마저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클로비스가 클로도베르와 다고베르트를 마법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하면서, 마법사로 간주된 한 여인을 체포해 화형에 처했다. 클로비스는 조사를 위해 한 별장으로 보내졌다가 프레데군트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프레데군트는 수도원에 사람을 보내 전 왕비 아우도베라를 살해하고, 아우도베라의 딸 바시나를 강간한 뒤 푸아티에 수도원으로 보냈다. 이때 아우도베라의 모든 소유권과 여동생 바시네는 프레데군트의 소유로 넘어갔다.

582년, 킬페리크 1세는 앙소알드 공작과 도미기실 공작 등을 서고트 왕국으로 보내 리우비길드 왕의 아들 레카레드 1세와 리군트[3]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리우비길드는 부르군트 왕 군트람의 지원을 받는 장남 헤르메네길드와 내전을 치르고 있었기에 킬페리크 1세와는 화목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그 덕분에 협상은 순조롭게 끝났고, 네우스트리아 사절단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킬페리크 1세는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테우데리크를 낳았다. 기뻐한 왕은 이를 기념하고자 모든 감옥을 열어 죄수들을 석방하고, 어떤 형벌도 당분간 시행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584년, 테우데리크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킬페리크 1세는 어린 아들이 또다시 죽은 것에 극도로 분노해 몸몰 지사가 아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아 풀려난 뒤 곧 사망했다.

2.4. 킬페리크 1세의 죽음과 부르군트 왕 군트람의 보호

파일:킬페리크 1세의 암살.jpg

584년, 부르군트 왕 군트람과 아우스트라시아 왕 킬데베르 2세의 모후 브룬힐트가 연합하여 킬페리크 1세를 공격했다. 킬페리크 1세는 이에 대응해 캉브레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프레데군트와 관계를 맺고 아들 클로타르 2세를 낳았다. 584년 9월 1일, 킬페리크 1세는 딸 리군트를 서고트 왕국으로 보낼 호화로운 호송단을 파견했다. 이후 사냥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 근교의 사냥터로 향했다. 9월 27일, 킬페리크 1세가 사냥에서 돌아와 말에서 내렸을 때 한 사내가 갑자기 달려들어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죽인 뒤 도망쳐 종적을 감췄다. 살인범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당시 킬페리크 1세와 사이가 소원해졌던 프레데군트가 사주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일설에 따르면, 사냥을 준비하던 왕이 마구간을 들렀다가 프레데군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물에 머리를 담그고 있었을 때, 왕이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뭐하는 거예요, 랑데리크?"
킬페리크 1세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종자인 랑데리크가 아내와 불륜관계라는 걸 눈치채고 매우 슬퍼하며 사냥을 떠났다. 뒤늦게 남편이 알아챘다는 걸 깨달은 프레데군트는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살인자를 고용해 남편을 죽이도록 했다. 이후 살인을 사주한 책임을 숙적인 킬데베르 2세에게 떠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책임지고, 자신을 극도로 증오하는 브룬힐트를 막아줄 남편을 죽여서 얻을 이득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브룬힐트가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설과 킬페리크 1세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자의 단독 범행이라는 설이 제기되지만, 살인자가 잡히지 않고 종적을 감춰버렸기 때문에 진실은 알 수 없다.

프레데군트는 남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국고를 챙겨서 갓난아기인 클로타르 2세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녀는 한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부르군트의 군트람 왕에게 서신을 보내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고, 성년이 될 때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섭정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군트람은 즉시 파리에 도착한 뒤 프레데군트 모자를 자기 진영으로 들였고, 나중에는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들였다. 아우스트라시아의 브룬힐트는 여동생과 남편을 죽인 철천지 원수였던 프레데군트를 자신에게 인도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군트람은 이를 묵살했다. 이후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을 불러놓고 당시 사생아로 의심받던 클로타르 2세를 선왕 킬페리크 1세의 아들로 인정하라고 명령해 복종을 얻어낸 뒤 클로타르 2세를 양자로 삼았다. 당시 군트람은 브룬힐트의 아들이자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이었던 킬데베르 2세도 양자로 들였기에, 사실상 프랑크 왕국 전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585년 여름, 클로타르 2세의 세례식이 거행되면서 프레데군트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파일:800px-Fredegunda_visita_a_pretextato_en_su_lecho_de_mueret.jpg

586년, 군트람에 의해 로렌의 주교로 임명된 후 프레데군트의 악행을 사사건건 비판하던 프리텍타투스가 부활절에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검에 찔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을 때, 프레데군트가 병실을 방문하여 자신을 돌보는 주치의를 옆에 둘 테니 간호받으라고 권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이를 임종을 보기 위한 프레데군트의 변명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의 서술에 따르면, 프리텍타투스는
"하느님은 이미 나를 이 세상에서 부르시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 범죄의 주동자인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피 때문에 당신의 머리에 형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
라고 저주를 내린 후 곧 사망했다고 한다. 그후 프레데군트는 군트람의 허락을 받지 않고, 멜란티우스를 새로운 로렌의 주교로 세웠다.

얼마 뒤, 프레데군트는 일찍이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장악하고,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베폴렌 공작을 몰아낸 후 이 영토를 탈환했다. 베폴렌 공작은 부르군트의 군트람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기에, 프레데군트는 군트람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협약을 제안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체포되었으며, 군트람은 프레데군트로부터 등을 돌리고 브룬힐트의 아들 킬데베르 2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587년 11월 28일, 군트람과 킬데베르 2세는 안델로트 조약에 서명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보장하고, 아이가 없을 경우 상호 유산을 확립하며, 상대방에게 모반을 꾀한 자를 넘기기로 했다. 또한 두 왕은 왕국의 분할과 경계를 정했다. 군트람은 파리, 토덴, 반도마, 에탐나, 샤르트르를 받았고, 킬데베르 2세는 모, 상리스, 투르, 푸아티에, 아브론테, 에어, 콩세랑스, 라부르드, 알비를 접수했다. 하지만 군트람이 여전히 킬데베르 2세를 유일한 상속자로 삼는 것에 주저하자, 브룬힐트는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예전에 군도발트를 지지하고 군트람에 대적했던 자들을 넘기기로 했다.

이 움직임에 당황한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는 아우스트라시아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수아송의 라우칭 공작과 동맹을 맺고 브룬힐트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라우칭 공작은 킬데베르 2세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궁전 경비원의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후 우르시온과 베르테프레드 역시 살해되었고, 많은 이가 브룬힐트를 두려워하여 다른 지역으로 도주했다. 브룬힐트는 라우칭이 다스리던 수아송이 언제라도 프레데군트에게 넘어갈 수 있다고 여기며, 이를 방지하고자 589년 8월 킬데베르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였던 테우데베르 2세를 수아송의 왕으로 임명했다. 이렇듯 갈수록 강성해지는 브룬힐트의 권세를 경계한 프레데군트는 590년 킬데베르 2세와 테우데베르 2세 부자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6명의 암살자를 고용해 두 팀으로 나눠서 두 왕을 동시에 죽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브룬힐트는 암살 음모에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2.5. 말년

592년, 그동안 프레데군트와 종종 대립하면서도, 브룬힐트와 그녀의 대결을 최대한 막고 있었던 부르군트의 군트람이 승하했다. 이제 방해자가 사라지자, 브룬힐트와 킬데베르 2세는 오랜 숙적이었던 네우스트리아의 프레데군트와 클로타르 2세를 타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592년 또는 593년, 브룬힐트는 네우스트리아로 쳐들어가서 수아송의 드로슈에서 프레데군트의 군대와 격돌했다. 《프레데가르 연대기》에 따르면,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전투를 중단했다고 한다. 이후 양측은 몇년 동안 적대 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596년 초, 킬데베르 2세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각각 10살과 9살인 두 아들 테우데베르 2세테우데리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조모인 브룬힐트가 섭정을 맡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프레데군트는 지금이야말로 브룬힐트를 물리치고 프랑크 왕국 전역을 제패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12살의 아들 클로타르 2세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파리로 진격했다. 몇몇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호응 덕분에 일드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확보한 후, 프레데군트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영내로 진입했다. 이윽고 수아송 인근의 라포에서, 네우스트리아군과 아우스트라시아군이 맞붙었다.

막대한 희생자를 양산한 이 라포 전투에서 승리한 프레데군트는 여세를 몰아 아우스트라시아의 수도인 메츠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폐렴에 걸려 쓰러졌고,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레데군트는 병상에 누워서도 브룬힐트를 잡아오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사후 생드니 대성당에 있었던 남편 킬페리크 1세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는 브룬힐트와 그녀의 두 손자를 상대로 한편으로는 대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며 종횡무진한 끝에 브룬힐트를 무너뜨리고, 프랑크 왕국을 통합했다.

3. 평가

네우스트리아의 왕비 프레데군트는 전통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의 주요 역사 기록을 저술한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왕비로써 궁정 음모를 꾸미고, 수많은 이를 암살하며 고문을 즐기는 등 악독한 짓을 많이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을 마냥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게베르 1세와 브룬힐트 왕비의 후원 덕분에 투르의 주교가 될 수 있었고, 은인이었던 브룬힐트를 위해 정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브룬힐트는 그의 기록에서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았지만, 프레데군트는 다양한 암살 및 음모와 함께 마녀, 신성모독, 심지어 반역까지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궁정 시인이자 주교였던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는 프레데군트를 현명한 왕비로서 왕에게 소중한 조언을 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7세기의 연대기 작가였던 프레데가르는 브룬힐트를 프레데군트보다 더욱 악독한 여자로 간주했다.

역사가 그레고리오 할프론드는 그레고리우스의 프레데군트의 악행에 대한 서술에서 모순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레데군트가 프리텍타투스를 암살한 뒤 다음 암살 대상으로 주교 레오도발트를 지목했다고 한다. 그런데 레오도발트는 그녀의 이름으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가 체포된 사절단 중 한 명을 석방하는 걸 허용했다. 게다가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의 통치 기간에 네우스트리아 왕가의 든든한 지지자로 활동했으며, 614년 프랑크 왕국의 통합 이후에 열린 파리 공의회에도 출석했다. 이로 볼 때, 레오도발트는 프레데군트의 핵심 지지자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레고리우스의 프레데군트의 악행에 대한 설명이 과장되었다는 것 역시 확인된다.

또한 프레데군트에 대한 기록을 잘 살펴보면 그녀가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레데군트는 권력욕이 강해 전 왕비의 자식들을 모조리 처단하는 등 정적들을 가차없이 처단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극복하는 역량도 탁월했다. 시게베르 1세 암살을 단행해 몰락 직전에 몰린 남편을 구했고, 남편이 갑자기 암살당하면서 입지가 허물어질 위기에 몰리자 재빨리 군트람 왕을 구슬려서 그의 보호를 받음으로써 브룬힐트의 보복을 피했다. 말년에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브룬힐트와 대결해 수 차례 승리하는 등 여걸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그리고 프레데군트의 아들 클로타르 2세는 그녀가 쌓아올린 기반을 토대로 프랑크 왕국의 재통합에 성공했다.

4. 여담

파일:리군트를 죽이려는 프레데군트.jpg*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프레데군트는 딸 리군트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리군트는 어머니는 한낱 시녀에 불과했지만 자신은 왕의 딸이니 마땅히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이 왕궁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어머니에게 권한을 넘기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에 프레데군트가 분노하여 그녀를 주먹으로 쳤고, 리군트 역시 어머니를 때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데군트는 화해를 청하며 아끼는 보물을 줄 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이후 딸을 보물실로 데려온 그녀는 큰 보물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보석을 보였다. 그러면서
"내가 열고 있을 테니 네 손으로 보물을 꺼내라"
고 말했다. 리군트는 그 말에 따라 보물을 상자에서 꺼내려고 머리를 집어 넣었다. 그때 프레데군트가 뚜껑을 제빨리 떨어뜨려 딸을 질식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하인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급히 달려와 말리는 바람에 죽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기록이 프레데군트를 악마화하기 위해, 뜬 소문을 사실인양 받아적은 것일 뿐이라고 간주한다.리군트가 서고트 왕국의 왕자인 레카레드 1세와 결혼하고자 길을 떠났을 때, 그녀의 수행원들은 막대한 보물을 챙겼다. 이에 프랑크 귀족들이 이러다간 왕실 재정이 고갈된다며 반대하자, 프레데군트는
"이 모든 선물은 남편(킬페리크 1세)이 개인 재산을 관대하게 베푼 것일 뿐, 왕실의 재정을 들인 것이 아니다."
라며 무마시켰다. 그러나 수행단은 여정 도중에 킬페리크 1세가 살해되고, 군트람이 킬페리크 1세의 영역을 점유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보물을 강탈한 채 뿔뿔이 흩어졌고, 리군트는 아키텐의 데시데리우스에 의해 툴루즈로 이송되었다. 레오나르두스라는 신하가 당시 파리 대성당에서 갓난아들인 클로타르 2세와 함께 은거 중이던 프레데군트를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딸 리군트가 잘못된 것에 몹시 분노해 대성당에 따라온 요리사 및 제빵사들과 함께 레오나르두스를 폭행하고 사슬로 묶은 뒤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다가 흥분이 가라앉자 그를 풀어줬다고 한다. 이렇듯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프레데군트가 리군트를 끔찍하게 죽이려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 프레데군트와 브룬힐트의 싸움, 브룬힐트의 남편 시게베르 1세의 암살은 《볼숭 사가》와 《니벨룽의 노래》의 모티브가 되었다. 다만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데 브룬힐트=브륀힐드, 프레데군트=구드룬처럼 1대 1로 대응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브룬힐트와 프레데군트의 특징들이 신화 속 두 캐릭터에게 골고루 나눠진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예를 들어 발키리 브륀힐드의 캐릭터에는 이름의 유사성 및 먼 땅에서 온 외국인 왕비라는 브룬힐트의 특징과 함께, 프레데군트가 시게베르 1세의 암살을 사주한 에피소드도 함께 섞여있다.
파일:733769_479780078741853_1322084848_n.jpg* 2014년쯤 <The 2Queens 2人の女王>이라는 이름으로 프레데군트와 브룬힐트의 전쟁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예고편이 공개된 이후 8년 동안 무소식이다. 추측으로는 예산이 부족해 중단된 듯 하다. 애초에 프랑크 왕국의 역사가 마이너하다보니...


[1] 첫 번째 왕비는 아우도베라(오드베르), 두 번째 왕비는 갈스빈트이다.[2] 킬페리크 1세가 첫 번째 왕비였던 아우도베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었다.[3] 킬페리크 1세가 프레데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