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01:37:00

프레스턴 스터지스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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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각본상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 프레스턴 스터지스
(위대한 맥긴티)
허먼 J. 맨키위즈, 오슨 웰스
(시민 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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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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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프레스턴 스터지스
PRESTON STURGES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1601 Vine Street
}}}}}}}}}}}} ||


}}} ||
<colbgcolor=#000><colcolor=#fff> 프레스턴 스터지스
Preston Sturges
파일:Preston_Sturges.jpg
본명 에드먼드 프레스턴 비덴
Edmund Preston Biden
출생 1898년 8월 29일
미국 일리노이시카고
사망 1959년 8월 6일 (향년 60세)
미국 뉴욕뉴욕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영화감독, 각본가
활동 1928년1956년

1. 개요2. 소개3. 생애 및 작품 활동4. 필모그래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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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2. 소개

가장 위대한 영화 풍자가로 알려진 스터지스는 냉소주의와 정감을 결합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위트있고 속사포처럼 빠른 대사들과 대중적인 코미디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요소들을 이용해 공허한 부와 도덕적인 위선을 향해 비판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 점에서 앙드레 바쟁은 스터지스를 가리켜 반(反)카프라주의자라고 불렀다. 프랭크 카프라가 용기와 선의를 위한 투쟁이나 도덕적인 관용과 같은 원칙들을 힘겹게 지켜내고자 했다면, 스터지스는 미국적인 신념들을 불경스럽게 조롱하고 그것들이 단지 신화에 지나지 않는 가상적인 것임을 증명했다. 바쟁은 바로 그러한 부정적인 메시지와 유머를 풍자로 변형하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스터지스의 영화가 미국 코미디 영화의 수명을 오히려 연장시켰다고 강조했다.
-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 프레스턴 스터지스는 할리우드 황금기 최고의 코미디 감독이었습니다.
'레이디 이브', '모건 크릭의 기적', '팜 비치 스토리' 같은 그의 탁월한 코미디는 이후 수십년간 할리우드 후배들이 뛰어넘을 수 없었던 천재의 작품들이었습니다.
- 이동진 #

에른스트 루비치 등과 함께 1930-40년대 할리우드 스크류볼 코미디의 거장을 꼽으라면 반드시 꼽히는 감독으로, 유성 영화 도입 이후 주류 장르로 부상하기 시작했던 스크류볼 코미디 장르를 절묘한 타이밍으로 유머를 살리면서도 자연스러운 대사들과 [1] 성숙한 주제의식을 섞어넣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풍자에도 일가견이 있어 통렬한 위트를 섞어 당대 미국사회의 다양한 면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면모 또한 선보였다.

후대 영화 감독들 중에서는 코엔 형제[2], 웨스 앤더슨[3], 제임스 맨골드, 피터 보그다노비치, 존 라세터 등의 감독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감독들이다.

3. 생애 및 작품 활동

1898년 시카고의 부유층 집안에서 태어나 경영수업을 받으며 자랐고, 젊은 시절 모친 [4]의 화장품 사업을 돕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공군으로 입대해 [5] 전역하기도 했다. 이후 희곡 작품들을 쓰기 시작해 [6]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그의 성공에 주목한 할리우드에 의해 스터지스는 할리우드로 활동 무대를 옮겼고, 1930년대 중반부터 다수의 성공적인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1940년에는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위대한 맥긴티'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고, 이 작품으로 제13회 아카데미 각본상 [7]을 수상했다. 이후로도 자신의 연출작들은 전부 자신이 직접 각본을 집필했는데, 1941년에는 풍자섞인 로맨틱 코미디 '레이디 이브', 반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간 할리우드 풍자극 설리반의 여행을 내놓아 잇달아 비평과 흥행에 성공한다.

1942년에는 미국의 이상주의에 대한 '팜 비치 스토리', 1944년에는 애국심과 미국의 도덕에 대해 풍자한 '모건 크릭의 기적', '정복 영웅의 환영'이 연속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등 비평적 성과를 거두면서도 이 작품들 모두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스터지스는 4년간 7연속으로 비평과 흥행 두마리 토끼를 잡은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각광받는다.

그러나 7연속 성공 이후 자신이 계약할 영화 스튜디오를 옮기며 이력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하필 이 시점부터 영화들이 흥행 실패가 잇따랐고 현장과 스튜디오에서는 '고집불통인 완벽주의자' 감독으로 찍혀 업계에서도 외면받게 된다. 결국 스터지스는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1955년작 '톰슨 소령의 일기'를 끝으로 연출 활동을 접게 되고, 이후 옛 동료들의 소개로 각색 작업 일을 얻어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며 여생을 보냈다.

1959년, 호텔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신은 뉴욕 하츠데일에 있는 페른클리프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1년 뒤인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1975년에는 미국 영화 작가 조합 사상 최초로 사후에 로렐 상을 수상한 작가가 되었다.

4.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비고
1933 힘과 영광
The Power and the Glory
1934 30일의 공주
Thirty Day Princess
1934 부활
We Live Again
1935 착한 요정
The Good Fairy
1935 다이아몬드 짐
Diamond Jim
1937 호텔 헤이와이어
Hotel Haywire
1937 쉬운 삶
Easy Living
1938 일곱 바다의 항구
Port of Seven Seas
1938 내가 왕이라면
If I Were King
1938 네버 세이 다이
Never Say Die
1940 리멤버 더 나이트
Remember the Night
1940 위대한 맥긴티
The Great McGinty
감독 데뷔작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1940 7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July
1941 레이디 이브
The Lady Eve
1941 설리반의 여행
Sullivan's Travels
1942 팜 비치 스토리
The Palm Beach Story
1943 모건 크릭의 기적
The Miracle of Morgan's Creek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
1944 정복자 영웅을 환대하라
Hail the Conquering Hero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
1944 위대한 순간
The Great Moment
1947 해롤드 디들벅의 원죄
The Sin of Harold Diddlebock
1948 거짓 편지
Unfaithfully Yours
1949 배쉬풀 벤드의 아름다운 금발
The Beautiful Blonde from Bashful Bend
1955 톰슨 소령의 일기
Les carnets du Major Thompson
1956 새와 벌
The Birds and the Bees

5. 여담

  • 사생활에서도 굴곡이 있었던 편이라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 총 4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8] 결혼 생활도 상당히 짧아서 전부 10년을 못 넘겼다. 마지막으로 1951년에 결혼한 미망인 앤 마가렛 "샌디" 네이글 [9]은 2006년까지 살아 있어서 설리반의 여행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DVD 부록 인터뷰에 등장하기도 했다. 아들 톰 스터지스는 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손녀 섀넌 스터지스는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1] 반대로 영어라는 언어의 특성을 살린 대사 때문에 번역이 까다로운 고전 할리우드 감독으로 꼽힌다. 레이디 이브 같은 경우 불법 DVD 번역은 상당히 악명높았을 정도. 이런 점도 있고 하필이면 감독 데뷔 1년만에 태평양 전쟁이 터진데다 전성기도 50년대를 못 넘겼기에 스터지스는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제때 소개된 적이 별로 없는 감독이다. 일본에서 스터지스 영화는 팜 비치 스토리가 지각 개봉하고, 거짓 편지가 동시기 개봉한 게 전부이며 대표작인 레이디 이브와 설리반의 여행은 무려 1994년에야 개봉했을 정도였다.[2] 스터지스의 영화 설리반의 여행에 등장하는 극중 영화의 제목을 따와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만들었다.[3]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영향을 준 작품들 중 하나로 스터지스의 영화들을 언급했다.[4] 이 모친 메리 뎀시가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보헤미안 예술가 기질이 충만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프레스턴이 2살떄 가수가 되겠다며 프레스턴의 아버지랑 결혼을 무효화하고 프랑스로 넘어가기도 했고, 미국에 돌아와서는 세번째 남편 솔로몬 스터지스와 결혼해 아들을 세번째 남편 호적에 입적시키기도 했다. 한편 이사도라 던컨과 친구로 지내면서, 프레스턴은 던칸 무용단과 함께 유럽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유럽 중에서는 프랑스에서 제일 오래 머물러 프레스턴 본인도 프랑스어를 잘했고, 프랑스 문화 애호가였다고 한다. 또한 메리는 알레이스터 크로울리랑 한때 연인 사이기도 해서 크로울리의 저서 매직 집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5] 훈련만 받았지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6] 희곡 작가가 된 계기가 황당하다. 당시 사귀던 여친이 배우였는데 프레스턴을 지루하다고 까대며 "과학자가 기니피그랑 포옹하는 것처럼, 희곡 집필 조사 목적으로 너랑 사귀는 거였다"라고 말하자 화가 나서 "그럼 나도 희곡 쓸 수 있고 흥행시킬 수 있다!"며 첫 희곡 기니피그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진짜로 성공을 거두고 만 것. 나중에 알고 보니 여친은 희곡을 처음부터 쓰지도 않았다고 한다 (...). 프레스턴이 진짜로 믿고 실행하자 놀라면서도 알랑거리는 태도였다고.[7] 참고로 각본상 명칭으로는 첫 수상자다.[8] 정확히는 한번은 무효화돼서 이혼력은 2회.[9] 샌디 스터지스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