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프리데리크 에우게니우시 셰르프케 (Fryderyk Eugeniusz Scherfke) |
생년월일 | 1909년 9월 7일 |
사망년월일 | 1983년 9월 15일 (향년 74세) |
국적 | 폴란드 제2공화국 → 서독 |
출신지 | 독일 제국 포젠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조건 | 182cm | 71kg |
소속팀 | 바르타 포즈난 (1925-1939) 1. FC 포젠 (1940) SG SS 포젠 (1941-1942) |
국가대표 | 11경기 2골 (1935-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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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어린 시절
셰르프케는 독일인으로 독일식 이름은 프리드리히이다. 그의 집안은 농기계 제조업체를 운영했다.셰르프케의 고향 포젠은 그가 태어날 당시엔 독일 제국의 영토였지만 1918년에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면서 포즈난으로 이름이 바뀌고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렇게 셰르프케는 폴란드 국적을 갖게 되었고 폴란드 리그에서 데뷔했다.
그래도 셰르프케는 포즈난에서 가장 큰 독일인 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잠시 아버지의 사업체 관리직을 맡기도 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셰르프케는 1925년, 한살 위의 형 귄터와 함께 바르타 포즈난에서 입단한 후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바르타 포즈난에서 보냈다. 팀은 그가 있던 15시즌동안 엑스트라클라사 우승 1회, 준우승 3회의 성적을 냈고 그도 그동안 131골을 넣어 리그에서 꽤 입지 있는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2.2.2. 국가대표
셰르프케는 1935년 5월 12일, 오스트리아와의 시합에서 처음 폴란드 대표팀에 데뷔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2대5로 오스트리아에 대패했다.셰르프케는 폴란드가 4위를 차지한 1936년 올림픽에 참가해 2경기를 뛰었다. 영국과의 경기에서 입은 갈비뼈 부상으로 인해 셰르프케가 더 이상 경기를 뛰지 못한것이 아쉬웠다. 1938년 월드컵 1라운드 브라질전에서 셰르프케는 에른스트 빌리모프스키가 얻은 페널티 킥을 골로 연결, 1대1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경기는 연장까지 가는 난타전 끝에 브라질이 6대5 승리를 거뒀다.
1938년 9월 25일, 셰르프케의 마지막 A매치의 상대는 라트비아였고 브와디스와프 슈체파니아크의 결장으로 셰르프케가 주장으로 출전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경기에서 라트비아에 1대2로 패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포즈난은 다시 포젠이란 이름으로 독일 영토가 되었고 셰르프케는 혈통대로 독일로 국적을 바꿨다. 나치는 그를 임시 전문가로 고용했고 포젠에 새로 출범한 1. FC 포젠의 선수 겸 회장이 되었다. 그러나 1. FC 포젠이 1940년 10월에 개편되었고 이 때 그는 팀을 떠났다.SG SS 포젠[2]에서 뛰다 클럽이 해산되면서 그는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후 셰르프케는 자동차 수리점을 운영하다 1943년 2월에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었다. 셰르프케는 하사관으로 복무하다 1945년 1월, 유고슬라비아에서 부상을 입었다. 군병원에 입원했지만 그는 4월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셰르프케는 7월에 석방되었지만 그는 포즈난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젠프텐베르크를 거쳐 서베를린에서 30여년간 가구점을 운영했다.
1980년대초에 그는 헤세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키커의 평에 의하면 셰르프케는 신중하고 기술적으로 능숙하며 매우 우아하게 플레이하는 스트라이커였다고 한다.4. 나치 부역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 지하국 언론들은 셰르프케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그의 행적을 크게 비판했다.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에서는 그가 게슈타포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는데 게슈타포의 운전기사로 일했음은 스포츠 백과 사전 등지에도 기재되어 있다.그러나 2001년, 셰르프케의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현대의 목격자와 역사가들은 전쟁의 첫 2년 동안 셰르프케가 몇몇 전직 폴란드 클럽 동료들과 그들의 친척들을 독일 포로에서 구출하거나 강제 노동으로 추방되는 것을 막았다고 신문에 보도했다. 셰르프케는 또한 그의 딸이 나중에 보고한 바와 같이 그의 부모의 폴란드인 변호사와 그의 가족을 추방으로부터 구해냈다. 그러면서 또한 국내군(Armia Krajowa)에 입대했던 전 동료 선수들에게 SS 행동에 대해 경고했으며 그는 폴란드의 조력자로 게슈타포의 표적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