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2:10:37

프리츠 켈러

파일:Fritz Keller.jpg
이름 프리드리히 켈러[1]
(Friedrich Keller)
출생 1913년 8월 21일
사망 1985년 6월 8일 (향년 71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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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스트라스부르
포지션 아웃사이드 포워드,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4cm
등번호 -[2]
소속팀 RC 스트라스부르 (1933-1939)
SG SS 스트라스부르 (1940-1944)
국가대표 8경기 3골 (1934-1937)

1. 생애
1.1. 어린 시절1.2. 선수 생활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사생활4. 수상
4.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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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어린 시절

독일인 아버지와 알자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프리츠 켈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독일 제국의 영토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여 독일 제국은 멸망했고 전쟁이 끝난 후 켈러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카를스루에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카를스루에에서 담배 공장을 경영했다.

12살부터 켈러는 카를스루에 FV의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배웠고 4년 후에 클럽의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1931년, 켈러의 부모는 프랑스로 이주하기로 결심했고 1932년 4월에 카를스루에에서 마지막 시합을 치렀다.

1.2. 선수 생활

1.2.1. 클럽

1932년, 프랑스 축구계가 프로화되면서 리그가 창설될 당시 RC 스트라스부르는 리그에 참가하지 않았고 1933년에 디비지옹 2의 창설 멤버로 리그에 참여했다.

켈러는 1933년 9월 3일, RC 스트라스부르 소속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켈러는 이 시즌에 20골(23경기 출전)을 기록하며 RC 스트라스부르의 승격에 힘을 보탰다. 1934년 8월 25일, 켈러는 디비지옹 1 디펜딩 챔피언팀인 FC 세트와의 데뷔전에서 2골을 넣으며 5대2 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RC 스트라스부르에는 켈러와 함께 오스카르 에세레, 오스카 로어(Oskar Lohr)의 동갑내기 공격편대가 있었고 이들의 활약으로 승격 시즌에 우승팀 FC 소쇼몽벨리아르와의 승점이 1점밖에 차이가 안 나는 깜짝 준우승을 차지했다. 켈러는 21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됨과 동시에 디비지옹 1 득점 순위 6위에 올라 그의 기량이 프랑스 1부 리그에서도 통함을 입증했다.

RC 스트라스부르는 1936년에는 3위, 1937년에는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진출했다. 켈러는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어시스트하고 크로스바를 맞추는 슈팅을 때리는 등 분전했으나 RC 스트라스부르는 FC 소쇼에 1대2로 패해 소쇼의 더블 기록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스트라스부르의 미래는 밝아보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프랑스 리그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켈러의 RC 스트라스부르 생활도 그렇게 끝났다.

켈러는 RC 스트라스부르 소속으로 5시즌동안 디비지옹 1에서 122경기에 출전, 52골을 넣었다.

1940년,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병합된 후 켈러의 많은 동료들은 알자스를 떠났지만 켈러는 알자스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1939년에 이미 레드 스타 스트라스부르에 합류했는데 레드 스타 스트라스부르는 1940년, SG SS 스트라스부르로 이름을 바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SS 스트라스부르는 SS의 입김을 많이 받았고 나치 독일에 충성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어쨌든 켈러는 SS 스트라스부르가 해체되는 1944년까지 활동하면서 1942년의 가우리가 알자스 우승에 공헌하는 등 팀의 대표적인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알자스는 다시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고 켈러와 그의 이전 클럽은 협력을 모색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이후 켈러는 알자스의 아마추어 클럽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기도 했다.

1.2.2. 국가대표

켈러의 대표팀 데뷔전은 1934년 5월 10일에 치러졌던 네덜란드전이었다. 이 시합에서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5대4로 힘겹게 눌렀다.

켈러는 RC 스트라스부르 최초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선수가 되었고 1934년 월드컵에도 프랑스 대표로 선발되었다. 상대는 오스트리아. 켈러는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선발 출전했지만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2대3으로 역전패하며 켈러의 월드컵 나들이는 한 경기로 끝났다.

켈러는 프랑스 대표팀에서 8경기 3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가 1937년 3월에 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그의 동생 쿠르트 켈러(Curt Keller)도 같은 해 10월에 프랑스 대표팀에 소집되었다. 하지만 쿠르트의 소집은 단 한경기에 그쳐 형제가 같이 대표팀에서 뛸 수는 없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아웃사이드 포워드. 켈러는 양발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좌우측면 어디서도 뛸 수 있었고 174cm의 당시로서도 큰 키는 아니었지만 헤딩에 경쟁력이 있어서 센터 포워드로도 뛸 수 있었다.

3. 사생활

켈러의 형제자매는 총 8남매였고 그들 중 알버트, 프리츠, 쿠르트 3형제가 축구 선수로 활약했다. 그 중 프리츠가 가장 축구 재능이 뛰어났다.

4. 수상

4.1. 클럽



[1] 이 항목은 혈통과 피파 경기 보고서에 무게를 둬 독일식 이름인 프리츠 켈러로 작성하였다. 켈러는 프랑스식 이름인 프레데리크 켈레르(Frédéric Keller)로 불리기도 했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