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3 23:23:24

프리틀란트 전투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하일스베르크 전투3.2. 프리틀란트 전투
4. 결과5. 영향

1. 개요

프랑스어: Bataille de Friedland
러시아어: Битва под Фридландом
영어: Battle of Friedland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7년 6월 14일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의 프리틀란트(지금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압승을 거뒀고 러시아는 이 전투로 인해 나폴레옹에 대항할 의지를 상실하고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한다.

2. 배경

1806년 10월 14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괴멸시켰다. 이후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프로이센군 잔당을 대거 사냥했다. 하지만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항복을 거부하고 멀리 동쪽으로 달아나 프로이센을 돕기 위해 진군 중이던 러시아군에 가담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군해 폴란드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일단 후방으로 물러났다.

1806년 겨울, 프랑스군은 이듬해에 있을 대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이때 러시아군의 지휘관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은 프랑스군이 방심한 틈을 타 기습을 가하기로 결정하고 먼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이끄는 제1군단을 습격한 후 나폴레옹 본대의 후방을 위협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계획을 간파하고 역으로 포위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베르나도트에게 향하던 전령장교가 러시아군에게 붙잡히면서 나폴레옹의 계획은 들통났고, 베니히센은 자신이 위험에 빠졌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퇴각했다.

나폴레옹은 후방으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병력을 지나치게 분산시키는 바람에 아일라우 전투에서 수적으로 자신이 이끄는 군대보다 많은 러시아군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에게 매우 고전했고 나폴레옹은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했다. 하지만 조아킴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의 분전과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끄는 제3군단의 합류로 전세는 뒤집혔고, 러시아군은 더이상 전투를 벌이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피해가 전사자 1500 이상에 부상자가 4~5000 사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2만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러시아군은 이보다 적거나 엇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이 먼저 퇴각했고 프랑스는 아일라우를 점령했으니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러시아군을 포위섬멸하려던 전략적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뿐더러 사상자 교환비에서도 그닥 이득을 못보고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으니 러시아군을 격멸한것처럼 선전한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일라우 전투가 끝난 뒤, 나폴레옹은 사령부를 동부프로이센의 핑켄슈타인 성으로 옮기고 군대를 후방으로 후퇴시켜서 봄이 올 때까지 휴식하게 했다. 또한 그는 새로 충원된 프랑스 사단에 폴란드인과 이탈리아인으로 구성된 사단들을 합해 제 10군단을 편성하고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에게 맡겨 단치히 항구를 점령,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게 했다. 이에 러시아군 8천 명이 영국 및 스웨덴 해군의 엄호 아래 단치히에 상륙하려 했으나 르페브르 원수의 노련한 지휘에 힘입은 프랑스 10군단의 맹공격으로 결국 실패하고 약 3천 명의 전상자와 영국 해군 소속 돈틀리스 호를 잃고 패주했다. 결국 단치히 항구는 1807년 5월 24일 조건부 항복을 선언했고, 르페브르는 5월 28일 단치히 공작에 봉해졌다.

한편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아일라우 전투는 사실 나폴레옹의 승리가 아닌 베니히센의 승리였다."는 유언비어를 차단하기 위해 파리의 신문 및 살롱에서의 잡담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병사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들을 검열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 국채 가격이 폭락했고 영국 해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발트해 연안에 대규모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민심은 동요했고 프랑스의 경제는 침체되었다. 나폴레옹은 경제를 어떻게든 활성화시키기 위해 국고에서 매달 50만 프랑을 대형 제조업자들에게 대출해주고, 그렇게 생산된 상품들을 그런 대출에 대한 담보로 정부 창고에 쌓아놓도록 했고, 군용 물자 생산 공장도 더 만들고 튈르리 궁전을 개장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토목공사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보나파르트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을 뜯어냈다. 다만 세금은 올리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주요 지지기반인 중산층의 이반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까지 프랑스를 향한 선전포고를 고려하고 있다는 첩보까지 들어왔다. 나폴레옹으로서는 어떻게든 베니히센의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 러시아와 화친을 맺어야 했다. 그는 실레지아의 요새를 지키던 병력들이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극소수 프로이센 요새들을 포위하고 있던 후방 병력들을 다 소환하여 폴란드 최전선에서의 프랑스군 병력을 16만 명까지 증강시켰다. 그러면서 프로이센 점령지에서의 수비에 필요한 병력을 마련하기 위해 아직 입대할 나이가 되기 전인 소년병들을 1년 더 일찍 징집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수만 명의 소년병들을 배치시켰다. 이 일로 민심이 동요했지만, 나폴레옹은 그들을 고향을 지키는 국민 방위군으로만 활용할 거라고 약속해 이를 무마시켰다.

한편, 베니히센의 러시아군은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막아내고 안전한 후방으로 철수할 수 있었지만 이후 상당한 곤경에 처했다. 프로이센 측이 빼앗긴 영토를 가능한 빨리 되찾고 싶어하며 베니히센을 독촉한 데다 나폴레옹과 밀약을 맺은 오스만 제국이 루마니아 일대에서 러시아를 도발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베니히센으로 가려던 병력을 루마니아 쪽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1807년 6월 경 프랑스군은 16만 명인 반면 러시아군은 10만 명 가량이었고 프로이센 잔여 병력은 1만 5천명에 불과했다. 다만 베니히센 휘하 코작 기병대가 프랑스군 경기병대를 소규모 전투에서 격퇴하고 프랑스군의 배치를 정확히 확인한 덕분에, 베니히센은 나폴레옹에 비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에 베니히센은 적이 공세를 가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급습을 가해 각지에 분산된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하는 것만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6월 5일 공세를 개시했다. 이리하여 한동안 중단되어 있던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의 대규모 전쟁이 재개되었다.

3. 전투 경과

3.1. 하일스베르크 전투

1807년 6월 5일, 베니히센은 6만 3천여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군을 급습했다. 그가 타겟으로 고른 상대는 미셸 네 원수가 지휘하는 17,000명의 제6군단이었다. 당시 6군단은 구트슈타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최전방에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급습하기 용이한 곳이었다. 이때 코작 기병들이 프랑스군의 경기병 정찰대의 활동을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네는 이 사실을 미처 몰랐다. 한편 베니히센은 레스토크 장군이 지휘하는 프로이센 1만 5천 명으로 하여금 베르나도트가 지휘하는 제1군단을 저지하게 했고 독투로프 장군 역시 1만여 병력을 맡겨 장드디외 술트의 제4군단을 견제하게 했다.

하지만 네는 4배가 넘는 적이 습격해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술트 및 다부의 군단들과 연락을 취하며 천천히 후퇴했다. 또한 그는 유격병을 적극 활용하여 러시아군의 추격을 지연시켰고 적이 대규모 작전을 진행하면서 혼란이 발생한 틈을 타 안전한 후방으로 퇴각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400명의 사상자, 2천 명의 포로와 2문의 대포를 잃었지만 전력을 보전할 수 있었던 반면 러시아군은 2천에서 2,5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포위섬멸한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베르나도트는 스판덴전투에서 자신을 견제하려 했던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도중에 머리에 머스켓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제1군단장은 클로드 빅토르 장군이 대신 이끌었다.

베니히센은 원하는 결과를 거두지 못하자 오스텐자켄 장군의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이런 실패가 벌어졌다며 면전에서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격분한 오스텐자켄 장군은 그 자리에서 지휘권을 내놓고 퇴역했다. 그러던 중 카자크 기병들이 탈취한 나폴레옹의 작전 명령서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원래 네 원수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던 그 명령서 내용은 "다부의 제3군단이 베니히센의 퇴로를 끊을 예정이니 그에 대응하여 역습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베니히센은 자칫하다간 포위섬멸당할 것을 우려해 하일스베르크로 후퇴했다. 하지만 그 명령서는 네의 6군단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나폴레옹의 속임수로, 사실 다부의 군단은 아직 멀리 있었다. 나폴레옹은 술트와 뮈라의 군단을 독촉하여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포위섬멸할 것을 명령했다.

6월 8일 하일스베르크에 도착한 베니히센은 이 곳에서 항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보다 전인 4월과 5월 사이에 7개의 보루를 세우고 강 양쪽에 다리 4개를 세워 군대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베니히센은 이곳이라면 프랑스군의 공세를 충분히 격퇴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전군에 농성 준비를 지시했다. 이윽고 6월 10일 오전 8시, 뮈라의 군단이 하일스베르크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기병대와 포병 만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해 전위대를 격파했지만 표트르 바그라티온이 이끄는 러시아 기병대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쳐 결국 오후 2시에 공격을 멈추고 술트의 제4군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도착한 술트는 우세한 포병대를 앞세워 러시아군을 압박했지만 러시아군 역시 만만치 않은 반격을 가했다. 뮈라는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여러 차례 돌격을 이끌었지만 러시아 흉갑 기병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적을 몰아붙였다. 뮈라는 혼전 중에 말이 산탄을 맞고 고꾸라지는 바람에 낙마했지만 서둘러 주인 잃은 군마를 잡아 타고 다시 공격을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사바리 장군이 이끄는 병력을 추가로 파견해 고전하고 있는 뮈라를 돕게 했지만, 하일스베르크에 9만 명이 결집한 러시아군에 비해 프랑스군은 5만 명도 안되었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만약 뮈라가 도착하자마자 공세를 개시하지 않고 추가 병력이 모두 당도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용감하지만 무식했던 뮈라는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바람에 일을 그르칠 지경에 처했다.

그러던 6월 10일 밤 9시, 란의 제5군단이 하일스베르크에 도착했다. 날이 어두워져 전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그날의 전투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병력을 더 모아 다음날 전투를 재개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뜻밖에도 란에게 야간 공격을 지시했다. 이에 란은 공격을 개시했지만, 보루에서 산탄 포격과 머스켓 사격을 퍼붓는 적의 반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밤 11시, 란은 살아남은 병사들을 수습해 후방으로 퇴각했다. 다음날 아침,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언덕 위 보루들을 사수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고뇌하다가 다부의 제3군단을 우회시켜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으로 이동시킴으로서 베니히센의 러시아군을 고립시키기로 했다. 베니히센은 하루를 더 버티다가 다부의 군단이 후방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밤 중에 조용히 철수해 다리를 건넌 뒤 다리를 불태우고 철수했다.

하일스베르크 전투는 '제2의 아일라우 전투'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두 군에게 씁쓸한 결과를 남겼다.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8천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그보다는 조금 적었다. 똑같은 극심한 피해를 받았지만 진지를 지켰던 러시아 군의 간발차의 승리로.. 볼 수도 있었으나, 바로 다음날 전선의 다른 측면이 위협받아 결국엔 참호를 비워주고 후퇴한 러시아 군에게도 결국 이 전투는 무의미한 일이 돼버렸다. 나폴레옹은 진지를 포기하고 물러서는 러시아군이 쾨니히스베르크로 철수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며 이를 향한 진격을 재개했다.

3.2. 프리틀란트 전투

6월 12일 하일스베르크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곧바로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향한 추격전을 개시했다. 그는 프랑스군을 두 개로 나눠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으로의 공세와 러시아군 추격을 맡겼다.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으로 출정한 프랑스군은 다부의 제3군단과 술트의 제4군단, 그리고 뮈라의 예비 기병대였고 알레 강을 따라 철수하고 있는 러시아군 추격을 맡은 프랑스군은 네의 제6군단과 모르티에의 제8군단, 빅토르의 제1군단, 그리고 란의 제5군단이었다.

한편, 베니히센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아일라우와 하일스베르크에서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과를 거둔 것에 기뻐했지만, 부하들은 그의 지휘를 상당히 불만스러워했다. 아일라우 전투와 하일스베르크 전투 모두 베니히센이 이전에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산된 적을 습격한다"는 이유로 공세를 개시했다가 적에게 포위섬멸될 위기에 놓이자 황급히 후퇴하던 중 벌어진 전투였기에 그다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부하들은 두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상대보다 우세한 전과를 거둔 건 베니히센의 작전이 뛰어난 게 아니라 러시아 병사들의 용기와 인내심 덕분이었다고 여겼다. 베니히센은 이러한 부하들과 갈등을 빚은 데다 자꾸만 후방으로 밀려나기만 하는 것에 반발한 프로이센 측의 항의, 러시아 본국의 미비한 지원, 그리고 담석증에 걸린 몸상태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러던 1807년 6월 13일, 란 휘하의 경기병 부대가 알레 강 서안에 있는 프리틀란트 인근에 있던 러시아군 탄약 저장고를 발견하고 공격해 이 곳을 지키던 러시아 소부대를 격퇴했다. 그러자 러시아군은 그날 밤 반격을 가해 프랑스 경기병대를 급습했다. 프랑스 경기병 일부는 사로잡혔지만 나머지는 란의 본대에 합류해 러시아 대군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때 란은 하일스베르크에서 뮈라가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린 뒤 자신은 프리틀란트에서 방어 대형을 갖추고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한편, 알레 강 동편에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고 있던 베니히센은 프리틀란트 인근에서 아군이 프랑스군 경기병대와 전투를 벌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곧 알레 강 서편에 자리잡은 프랑스군이 란의 제5군단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때 주변의 압박과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정신적 압박이 극에 달했던 베니히센은 이번에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겠다고 판단하고 전군에 강을 도하하여 강 건너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러시아군은 그날 밤 안으로 프리틀란트 바로 앞에 3개의 부교를 놓고 프리틀란트로 대거 투입되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3일 전 하일스베르크 전투를 치른 후 이틀 동안 55km를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베니히센은 수적인 우위만 믿고 란이 이끄는 프랑스 1개 군단을 서둘러 해치운 후 철수할 수 있다고 과신해 버렸다.

6월 14일 새벽, 3개의 부교를 건너 프리틀란트에 들어온 러시아군 5만 명이 란의 제5군단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란에게는 9천 명의 보병대와 3천 명의 기병이 있었는데, 이 정도로는 4배가 넘는 적을 막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온갖 곤경을 헤쳐나가며 전투라면 이골이 나 있던 란은 병사들을 훌륭히 통솔하여 조금씩 후퇴하면서도 전열을 유지하는 솜씨를 발휘했고, 단숨에 적을 섬멸하려던 베니히센의 계획은 점차 꼬여갔다. 여기에 그루시의 용기병대와 낭수티의 흉갑기병대 등 총 5천 명이 도착하면서 5군단의 숨통이 트였다. 그루시와 낭수티는 프리틀란트 북서쪽의 하인리히스도르프 마을을 점거한 후 5군단을 포위하려던 러시아군 기병대를 저지했다.

파일:Friedland_mazurovsky.jpg
하인리히스도르프 마을 인근에서 맞붙은 프랑스군 기병대와 러시아군 기병대.

6월 14일 아침, 베니히센은 프리틀란트 평원에 5만여 병력을 배치하고 최종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이때 모르티에의 사단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의 병력은 4만에 이르렀다. 베니히센은 이 순간 일이 틀어졌다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등을 돌려 달아나자니 서둘러 지어서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3개의 부교를 건너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군대에 총공격 명령을 내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철수하라는 지시도 내리지도 않은 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이윽고 그날 정오에 나폴레옹이 현장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상황을 살펴보고 드디어 적을 섬멸할 기회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마침 6월 14일이 마렝고 전투가 벌어진 날이었기에, 나폴레옹은 주변 참모들에게 "이번 전투는 마렝고 전투 못지 않은 대승으로 끌날 것"을 장담했다. 또한 네와 빅토르가 이끄는 군단까지 도착하면서, 프랑스군의 전력은 적을 압도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오후 5시, 나폴레옹의 공격 신호가 떨어졌다. 프랑스군의 우익을 맡은 네는 나폴레옹으로부터 "귀관의 오른쪽이나 왼쪽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신경쓰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돌격하라."라는 명령을 받자 러시아군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였고 중앙의 란과 우익의 모르티에는 러시아군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틀어막는 역할을 수행했다. 네의 공세에 직면한 러시아군은 프리틀란트 시가지로 밀려났다. 표트르 바그라티온은 진형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의 사단 측면을 향해 기병대를 출격시켰고, 이에 더해 강 건너편의 러시아 포병대의 공격으로 인해, 네의 제1선 부대들은 이 거센 반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로 밀려났다. 네는 말 위에 올라 전장을 누비며 부하들을 불러 모은 뒤, 최후의 일격을 벼르며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빅토르의 제1군단에 바그라티온을 밀어낼 것을 지시했고, 이에 빅토르는 러시아의 전위근위대를 향해 진격했다. 이 때 빅토르의 군단에 소속된 세나르몽의 포병 운용은 기상천외했는데, 그는 포병대에게 "action front!(앞으로 전진!)"이란 명령을 내렸다. 명령대로 포병대는 둘로 나누어서 절반이 엄호 사격을 하는 사이 나머지 절반이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하였고, 러시아군에 최대한 근접한 후 빠르게 방열하여 포화를 퍼부었다. 엄호 사격을 하던 포병대도 다시 전진해서 포화를 퍼부었다. 멀리서 지켜 보던 나폴레옹조차도 처음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라서 포병대가 러시아군에게 투항하려는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프랑스군 포병대는 밀집대형으로 편성되었던 러시아군 보병대를 향해 영거리에서 포화를 퍼부어댔고, 결국 러시아 병사들은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곡사포 포대를 집결시켜 3개 부교와 프리틀란트 시가지를 향해 포탄을 퍼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시가지는 불길에 휩싸였고 시가지로 밀려났던 러시아군은 이 화염에 휩쓸렸다. 베니히센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마지막으로남은 예비대인 황실근위대를 투입했다. 프랑스군 포병대가 그들을 향해 산탄 세례를 퍼부었지만, 황실근위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뒤퐁의 사단을 향해 공격했다. 그러나 뒤퐁의 사단은 자신들보다 몸집이 큰 근위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총탄을 퍼붓다가 적이 근접해오자 총검돌격을 개시했다. 근위대는 이에 동요하여 전열을 무너뜨린 채 시가지로 패주했다.

그 직후, 전열을 재정비한 네의 군단이 공세를 재개했다. 이로 인해 포위섬멸될 상황에 몰리자, 많은 러시아군 병사들이 부교와 용케 찾은 여울목을 통해 알레 강을 건너 도주했으나, 수천명의 병사들이 등 뒤에서 날아오는 프랑스군의 포탄과 총탄에 쓰러졌고, 또 그를 피해 강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베니히센은 용케 말을 타고 여울목을 건너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나, 적지 않은 러시아군 장군들도 이날 포로가 되었다. 이로서 나폴레옹은 마침내 그토록 고대했던 러시아군 섬멸을 달성했다. 한편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던 프로이센 국왕과 신하들은 프리틀란트에서의 참담한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러시아로 도주했고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얼마 후에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고 항구에 정박한 러시아 화물선 200척을 노획했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야전군 전체가 4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이 적재되어 있었으며 많은 대포와 영국제 머스킷 소총 6만정도 함께 획득했다.

4. 결과

파일:800px-Napoleon_friedland.jpg
프리틀란트 전장에 선 나폴레옹.

프리틀란트 전투는 나폴레옹이 직접 치른 역대 전투들 중 가장 뛰어난 승리 중 하나로 기억되게 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사상자는 8천여 명이었던 데 반해, 러시아군의 사상자 및 포로는 약 3만여 명에 달했다. 이로서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여지를 상실해 버렸다. 이렇게 비참하게 패주한 베니히센은 부하들의 맹비난을 받았고 차르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마저 잃었다. 그후 그는 퇴역했다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에 겨우 지휘권을 잡을 수 있었다.

5. 영향

6월 20일, 뮈라의 기병군단은 네만강에 이르러 러시아로 쳐들어갈 태세를 보였다. 이에 알렉산드르 1세는 최종적인 강화조약 체결에 앞서 휴전을 요청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6월 25일, 러시아 차르는 틸지트에서 나폴레옹을 만나 며칠간 평화 협상을 논의했다. 이후 양측은 강화조약 체결과 영토 분할을 성사시키며 화해했지만, 프로이센은 교섭에서 제외된 데다 엘베강 동쪽의 모든 영토와 폴란드 지방들을 잃는 수모를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틸지트 조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