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4 21:49:48

피에르 드 몽페랑

성명 피에르 드 몽페랑
Pierre de Montferrand
생몰년도 1410년 ~ 1454년 7월 14일
출생지 가스코뉴 공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아버지 베르트랑 3세 드 몽페랑
어머니 이자벨 드 드 프레삭
아내 랭커스터의 메리
자녀 프랑수아 드 몽페랑
직위 레스파레 영주(자칭), 수단 드 라 트라베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프랑스 왕국의 지배로부터 가스코뉴를 독립시키기 위해 잉글랜드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프랑스군에 체포된 뒤 처형되었다.

2. 생애

1410년경 가스코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베르트랑 3세 드 몽페랑은 랑고이랑과 몽페랑의 영주였으며, 어머니 이자벨 드 프레삭은 레스파레의 영주였다. 그는 어머니의 영지였던 레스파레의 영주를 자처했지만,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존 홀랜드에게 레스파레를 수여했으며, 샤를 7세는 알브레 가문의 영지로 인정했다. 한편, 그는 가문의 영지를 묶어서 스스로를 '수단 드 라 트라베(sudan de la Trave)'로 칭했다. 또한 베드퍼드 백작 존의 사생아인 랭커스터의 메리와 결혼했고, 장인으로부터 500리브르의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장인이 이를 시행하기 전에 사망했기에 무산되었다.

1451년, 장 드 뒤누아자크 1세 드 샤반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당시 피에르가 보안관을 맡고 있던 루델 성을 포위했다. 피에르는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지만,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 포병대가 5월 21일에 대규모 포격을 가하면서 성벽이 무너지자 600명의 장병들을 이끌고 성채로 피신한 뒤 항전을 이어갔지만 결국 5월 24일에 항복했다. 그는 체포된 뒤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석방되었다. 그 후 1451년 6월 30일 장 드 뒤누아에게 보르도를 넘기는 조약을 체결한 귀족 대표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떻게든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 가스코뉴를 해방하고 싶어 했다.

그는 비밀리에 잉글랜드로 가서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헨리 6세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을 파견하기로 했고, 피에르는 1452년 10월 16일 술락쉬르메르에 존 탈보트와 함께 상륙한 뒤 보르도에 무혈 입성한 후 가스코뉴 서부 일대가 잉글랜드에 도로 충성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존 탈보트가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반격에 대비해 방비 대책을 세우는 데 협조했으며,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카스티용 전투에서 존 탈보트가 전사하고 잉글랜드군이 대거 전사하자,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보르도로 후퇴한 뒤 탈보트의 뒤를 이어 지휘를 맡은 잉글랜드의 세네샬 로저 카모이스의 지시에 따라 보르도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후 보르도 수비대는 도시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3개월간 악전고투했지만, 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결국 10월 19일에 항복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해 추방당했고, 라 트라베 성이 압수되어 게로 달브레에게 넘어갔다.

파일:피에르 드 몽페랑의 처형.jpg

피에르는 런던으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프랑스 왕국에 추방된 가스코뉴인들을 끌어모아서 가스코뉴를 해방하기 위한 새로운 원정대를 조직했다. 1454년 초, 그는 메독 해안에 상륙한 뒤 레스파레에 도달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프랑스군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푸아티에로 이송된 뒤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454년 7월 14일 샤를 7세의 칙령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푸아티에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몸은 6등분되었고, 팔 다리는 푸아티에 성문 위에 매달렸다. 그의 미망인인 메리는 잉글랜드에 남아서 헨리 6세가 수여하는 적은 연금으로 연명했다. 아들 프랑수아 드 몽페랑은 1472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로부터 가족의 토지와 영주권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