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2 09:42:50

피에르 2세 달랑송

성명 피에르 2세 달랑송
Pierre II d'Alençon
생몰년도 1340년 ~ 1404년 9월 20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알랑송
사망지 프랑스 왕국 아르장탕
아버지 샤를 2세 달랑송
어머니 마리 드 라 세르다
형제 샤를 3세, 필리프, 이자벨, 로베르
아내 마리 샤마이야르
자녀 장 1세, 마리, 카트린, 마르그리트
직위 알랑송 백작, 페르셰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생애

1340년경 프랑스 왕국 알랑송에서 알랑송 백작 샤를 2세 달랑송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영주 페르난도 2세 데 라 세르다의 막내딸인 마리 드 라 세르다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샤를 3세[1], 필리프[2], 이자벨[3], 로베르[4]가 있었다. 그는 1350년부터 기사가 되었고,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생포된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대신해 1360년 잉글랜드로 보내진 인질 중 한 명이 되었다.

1370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동생인 장 드 베리의 부대에 입대한 뒤 남동생 로베르와 함께 아키텐에서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은 리모주를 공략했지만, 1371년 우손 공략에 실패했다. 1373년 프랑스 무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 휘하에 들어가 브르타뉴 전선에서 싸웠지만 엔봉 공방전 중에 부상을 입었다. 1375년 형 샤를 3세가 사망한 뒤 알랑송 백작이 되었으며, 1377년 남동생 로베르가 자손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한 뒤 로베르의 영지였던 페르셰 백작령을 자기 소유물로 가져갔다. 1382년 동프홍 성을 개조했다.

1386년, 그는 자신의 시종 장 드 카루주와 종자인 자크 르 그리의 분쟁에 직면했다. 그해 1월, 장 드 카루주는 스코틀랜드 원정에 봉사해서 입은 재정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변제를 부탁하려 했다. 이때 그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티부빌을 어머니가 있는 코포메닐로 보냈다. 얼마 후, 자크 르 그리의 친구이자 하인인 아담 루벨이 코포메닐로 찾아와서 마르그리트에게 자크 르 그리가 그녀를 사랑한다며 만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자크 르 그리가 직접 찾아와서 비밀을 준수하고 상당한 보상을 줄 테니 성관계를 갖자고 제안했다. 마르그리트가 이번에도 거부하자, 자크 르 그리는 그녀를 강간했다.

이후 파리에서 돌아온 장 드 카루주는 아내 마르그리트에게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듣고 격분해 주군인 피에르 2세에게 자크 르 그리를 처형해달라고 요청했다. 피에르 2세가 자크 르 그리를 불러 추궁하자, 그는 자신이 그 당시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을 불러서 마르그리트의 증언을 반박했으며, 평민이었던 자신이 백작의 종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장 드 카루주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켰을 거라고 주장했다. 피에르 2세는 고심 끝에 자크 르 그리를 종자에서 해임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장 드 카루주는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파리 의회에 이 사건을 재소했다. 그러면서 샤를 6세에게 결투 재판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얻어냈다. 결투 재판은 1386년 12월 29일에 파리에서 열렸고, 샤를 6세와 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 드 카루주가 자크 르 그리를 처단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 결투 재판은 프랑스에서 열린 마지막 공식 결투 재판이었고, 21세기 들어 대중역사서 및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로 만들어져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벤 애플렉이 피에르 2세 역을 맡았다.

1388년, 피에르 2세는 샤를 6세가 헬러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를 상대로 원정을 벌일 때 참여했다. 1404년 9월 20일 아르장탕에서 사망했고, 페잉스의 샤르트뢰즈 뒤 발디외에 묻혔다. 1865년 수도원 예배당 폐허에서 발굴된 그의 유해는 페르셰의 르 팽라가 교회에 옮겨졌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곧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져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던 2013년 10월 2일, 르 팽라가 교회 지하실에서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뼈가 발견되었다. 2017년 11월 18일, 그의 유골은 생 바르텔레미 교회에 재안장되었다.

3. 가족

  • 마리 마리 샤마이야르(1345 ~ 1425): 안테나이즈 영주 기욤 2세 샤마이야르의 딸.


[1] 1337 ~ 1375, 알랑송 및 페르셰 백작[2] 1338 ~ 1397, 루앙 대주교,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오스티아와 사비나 주교[3] 1342 ~ 1379, 수녀[4] 1344 ~ 1377, 페르셰 백작[5]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