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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비어즐리

피터 비어즐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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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984-85 · 1985-86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1986-87 · 1987-88 · 1989-90 · 19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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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축구 감독
파일:Peter Beardsley Newcastle.jpg
<colbgcolor=#eeeeee> 이름 <colbgcolor=#fff,#1F2023> 피터 비어즐리
Peter Beardsley, MBE
본명 피터 앤드류 비어즐리
Peter Andrew Beardsley
출생 1961년 1월 18일 ([age(1961-01-18)]세)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헥섬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직업 축구 선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칼라일 유나이티드 FC (1979~1982)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198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2~1983)
밴쿠버 화이트캡스 FC (198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83~1987)
리버풀 FC (1987~1991)
에버튼 FC (1991~199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3~1997)
볼턴 원더러스 FC (1997~1998)
맨체스터 시티 FC (1998 / 임대)
풀럼 FC (1998 / 임대)
풀럼 FC (1998)
하틀리풀 유나이티드 FC (1998~1999)
멜버른 나이츠 FC (1999)
감독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99~2000 / 수석코치)
뉴캐슬 유나이티드 U-21 (1999~2010 / 수석코치)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10 / 임시감독)
뉴캐슬 유나이티드 U-21 (2010~2019)
국가대표 59경기 9골 (잉글랜드 / 1986~1996)
1. 개요2. 경력
2.1. 선수 경력2.2. 감독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3.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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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경력

2.1. 선수 경력

2.1.1. 클럽 경력

2.1.1.1. 초기 경력
비어즐리는 유소년 시절 노스 타인사이드에 위치한 월센드 보이즈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이후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합류했다. 1977년, 비어즐리는 월센드 보이즈 클럽의 동료였던 스티브 브루스와 함께 3부 리그 클럽 길링엄에서 시험을 봤다. 길링엄은 브루스를 견습 선수로 계약했지만, 비어즐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번리와 케임브리지 유나이티드에서도 시험을 봤지만 실패했다.

결국 비어즐리는 1978년에 칼라일 유나이티드 FC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리그 경기 104경기에서 22골을 기록하며 1981-82 시즌 말에 팀이 2부 리그로 승격하는 데 기여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그는 캐나다 클럽인 밴쿠버 화이트캡스 FC에서 북미 축구 리그 시즌 3시즌을 보냈고, 그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리그 컵 경기 한 경기만 출전하며 1군에 자리 잡지 못했다. 결국 1983년 9월, 그는 다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했다.
2.1.1.2.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83년 9월 23일, 비어즐리는 15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2부 리그의 뉴캐슬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그는 이적 다음 날에 열린 오크웰에서의 반즐리 FC와의 경기에서 뉴캐슬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비어즐리는 뉴캐슬 팬들에게 즉각적인 인기를 얻으며 멋진 골을 넣고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는 마지막 시즌을 선수로 뛰는 케빈 키건이 주장으로 있는 팀 동료들과 함께 승격을 축하했다. 그들은 우승 팀인 첼시 FC와 준우승 팀인 셰필드 웬즈데이 FC에 이어 최종 승격 자리를 차지했다. 비어즐리는 그 시즌 리그에서 20골을 넣으며, 리버풀에서 주요 우승을 거둔 전 잉글랜드 스트라이커 키건과 흥미로운 공격 조합을 형성했다. 비어즐리는 1983년 10월 19일, 닌이안 파크에서 열린 카디프 시티 FC와의 경기에서 뉴캐슬 소속으로 첫 골을 기록했다. 그의 첫 번째 세인트 제임스 파크 골은 다음 경기인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경기에서 나왔습니다. 뉴캐슬은 시티를 5-0으로 이겼고, 비어즐리는 자신의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비어즐리는 1부 리그 첫 시즌에서 38경기 17골을 기록했고, 뉴캐슬은 리그 14위로 시즌을 마쳤다. 여기에는 1월 1일, 지역 라이벌인 선덜랜드 AFC과의 홈 경기에서 3-1로 승리한 경기에서의 해트트릭도 포함된다. 다음 시즌 동안, 비어즐리는 뉴캐슬의 42경기 모두에 출전하며 19골을 기록했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의 한 경기에서는 골키퍼로 대체 출전했으며, 경기는 뉴캐슬이 8-1로 패배했고, 비어즐리는 마지막 세 골을 허용했다.

1986년 FIFA 월드컵에서 돌아온 후, 비어즐리는 고군분투하던 뉴캐슬이 1986-87 시즌에 강등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팀은 결국 17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는 그 시즌 36경기에서 5골만 기록했지만, 국가대표팀에서 6경기에 추가 출전했다. 리버풀의 감독 케니 달글리시는 비어즐리를 위해 뉴캐슬에 당시 기록적인 190만 파운드의 제안을 했고, 감독 윌리 맥폴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비어즐리는 타인사이드에서 4시즌 동안 리그에서 61골을 기록한 후, 1987년 7월 14일 머지사이드로 이적하게 되었다.

12년 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비어즐리를 위해 200만 파운드를 제안했지만, 맥폴이 그 제안을 거절했고, 퍼거슨이 300만 파운드를 제안하더라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는 그를 팔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2.1.1.3. 리버풀 FC
비어즐리는 왓포드의 윙어 존 반스와 동시에 리버풀에 합류했다. 두 선수는 전 시즌에 영입된 존 올드리지와 함께 1987년 8월 15일, 1987-88 시즌 개막전 하이버리에서 열린 아스날 FC과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알드리지는 9분 만에 골을 넣었고, 리버풀은 2-1로 승리했다. 비어즐리와 알드리지의 새로운 스트라이커 파트너십은 1980년대 영국 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파트너십 중 하나로 꼽히는 달글리시와 이안 러쉬의 오랜 파트너십을 대체했다. 러시는 세리에 A의 유벤투스로 떠났고, 플레이어 매니저인 달글리시는 1987년부터 1988년까지 1군 경기에 간헐적으로 출전하기로 결정한 후, 1990년 8월에 선수로서 은퇴했다.

비어즐리는 1987년 8월 29일 하이필드 로드에서 열린 코번트리 시티 FC와의 경기에서 리버풀 소속으로 첫 골을 기록했으며, 리버풀은 4-1로 승리했다. 그는 리버풀이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리그 29경기 무패 기록을 세우는 데 기여했으나, 1988년 FA컵 결승전에서 윔블던 FC에게 1-0으로 패해 더블에는 실패했다. 이 경기에서 비어즐리가 득점했으나, 심판이 이전 파울로 인해 리버풀에게 프리킥을 주면서 골이 취소되었다. 올드리지는 후반전에 페널티를 실축하기도 했다. 비어즐리는 리그 첫 시즌에 15골을 넣어, 올드리지에 이어 팀 내 득점 공동 2위를 기록했습니다.

1988년 러쉬가 클럽으로 복귀하면서 리버풀은 다음 해 FA컵을 우승했지만,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아스날 FC에 패해 리그 챔피언십을 놓쳤다. 러쉬는 부상으로 14경기를 놓쳤지만, 리버풀의 세 스트라이커가 모두 건강할 때, 달글리시는 비어즐리, 알드리지, 러시를 함께 출전시키는 4-3-3 포메이션을 사용했다. 비어즐리는 그 시즌 리그에서 11골을 기록했다.

1989년 4월, 힐스버러 참사로 96명의 리버풀 팬이 목숨을 잃은 후, 비어즐리는 많은 리버풀 선수들과 함께 참사에 깊이 상심하여 여러 장례식에 참석하고 병원에 입원한 부상자들을 방문했다. 그는 그 시즌 팀의 FA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에버튼 FC를 3-2로 꺾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날 아스날에게 마지막 순간에 골을 허용하면서 리그 타이틀을 놓쳤다.

1989-90 시즌 초반 몇 주 동안 올드리지가 떠나자, 달글리시는 다시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하여 비어즐리와 러쉬를 주요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비어즐리는 29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다. 리버풀은 그 시즌 챔피언십을 다시 차지했지만, 이스라엘 출신 스트라이커 로니 로젠탈의 영입으로 인해 비어즐리의 1군 출전 기회는 제한되었다. 비록 UEFA가 1990-91 시즌에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회 출전을 허용했지만, 리버풀은 헤이젤 참사로 인한 추가 징계로 인해 유럽 대회에 출전할 수 없었다.

비어즐리는 1991년 1월, 케니 달글리시가 데이비드 스피디를 영입하면서 또 한 번의 출전 기회를 잃었다. 달글리시는 그 다음 달 사임하고 몇 주 후에 리버풀의 전 선수였던 그레이엄 수네스가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비어즐리는 그 시즌 27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했으며, 그 중 세 골은 1990년 9월 1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과의 리그 경기에서 기록되었고, 또 다른 두 골은 일주일 후 에버튼 FC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기록되었다.

비어즐리의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리그 골은 1990년 11월 17일, 코번트리 시티와의 경기에서 1-0 승리를 이끈 골이었다. 그는 시즌 초반에 리그에서 인상적인 11골을 기록했지만,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추가 골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달글리시가 새 스트라이커를 영입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비어즐리의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경쟁 경기 골은 1991년 2월 20일 굿디슨 파크에서 열린 FA컵 5라운드 첫 재경기에서 에버턴을 상대로 기록되었으며, 경기는 4-4 무승부로 끝났다. 이 경기는 달글리시가 갑작스럽게 사임하기 전 리버풀의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그 시즌 리버풀은 리그 선두에 있었으나, 새해에 아스날에게 추월당하며 시즌 종료 시 타이틀을 내줬다. 시즌 종료 후, 290만 파운드의 기록적인 이적료로 딘 손더스가 영입되면서 비어즐리의 앤필드에서의 날들이 더욱 줄어들었다.

비어즐리는 리버풀에서의 커리어 동안 175경기에 출전해 59골을 기록했으며, 그의 비전, 재치, 그리고 활발한 경기 스타일로 앤필드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2006년 리버풀 축구 클럽 웹사이트에서 전 세계 11만 명 이상의 팬들이 투표한 '리버풀을 뒤흔든 100명의 선수' 투표에서 19위를 차지했다.
2.1.1.4. 에버튼 FC
리버풀의 라이벌인 에버튼은 1991년 8월 5일, 30세의 비어즐리를 £100만에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8월 17일 시티 그라운드에서 열린 노팅엄 포레스트 FC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에버튼은 2-1로 패배했다. 비어즐리는 에버튼에서 81경기에 출전해 25골을 기록했지만, 그가 있는 동안 구단은 리그에서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했고, 컵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에버턴에서 비어즐리는 데이비드 존슨과 함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양팀 모두를 위해 득점한 두 명의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구디슨 파크에서 첫 시즌을 마칠 때 클럽의 최고 득점자로 마무리했으며, 두 번째 시즌에도 그의 역동적인 기량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하지만 에버튼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전 소속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가 비어즐리를 위해 £150만을 제안하자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비어즐리는 에버턴에서 총 95경기에 출전해 32골을 기록했다.
2.1.1.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3년 7월 16일, 비어즐리는 £150만에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복귀했으며, 그의 옛 동료이자 스트라이크 파트너였던 케빈 키건 이제는 감독이었다. 뉴캐슬은 막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되었고, 1993-94 시즌에는 3위를 차지해 UEFA컵에 진출했다. 비어즐리는 총 25골을 기록했으며, 그의 스트라이크 파트너 앤디 콜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41골을 기록해 클럽 기록을 세웠다. 그는 클럽에서 추가로 4년을 더 뛰었으며, 1996년에는 거의 프리미어 리그 타이틀을 차지할 뻔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 다음 해에도 뉴캐슬은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1996-97 시즌에는 리그 선두를 유지하지 못하고 키건이 중도에 사임하면서 어려운 시즌을 보냈습니다. 키건의 뒤를 이어 케니 달글리시가 감독이 되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의 두 번째 기간 동안 그는 157경기에 출전해 56골을 기록했고, 두 차례 뉴캐슬에서 총 321경기에 출전해 117골을 기록했다.
2.1.1.6. 후기 경력
1997년 8월 18일, 비어즐리는 £45만에 볼턴 원더러스 FC에 합류했으며, 21경기에 출전했지만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된 지 한 시즌 만에 강등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맨체스터 시티 FC로 임대되어 6경기를 뛰었습니다. 이 임대로 비어즐리는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두 팀 모두에서 뛰었던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전 감독 케빈 키건이 이끄는 풀럼 FC으로 이적해 두 차례 임대 기간 동안 28경기에 출전한 후 영구 이적했다. 이후 하틀풀 유나이티드 FC로 자유 계약으로 이적해 3부 리그에서 22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셔널 사커 리그 클럽 멜버른 나이츠에서 두 경기를 뛰고 38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의 20년간의 프로 경력 동안, 비어즐리는 659경기에 출전해 210골을 기록했으며, 모든 대회를 통틀어 799경기에 출전해 238골을 기록했다. 그는 리버풀에서 세 개의 주요 트로피를 획득했으며,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59번 출전해 9골을 기록했다. 또한, 커리어 초반 두 번의 승격을 경험했지만, 1982년 칼라일이 승격을 확정짓기 직전에 이적했다.

2012-13 시즌 동안, 비어즐리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리저브 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캠브리지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출전하여 캠브리지 창립 100주년을 기념했다.

2.1.2. 국가대표 경력

비어즐리는 1980년대 후반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고, 스트라이커 개리 리네커와 짝을 이루었다. 리네커는 비어즐리를 "내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파트너"라고 묘사했다.

1986년 1월 29일, 비어즐리는 카이로에서 열린 이집트와의 친선 경기에서 리네커를 대신해 교체 투입되며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그의 첫 골은 1986년 5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멕시코와의 친선 경기에서 나왔으며, 잉글랜드는 다가오는 멕시코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이 대회에서 7골을 기록했는데, 이 중 6골은 리네커가 기록해 골든 부트를 수상했고, 나머지 1골은 비어즐리가 2라운드 파라과이와의 경기에서 넣었다. 잉글랜드는 결승전 첫 두 경기에서 득점을 하지 못했지만, 비어즐리가 첫 선발 출전한 세 번째 경기에서 폴란드를 3-0으로 이겼다. 다음 경기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두 골을 넣어 잉글랜드를 2-1로 이기고 탈락시켰다. 비어즐리는 그 경기에서 풀타임으로 뛰었고, "세기의 골"을 기록한 마라도나에게 제쳐진 다섯 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

비어즐리는 잉글랜드 팀에서 자리를 유지하며 유로 1988과 1990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는 1988년 2월 17일, 이스라엘과의 친선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비어즐리는 1990년 말, 리버풀에서 정기적으로 출전하지 못하게 되던 시기에 잉글랜드 감독 그레이엄 테일러에 의해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비어즐리는 유로 92에서 잉글랜드의 실망스러운 성적과 1994년 월드컵 예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테일러 감독에게 지속적으로 외면받았다.

뉴캐슬로 돌아온 후, 비어즐리는 1994년 초 신임 감독 테리 베너블스에 의해 잉글랜드 대표팀에 다시 발탁되었고, 1996년까지 뉴캐슬에서 뛰면서 국제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는 유로 1996을 앞두고 예비 25인 명단에서 데니스 와이즈제이슨 윌콕스와 함께 최종 22인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며, 총 59회의 출장과 9골을 기록했습니다.

2.2. 감독 경력

비어즐리는 선수 경력을 마친 후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코칭 스태프로 합류했다. 1999년 초, 그는 글렌 호들 감독이 해임된 후 케빈 키건이 임명되기 전까지 하워드 윌킨슨의 임시 잉글랜드 감독 기간 동안 수석 코치를 맡았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 열린 친선 경기에서 세계 챔피언 프랑스와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2003년, 비어즐리는 뉴캐슬 유소년 선수 두 명을 괴롭혔다는 주장으로 프리미어 리그 조사의 대상이 되었지만, 혐의가 벗겨졌다. 2018년 1월에도 비어즐리를 상대로 괴롭힘 혐의가 다시 제기되었다.

글렌 로더가 뉴캐슬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한 2006년, 비어즐리는 뉴캐슬을 떠났다. 그는 뉴캐슬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어즐리는 이후 클럽에서 미디어 역할을 맡았다. 2007년, 그의 전 에버튼 감독인 하워드 켄달은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비어즐리를 그의 수석 코치로 언급했다. 2008년 1월, 키건이 두 번째로 뉴캐슬 감독직을 맡으면서 비어즐리가 다시 뉴캐슬에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2009년 3월, 비어즐리는 뉴캐슬 아카데미 코치로 재임명되어 주로 젊은 스트라이커들과 함께 일했다. 2010년 7월 27일, 그는 리저브 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2월 6일, 크리스 휴튼이 해임된 후, 비어즐리는 잠시 팀을 임시로 이끌었고, 그 후 알란 파듀가 휴튼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 1월, 비어즐리는 인종 차별 혐의로 인해 뉴캐슬에 의해 휴직 처분을 받았다. 2019년 3월, 뉴캐슬은 그가 클럽을 떠났음을 확인했고, 축구 협회는 이후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한 혐의로 세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2019년 9월, 그는 선수들에게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32주 동안 모든 축구 관련 활동에서 정지되었다. 비어즐리는 유죄 판결에 "놀랍고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FA 패널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모욕을 주었다"고 말했으나, 비어즐리가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패널은 "비어즐리가 인종이나 민족적 이유로 사람들에게 악의적으로 대하는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님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