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L. 질레트 Phillip L. Gillette | |
한국이름 | 길례태(吉禮泰)[1] |
출생 | 1872년 10월 21일 |
일리노이주 | |
사망 | 1938년 11월 26일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기독교 (개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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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황성 YMCA 창설자 겸 초대 총무. 그리고 한국에 야구를 뿌리내린 인물.2. 생애
1872년 10월 21일,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그는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 YMCA 전문학교를 졸업한후 콜로라도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예일대에서 YMCA 전도 담당 부목사로 일을 하며 YMCA에 발을 담궜다. 그러던 중 1901년 9월에 27세의 나이로 한국 YMCA 창설 책임자[2]로 임명되어 한국 땅을 밟은 그는 한국에 발을 디딘지 2년만인 1903년 10월 28일, 유니온 클럽에서 YMCA를 창립하고 초대 총무가 되었다.하나님, 저를 이 땅에 보내셨으니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한국 청년들을 위해 나의 일생을 바치게 하소서.
1902년 9월에 세계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
1902년 9월에 세계 본부로 보낸 보고서에서.
그는 한국 땅에 밟은 후 가장 먼저 한국어 익히기와 한국인의 의식과 정서 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오전 8시부터 낮 12시까지, 그리고 오후 2시부터 4시반까지 매일 6시간 30분씩 한국어 익히기에 매달리는 열정을 보인 끝에 2년 후에는 원어민 수준의 한국어 구사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본인의 최초 목표였던 YMCA 회관 건립을 위해 만 5년간을 헌신적으로 매달린 끝에 1908년 12월 3일, 종로 2가에 YMCA 회관을 준공하기에 이른다. 이 회관에는 체육실이 있어 실내 체육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교뿐 아니라 한국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한 그는 일제강점기 1911년, 105인 사건이 터지며 수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붙잡혀 가게 되자 이를 조사해 영국 에딘버러 국제 기독교 선교 협의회에 "이 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사건입니다."라고 사실을 밝혔는데, 이를 알게된 조선총독부는 그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고 1913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한 후 조선으로 돌아오려던 그를 조선 총독부가 방해하며 결국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난징,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다 1933년에 퇴임했으며 이후 상하이에 머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정 지원도 도와주는 등 대한민국 독립 운동을 위해 힘썼다. 그러다 1937년에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38년 11월 26일 심장마비로 66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3. 한국에 스포츠를 전파한 인물
농구, 야구, 스케이트 등 다양한 스포츠를 한국에 전파한 공로가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선교 목적으로 보급한 것도 있지만 그의 노력으로 이땅에 다양한 스포츠들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야구는 1904년 당시 YMCA 임시 회관으로 사용하던 인사동 태화관[3] 앞에서 미군들이 캐치볼을 하는 모습을 많은 한국인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자 이를 선교에 활용하기로 결심했다.[4] 그후 미국에 야구 용품을 주문[5] 한 후 황성 YMCA 야구단을 창설해 야구를 전파했으며 이후 많은 외국인 학교에서 야구부를 창설하며 조선 전역에 야구 붐이 일게 만들었다.[6] 1910년에 경술국치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지자 그는 청년들의 의기를 되살리기 위해 야구를 활용하려 했고 1911년 6월에 관립 한성 고등학교, 선린 상업 고등학교의 연합팀을 꾸려 실업 야구 연합팀과의 경기를 주선하기도 했으며 평양 원정 등을 떠나 전국의 청년들에게 야구를 알리는데 힘을 썼다.
1911년 평양 원정 당시 황성 YMCA 야구단. 사진 아래줄 제일 오른쪽에 질레트도 보인다. |
1907년에는 농구를 보급하기도 했는데 야구에 비해 많은 관심을 쏟지 못했고 이후 1916년에 YMCA 총무였던 반 하트에 의해 농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외에도 스케이트화와 복싱 글러브도 한반도에 처음 선을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많은 한국인들이 빙판 위에서 칼날을 타고 다니는 장면과 거대한 장갑을 끼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게 쳐다봤다고 한다.
4. 창작물에서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에서는 데이빗 캠벨이 필립 질레트 역을 맡아 연기했다.5. 기타
6. 관련 문서
[1] 질레트를 음차한 한자로 자신이 직접 지은 한국명이다. 그는 당시 한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질레트보다 길례태로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2] 공식 직함은 미국 YMCA 한국간사(The Secretary for korea of the U.S.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3] 현재 서울 종로구 YMCA 건물 뒷편 태화 빌딩이 세워진 그 자리다.[4] 오시마가 쓴 조선야구사에는 "1901년 서울에 오기 전 평양에 근무를 했는데 2명 ~ 3명의 동호인과 야구를 하면서 현지의 숭실 대학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평양에서 야구가 최초로 도입된 것이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나 실제로 질레트는 평양에서 근무한적이 없으며 1901년에 하령회에만 참가했다는 사실이 YMCA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과 전혀 다르다.[5] 참고로 이 용품도 많이는 준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로써는 야구용품이 정말 비쌌기 때문. 당시 배트의 가격은 1원 50전으로 쌀 한가마니의 가격인 3원의 절반에 달했고, 글러브의 경우에는 5원 50전으로 쌀 2가마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6] 만약 그가 야구를 조선에 전파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야구를 하지 않는 나라가 되어 프로야구가 창설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