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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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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전개4. 피해 사항5. 학살인가, 전투인가6. 그 뒤에

1. 개요

하마 학살(Hama massacre, مجزرة حماة )은 1982년, 시리아 하마(Hama)시에서 전투 중 벌어진 학살이다. 무슬림 형제단이 하마시에서 시민들을 인질로 잡아 봉기를 벌인 후, 지리한 협상 끝에 시리아 육군 중장이던 리파아트 알아사드(رفعت الأسد‎)가 지휘하는 시리아군이 무슬림 형제단 저항 세력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시가지가 파괴되고 시민들이 사망한 사건이다.

2. 원인

아랍 민족주의사회주의, 세속주의를 내세우며 기독교도나 소수종파도 차별없이 받아들인다는 사상을 가진 바트주의를 내세운 바트당1963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소규모 공장이나 가게만을 인정하고 대지주의 땅을 몰수하여 무상 분배하거나 대기업의 사업체를 국유화시키는 강도 높은 사회주의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던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과 상극이었는데, 바트당의 급격한 경제체제 변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무슬림 형제단에 힘을 실어주자 1964년 4월 하마 시에서 무슬림 형제단에 의한 반란이 처음 벌어졌다.

1964년 4월 바트당 정책에 반발하는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 시내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바트당 하마 시 사무소를 습격했다. 이 충돌 과정에서 민병대원 이스마일리 바스가 사망하자 격화된 시위에 의해 하마 시 전체가 엉망이 된다. 결국 바트당 정부[1]에 의해 전차부대가 투입되며 무슬림 형제단 70명이 사살되고 더 많은 형제단원들이 체포되어 진압되었다.

이로써 바트주의 정권과 무슬림 형제단 사이의 대립관계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바트당 정부에 의해 제3차 중동전쟁의 책임을 지워 숙청당할 예정이었던 국방장관 하페즈 알아사드가 군부 내의 알라위파 세력을 기반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97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테러 공격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고 특히 1976년 레바논 내전에 바트당이 사회주의 세력 지원을 목적으로 개입하면서[2] 시리아 내부의 군사 통제가 느슨해지자, 1976년부터 무슬림 형제단의 조직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시리아 육군 사관학교에 무슬림 형제단 소속 테러살인마 이브라힘 유세프[3]가 폭탄 테러를 가해 장교후보생 83명이 사망했고, 1979년부터는 알레포, 다마스쿠스에서 정부 고위 관료들과 군경을 상대로 하는 폭탄 및 총기 테러로 확대되었다. 결국 무슬림 형제단의 가입과 활동이 완전히 불법화되어 체포 대상이 되었다.

더불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1980년 6월 26일, 시리아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축하 행사에서 하페즈 알아사드 및 정부, 군부 요인들을 향한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였다. 아사드 앞에 수류탄이 떨어졌지만 그는 침착하게 발로 차내서 위기를 모면했고 다른 수류탄이 떨어지자 경호원 1명이 수류탄을 품고 엎드려서 폭사했다.[4] 아사드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하페즈의 친구인 국방장관 및 상당수 정부요인들이 죽었기에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시리아 곳곳에 갇혀있던 극단주의자 1200명을 재판 없이 즉결 사형에 처하며 죽은 친구 및 관료들, 경호원에 대한 보복을 먼저 했다. 또한 무슬림 형제단의 본거지인 하마시에 대한 소탕 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민간인들이 많은 대도시였기 때문에 함부로 작전을 할 수 없었다. 무슬림 형제단 반군은 요르단과 서독,그리고 무슬림 형제단 반군과 연합한 친이라크 바트주의자들 등도 지원하던 이라크의 지원 역시 받고 있었다.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은 이 뒤로 샤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극단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무차별 테러를 벌여 아사드를 자극하였다. 무슬림 형제단 훈련을 받는 어린아이들이 시리아 정부에 저항한다는 핑계로 아무 죄도 없는 정부 소속의 청소부들을 총으로 연이어 살해해버리지를 않나(새벽녘에 홀로 청소하는 청소부들을 사격 훈련 타겟으로 삼았다!) 단지 친정부 성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알레포 대학 학장이나 원로 의료인인 이브라힘 나마같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고, 아사드 대통령의 주변인사들이나 군 사령관들을 연거푸 죽여댈 정도였다. 심지어 수니파 주요 성직자 중 한 명이었던 셰이크 알 샤미는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을 예상하며 좋아하는 수니파 성직자들을 꾸짖었다는 이유 하나로 암살당했다. 결국 참다못한 아사드는 드디어 무슬림 형제단 본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결정한다.

3. 전개

한편 1982년 2월 3일 오전 2시, 무슬림 형제단의 하마 지역 게릴라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오마르 자우와드의 은신처를 알아낸 시리아 군대가 하마 시 구시가지에 있는 그의 은신처로 진입했으나, 매복하고 있던 저격수의 공격을 받아 몇명의 병력이 사살당했고, 아부 바크르 체포를 위해 병력이 증원되자 일제히 하마 시내의 모스크에서 바트당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하는 아잔이 울려퍼졌다. 전통적으로 기도 시간이 아닌 때에 울리는 아잔은 위급 상황에 대한 경보로 사용된다. 하마 시내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동조자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군대와 경찰을 하마 시에서 몰아내는 한편 2월 3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70여명의 바트당원들이 살해당했으며, 하마 시는 무슬림 형제단의 "해방구"로 선포되었고 "이교도"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의 동생이자 부통령인 리파아트 알아사드는 휘하의 병력 1만 2천명을 동원하여 하마 구시가지를 포위하고, 공습으로 빽빽한 구식 건물을 파괴하여 전차들의 돌입을 쉽게 만들었다. 3주간에 걸쳐 정부군의 공세가 개시되었고 1주차에 도시를 장악하고, 2주차에 소탕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자살폭탄 테러와 인간 방패를 동원하는 무슬림 형제단과의 전투는 쉽지 않았으며, 결국 대대적인 공습과 포격을 통해 구시가지를 거의 파괴하고 나서야 진압에 성공하게 된다. 하수 터널에 숨은 형제단 게릴라를 제압하기 위해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르는 수준의 철저한 소탕 작전이 전개되었고, 하마 시는 완전히 평정되었다.

4. 피해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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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가치가 높았던 하마 구시가지는 이 사태로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도 사라졌다.

뉴욕타임즈와 타임 지에서 1982년 2월 당시 내놓았던 기사에서는 1000명 피해설을 보도했으나, 점점 늘어나서 최소 7000명에서 최대 4만명까지의 피해자 수치가 들쭉날쭉하게 되었다. 당시 하마 학살을 직접 취재했던 유명 탐사보도원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는 취재 결과를 토대로 1만명 피해를 주장했으나, 나중에는 2만명 피해로 바뀌었다.

5. 학살인가, 전투인가

1982년 3월 미국이나 유럽 언론은 Hama massacre, 즉 하마 학살이란 이름으로 이를 보도했다. 하지만 미국으로선 그 학살된 무슬림 형제단이 되려 적이었기에 무턱대고 시리아군이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삼가고 전투 와중에 무고한 민간인 피해도 컸다고 하는 정도로 보도했다.

당연히 시리아 정부는 학살은 뭔 개소리냐며 광신도들은 자폭 공격으로 응수하면서 아군 피해도 절대로 가볍게 본 게 아니라는 투로 반격하며 당시 사상당한 시리아군 사진이나 자료를 보이며 학살이 아니라 광신도 토벌에 따른 전투라고 반론에 나섰다. 지금도 당연히 시리아 정부는 전투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시리아 여론은 시리아 정부를 무척 옹호했는데 무슬림 형제단의 자폭 공격에 무고한 민간인들을 억지로 위협하여 썼다는 비난이 거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폭 공격은 21세기에 부활하게 된다

6. 그 뒤에

하마 학살로 인해 무슬림 형제단은 세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1970년대와 같은 활발한 게릴라 활동을 다시는 하지 못했다. 특히 시리아 정보 기관은 무슬림 형제단의 봉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국민의 모든 전화를 감청하고 편지를 뜯어보며 여기저기에 간첩을 심어놓는 아주 강력한 국민 통제 정책을 시행했으며, 악명 높은 시리아의 국민 감시 체계의 발단이 되었다.

그 뒤에 아사드 정부는 하마 시에 대한 재건을 철저하게 했고 당시 포격 및 많은 전투 흔적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2013년 인구조사론 31만에 달하며 시리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잊혀지던 이 전투는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다시 벌어지면서 또 다시 이 도시에서 부활하게 된다. 반아사드 구호를 외치며 하마가 반아사드 저항의 성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국 2012년 하마 시에 있는 마즈라트 알쿠베이르 마을에서 친정부 민병대 샤비하에 의하여 최대 100명이 학살당했다는 논란이 발생했다.

이를 두고 국제적 논란이 거셌는데 우선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학살이라며 시리아 정부를 비난했다. 이에 시리아 정부는 이번 학살이 테러리스트 짓이며 희생자 규모도 9명에 그친다고 항변했지만 샤비하가 학살을 저질렀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마을 인근 올리브 숲에 숨어 학살을 피한 한 농부는 민병대와 정부군이 알베이르 마을의 가옥 3채 안에서 총을 쏘고 시신을 집 밖으로 끌어내 불태우는 것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가디언>도 알쿠베이르 외곽에 살던 아부 히샴 알하마위라는 주민이 마을 주변의 알라위트파 마을에서 온 샤비하 민병대가 그의 집 앞을 지나쳐 알쿠베이르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 주민은 그 민병대들이 어린 시절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들이라서 정확히 알아볼 수 있다면서 정부군과 함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주민은 또 알쿠베이르가 지난해 시리아 반정부 시위 이후 정치적인 행동에 나서거나 반군의 거점이 된 적이 없는 평범한 농촌이라고 이번 학살의 타깃이 된 점에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사건 진상 파악은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1] 당시에는 아직 하페즈 알아사드가 집권하지 않았다.[2] 현재의 정치구도를 보고 알라위파 정권이 시아파 동지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바트당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아랍의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대부가 되기 위해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압둘라 외잘란이 지휘하는 튀르키예쿠르드족 과격분리독립운동단체 PKK에 무기와 훈련을 제공하여 튀르키예 동부에 내전을 초래한 것 또한 당시 PKK의 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였기 때문이었다.[3] 훗날 시리아 내전에서 2016년 알레포에 포위된 극단주의 조직 누르 알 딘 알 젠키 운동의 사령관인 야세르 유세프가 이 자의 아들이었다. 이때 알레포의 정부군 포위망을 뚫기 위한 이슬람 반군의 작전을 이자의 이름을 따서 이브라힘 유세프 작전이라 명명하기도 했다.[4] 아사드는 자기 목숨을 구하고 대신 순직한 이 경호원에게 훈장 및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고 유족들에게도 후한 연금으로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