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59:03

하순철

성명 하순철(河順哲)
이명 하순철(河順喆), 하순래(河順來)
생몰 1899년 12월 19일 ~ ?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춘양리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하순철은 1899년 12월 19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춘양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경 모종의 이유로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신광희(申光熙)[1]로부터 공산주의를 전파받았다. 이후 1929년 2월 21일 목포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여수읍 봉산리에 있는 천일고무공장(天一護謨工場)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932년 여름 여수적색노동조합(麗水赤色勞動組合)을 조직하려다가 발각되자 부산으로 도피했다.

1933년 3월, 하순철은 부산에서 정수연(鄭壽演) 등과 함께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을 목표로 ‘부산건설협의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붉은 향> 발간에 관여했다. 그러다가 장경렬(張敬烈) 등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7월 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그는 1935년 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하순철은 출옥 후 여수로 이동해 노동조합운동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1935년 6~7월경 박종구(朴鐘九), 황재열(黃宰列) 등을 포섭하고 그들과 함께 '오르그'를 조직해 여수 내 각 공장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박종구를 여수읍 서정에 있는 무라사키 철공소(村崎鐵工所)에 보냈고, 황재열을 과거 자신이 근무했던 천일고무공자에 보내 직공으로 들어가게 했다. 또한 그는 8월 1일 반전데이를 기해 일본 유학생 박경임(朴景任), 김수평(金守枰), 이진문(李珍文) 등과 함께 기념행사를 계획했지만 8월 1일 당일에 경찰의 경계가 심하자 8월 12일로 날짜를 변경하고 준비했지만 끝내 개시하지 못했다.

이즈음 서울 경성제국대학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등이 관계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 사건’이 보도되자, 하순철은 8월 25일 동지들을 여수향교에 모이게 하고 향후의 전망과 대책 등에 대해 협의했다. 그들은 나중에 일제 당국이 ‘조선팔경(朝鮮八景)’을 투표로 선정한 일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이를 반대하고 공격할 방법 등을 논의한 일로, ‘팔경투표(八景投票) 반대청년’이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가 1935년 9월 3일 여수경찰서에게 체포된 그는 12월 16일 박경임, 김수평과 함께 검찰에 송치되었고, 1936년 2월 7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하순철은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했지만 7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히려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8년 2월 9일 만기 출소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하순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신광희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