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7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0095da><colcolor=#FFFFFF> 역사 | 역사 | |
선거 | 선거 | ||
비판 및 논란 | 비판 및 논란 · 총풍사건 · 불법 대선자금 전달사건 · 환생경제 ·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 매크로 여론조작 의혹 · 선관위 공격 사건 | ||
대통령 | 이명박 | ||
집권정부 | 이명박 정부 | ||
관련 단체 | 여의도연구소 |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 |||
기타 | 전당대회 | ||
관련 틀 | 역대 총재 및 대표 · 역대 원내총무 및 원내대표 |
1. 개요
한나라당의 역대 전당대회에 대한 문서.2. 창당대회
-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통합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의 강령과 62개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한나라당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한나라당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위원을 한나라당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3. 1차 전당대회
-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은 대표위원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했다. 이어서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4. 2차 전당대회
순위 | 성명 | 득표수 | 총 득표율 | 비고 |
1 | 이회창 | 4,083 | 55.7 | 총재 |
2 | 이한동 | 1,554 | 21.2 | |
3 | 김덕룡 | 1,283 | 17.5 | |
4 | 서청원 | 392 | 5.4 | |
총투표수 | 7,326 | 100 |
5. 3차 전당대회
순위 | 성명 | 득표수 | 총 득표율 | 비고 |
1 | 이회창 | 4,717 | 66.3 | 총재 |
2 | 김덕룡 | 1,473 | 20.7 | |
3 | 강삼재 | 663 | 9.3 | |
4 | 손학규 | 257 | 3.6 | |
총투표수 | 7,110 | 100 |
- 전에 이어 이회창 총재가 다시 당선되었다. 비주류 계파였던 김덕룡과 강삼재의 분열과 16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이회창 총재가 비주류 측의 지구당을 대부분 자신의 계파 사람들로 채워넣었고, 총선에서도 승리했던 까닭에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6. 4차 전당대회
순위 | 성명 | 득표수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서청원 | 3,603 | 33.6% | 대표최고위원 |
2 | 강창희 | 3,336 | 31.1% | 최고위원 |
3 | 김진재 | 2,788 | 26% | 최고위원 |
4 | 강재섭 | 2,652 | 24.7% | 최고위원 |
5 | 박희태 | 2,478 | 23.1% | 최고위원 |
6 | 하순봉 | 2,062 | 19.2% | 최고위원 |
7 | 김일윤 | 2,060 | 19.2% | |
8 | 이해구 | 1,933 | 18% | |
9 | 정형근 | 1,593 | 14.8% | |
10 | 김부겸 | 1,448 | 13.5% | |
11 | 김기배 | 1,415 | 13.2% | |
12 | 안상수 | 977 | 9.1% | |
13 | 김정숙 | 936 | 8.7% | 여성 몫 최고위원 |
14 | 김호일 | 883 | 8.2% | |
14 | 홍준표 | 883 | 8.2% | |
16 | 함종한 | 844 | 7.9% | |
17 | 강인섭 | 569 | 5.3% |
- 최초로 단일지도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 바꾼 뒤 최고위원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득표한 서청원 당시 의원이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또한 집단지도체제로 바꿈과 동시에 여성 몫 최고위원 제도를 도입해 19.2%를 득표한 김일윤 당시 의원 대신 김정숙 당시 의원이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7. 5차 전당대회
순위 | 성명 | 득표수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최병렬 | 46,074 | 35.8% | 대표 |
2 | 서청원 | 42,965 | 33.4% | |
3 | 강재섭 | 18,899 | 14.7% | |
4 | 김덕룡 | 15,680 | 12.2% | |
5 | 이재오 | 2,697 | 2.1% | |
6 | 김형오 | 2,406 | 1.9% | |
총 투표수 | 128,721 | 100% |
-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라고 주장했으나 재검표 결과 원래 선거 결과와 별반 차이가 없이 국고만 허비하자 서청원 당시 대표는 대선 패배와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 후 사퇴한다. 그 뒤 대선 패배를 다시 겪은 한나라당은 정치개혁특별위원회[1]의 개혁안에 따라 개혁된 단일지도체제(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8. 6차 전당대회
기호 | 순위 | 성명 | 국민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2 | 박근혜 | 1,255/49.8% | 1,359/53.9% | 2,614/51.8% | 대표 |
2 | 5 | 홍사덕 | 553/22% | 900/35.7% | 28.8% | |
3 | 4 | 김문수 | 498/19.8% | 109/4.3% | 607/12% | |
4 | 3 | 박진 | 106/4.2% | 104/4.1% | 4.2% | |
5 | 1 | 권오을 | 110/4.4% | 50/2% | 160/3.2% | |
총 투표수 | 100% |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으로 인해 이른바 '탄핵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은 최병렬 당시 대표가 임기 종료를 앞두고 사퇴하자 3개월 과도기 대표를 뽑기로 하며 여론조사를 포함시켰다. 결과 박근혜 당시 의원이 당선되었다.
9. 7차 전당대회
순위 | 성명 | 득표수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박근혜 | 8,443 | 84.2% | 대표최고위원 |
2 | 원희룡 | 2,610 | 26.1% | 최고위원 |
3 | 김영선 | 2,249 | 22.5% | 최고위원 |
4 | 이강두 | 2,185 | 21.8% | 최고위원 |
5 | 이규택 | 1,968 | 19.66% | 최고위원 |
6 | 정의화 | 1,525 | 15.2% | |
7 | 곽영훈 | 1,050 | 10.4% | |
총 투표수 | 10,010 | 200% |
- 3개월 과도기 지도부를 뒤로 하고 한나라당은 집단지도체를 택하고 과도기 지도부 대표였던 박근혜 당시 대표를 대표로 선출한다. 이 전당대회는 여론조사와 인터넷 투표로 선출했으며 원희룡과 김영선 같은 소장파 의원들이 이강두, 이규택 등의 중진 의원들을 이기는 이변이 일어났다.
10. 8차 전당대회
기호 | 순위 | 성명 | 국민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4 | 강재섭 | 954/30.2% | 4,229/58.4% | 5,254/50% | 대표 |
2 | 3 | 이재오 | 1,423/45.1% | 3,368/45.7% | 4,791/45.6% | 최고위원 |
3 | 7 | 강창희 | 554/17.6% | 2,071/28.1% | 2,626/25% | 최고위원 |
4 | 5 | 전여옥 | 1,161/36.8% | 833/11.3% | 1,994/19% | 최고위원 |
5 | 2 | 정형근 | 663/20.1% | 1,339/18.2% | 1,993/18.9% | 최고위원 |
6 | 1 | 권영세 | 540/17.1% | 1,223/16.6% | 1,773/16.9% | |
7 | 8 | 이규택 | 809/25.6% | 847/11.5% | 1,656/15.7% | |
8 | 6 | 이방호 | 213/6.8% | 735/10% | 949/9% | |
총 투표수 | 100% |
11. 9차 전당대회
- 2007년 8월 20일 역사에 회자될 대선 경선을 치른 뒤 이명박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2. 10차 전당대회
기호 | 순위 | 성명 | 국민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2 | 박희태 | 1,865/60.2% | 4,264/56.4% | 6,129/57.6% | 대표최고위원 |
2 | 7 | 정몽준 | 2,896/92.6% | 2,391/31.7% | 5,287/49.6% | 최고위원 |
3 | 4 | 허태열 | 555/19.8% | 2,792/37% | 3,284/30.8% | 최고위원 |
4 | 3 | 공성진 | 283/9.6% | 2,306/30.5% | 2,589/24.3% | 최고위원 |
5 | 5 | 김성조 | 209/5.5% | 2,245/29.7% | 2,454/23% | |
6 | 6 | 박순자 | 382/12.5% | 509/6.7% | 891/8.4% | 여성 최고위원 |
총 투표수 | 100% |
- 친이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이 여론조사 상[3]으로 꽤 앞서던 정몽준 의원과 친박 중진 허태열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4차 전당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총 득표율 8.4%를 기록한 박순자 후보가 김성조 후보를 제치고 여성 몫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3. 11차 전당대회
기호 | 순위 | 성명 | 국민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2 | 안상수 | 1,295/40.6% | 3,021/56.4% | 4,316/40.6% | 대표최고위원 |
2 | 7 | 홍준표 | 1,482/46.4% | 2,372/31.9% | 3,854/36.3% | 최고위원 |
3 | 4 | 나경원 | 1,530/47.8% | 1,352/18.2% | 2,882/27.1% | 최고위원 |
4 | 3 | 정두언 | 472/14.6% | 1,964/26.4% | 2,436/22.9% | 최고위원 |
5 | 5 | 서병수 | 142/4.4% | 1,782/24% | 1,924/18.1% | 최고위원 |
6 | 6 | 이성헌 | 89/2.6% | 1,301/17.5% | 1,390/13.1% | |
2 | 5 | 한선교 | 790/24.6% | 403/5.4% | 1,193/11.2% | |
3 | 4 | 이혜훈 | 144/4.4% | 1,034/13.9% | 1,178/11.1% | |
4 | 3 | 김대식 | 155/4.8% | 819/11% | 974/9.2% | |
4 | 3 | 김성식 | 132/4% | 533/7.2% | 665/6.3% | |
5 | 1 | 정미경 | 147/4.6% | 299/4% | 446/4.2% | |
총 투표수 | 100% |
-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4]과 함께 안상수 전 원내대표[5]가 역시 원내대표[6]였던 홍준표 전 원내대표와 재선의 나경원 전 대변인을 누르고 선출되었다.
- 당시 전당대회 선거관리위원회의장은 전직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김기춘(...)이었다.
14. 12차 전당대회
기호 | 순위 | 성명 | 국민 여론조사 | 선거인단 | 총 득표율(%) | 선거결과 |
1 | 2 | 홍준표 | 12,356/50.4% | 29,310/51.3% | 41,666/51% | 대표최고위원 |
2 | 7 | 유승민 | 4,638/18.9% | 27,519/48.1% | 32,157/39.4% | 최고위원 |
3 | 4 | 나경원 | 14,903/60.8% | 14,819/25.9% | 29,722/36.4% | 최고위원 |
4 | 3 | 원희룡 | 6,579/26.8% | 22,507/39.4% | 29,086/35.6% | 최고위원 |
5 | 5 | 남경필 | 6,036/24.6% | 8,860/15.5% | 14,896/18.2% | 최고위원 |
6 | 6 | 박진 | 3,294/12.4% | 5,662/9.9% | 8,956/11% | |
2 | 5 | 권영세 | 1,211/5% | 5,695/10% | 6,906/8.5% | |
총 투표수 | 100% |
- 친박과 친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계파의 홍준표 의원이 당시 범친박계로 평가되던 유승민 의원과 친이가 밀던 원희룡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이 전당대회로 인해 친박의 세력이 친이를 압도한 것을 물론 당권이 친박으로 넘어왔다. 또한 이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차기 대권주자를 찾지 못하던 친이는 몰락 하고 만다.
- 이 선거에 출마한 이들 모두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당장 홍준표는 3개월만에 대표직에서 쫓겨나듯이 사퇴했으며 차기 총선에서 낙선했다. 또한 원희룡은 차기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쳤으나 낙선하며 국회를 떠났고, 나경원 역시 차기 총선에서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유승민도 당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에게 찍혀있을 때이니... 권영세와 박진 역시 이 전당대회 이후로 두번 내리 낙선, 낙천했다.
- 그러나 반전으로 10년 뒤 이 멤버 5인 중 3인이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최종 경선 후보 4인 중 3인이 되었으며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박진과 권영세, 원희룡이 국무위원으로 입각하며 화려하게 부활, 당대표직을 잃었던 홍준표는 유력 대권주자로 분류됨과 동시에 민선 8기 대구광역시장이 되어 최초의 복수 광역단체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반면 유승민과 나경원은 20대 국회 이후로 당내 경선에서 수차례 미역국을 먹고 정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며 남경필은 7회 지방선거 낙선 이후 정계를 떠났다.
[1] 홍사덕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다.[2] 공교롭게도 강재섭 원내대표의 후임 원내대표가 바로 이 전당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이재오다.[3] 상단의 표를 보면, 국민 여론조사 수치로만 보면 정몽준 후보가 비교적 큰 표차로 1등이지만, 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거인단 투표에선 세력이 미비하여 3등을 차지하였고, 반면 박희태 후보는 국민 여론조사에선 정몽준 후보에 밀렸지만, 선거인단 투표에서 크게 이겨서 합산 1등이 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박희태는 한나라당 대변인을 오랫동안 지내며 여러가지 재치있는 논평을 많이 남겨놓았고 참여정부 시절에도 무조건적인 네거티브는 지양하는 행보를 보여 당 내외에서도 이미지가 괜찮은 편이였다. 박희태의 이미지가 망가진건 국회의장 재임 시절 각종 날치기와 수차례의 국회 공성전을 주도한 것이 시초이며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와 국회의장 퇴임 이후의 성추행 범죄로 나락으로 떨어지던 이미지에 쐐기를 박아버려 당에서 제명되기에 이르렀다.[4] 다만 이게 엎어져서 최종 합당은 당명 변경과 함께 이뤄진다.[5] 17대 후반기(2007~17대 국회 임기 종료 시)와 18대 초반기(2009~2010)[6] 18대 국회 초반기(18대 국회 개원~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