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0:07:07

한덕리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심일(心一)
본관 청주 한씨[1]
출생 1871년 6월 5일[2]
경기도 양근군 동종면 신대리
(現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새터마을 658번지)
사망 1939년 3월 4일 (향년 67세)
종교 기독교 (개신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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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71년 6월 5일 경기도 양근군 동종면 신대리(現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새터마을 658번지)에서 아버지 한용익(韓用翼, 1843 ~ 1895. 6. 18)과 어머니 남원 양씨(1838 ~ 1886. 7. 20)[3]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한용정(韓用定, 1838 ~ 1891. 4. 27)에 입양되었다.

일찍이 개신교에 입교해 장로가 되었고, 양평군 지역 유지로서 군민들로부터 상당한 신용과 두터운 인망을 받고 있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가, 신우균(申祐均)의 권고를 받고 1920년 5월 조선독립단 경기도지단(支團)을 조직하고 경기도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정경시(鄭慶時)·한봉철(韓奉喆)·김선동(金先同)·김종후(金鍾厚)·유래완(柳來琬)·이재규(李載圭)·박영식(朴永植) 등의 단원을 포섭했고, 단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발송된 격문을 인쇄하고 군민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양평군수 및 양평군 지역 각 면장들에게 사형집행선고문 및 협박장을 발송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고, 양평군 지역 부호들에게는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뒤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사무소에서 단원 이재규 등이 광주지방 독립단 규약을 만들어 인쇄하고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됨에 따라 1921년 5월 한덕리를 비롯한 조선독립단 경기도지단 단원 전부가 체포되었다. 이후 수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39년 3월 4일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참의공파(參議公派) 28세 리(履) 항렬.[2]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31권 419쪽에는 6월 7일생으로 등재돼 있다.[3] 양선전(梁宣傳)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