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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주보 漢城周報 Hanseong jubo (Hanseong Weekly) | |||
<colbgcolor=#bf1400><colcolor=#fff> 국가 | 조선 | ||
소재지 |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 박문국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 ||
창간 | 1886년 1월 25일 | ||
종간 | 1888년 7월 7일 | ||
설립기관 | 통리아문 박문국 | ||
종류 | 주간신문 |
<colbgcolor=#bf1400> 《한성주보》 제1호 표지 및 1886년 2월 22일 자 《한성주보》에 실린 세창양행 광고[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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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최초의 주간 신문. 《한성순보》의 후신이다.2. 상세
1883년(고종 20년) 10월에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했다. 그러나 불과 1년 여 뒤인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박문국 사옥과 활자 · 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부득이 1년 만에 종간되었다.《한성순보》는 종간되었으나 세간에서는 다시 신문을 내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당시 통리아문독판이었던 김윤식 역시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던 사람이었고, 갑신정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1885년(고종 22년) 봄부터 신문 복간을 추진했다. 고종은 처음에 민간 출판사인 광인사(廣印社)로 박문국을 이전해 신문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박문국을 중건하여 제작하기로 했다. 인쇄 시설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들여오고 한성순보 편집진들을 모아 복간 작업을 한 끝에 1886년(고종 23년) 1월 25일에 마침내 《한성주보(漢城周報)》란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어 신문을 복간시켰다.[A]
개칭복간하면서 이전의 《한성순보》와는 다른 부분들이 생겨났다. 우선 《한성순보》는 10일마다 나왔으며 한문만 사용했는데, 《한성주보(漢城周報)》는 1주에 1번(매주 월요일)마다 발매되었으며 국한문 혼용이었다. 다만, 필요에 따라 한문만을, 혹은 한글만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성순보》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까지도 독자층으로 삼았다. 사실, 《한성순보》도 그러긴 했는데 순한문인데다가 관보 성격이 강해서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한성주보》 역시 관보 성격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한글이 들어가서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양행 광고도 실었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신문광고로, 구독료 이외에도 광고료로 수입을 얻으려는 것 역시 《한성순보》와는 달랐다.
기사는 크게 국내 정치, 외신, 논설, 박문국의 공고 등으로 나눠졌는데 주로 조선보다는 외국 소식을 더 많이 실었다. 외국 문물을 소개하는 기사를 많이 다루었으며 논설도 신문 기사에 대한 평이 아니라, 외국 신문에 실린 논설을 번역해서 실었다.[3] 이는 《한성주보》의 주 목적이 해외 소식을 많이 전해 백성들에게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우치게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신문은 책자형이었으며 규격은 가로 15cm, 세로 20cm였고[B] 활자는 4호를 사용했다.[A] 초반에는 1면에 20행, 글자는 40자였다. 그러나 24호부터는 16행으로 줄어들었는데 1행 당 글자 수는 40자 그대로 유지했다.[B] 1호 당 20면이 수록되어 있었으며 첫 면은 신문 이름과 호수, 두 번째 면은 발행한 날짜, 그리고 세 번째 면부터 기사가 실려있었다.[B]
그러나 광고도 어느 순간부터는 잘 들어오지 않았고, 구독료 징수도 원활하지 못해 박문국의 재정난이 심해졌다. 결국 1888년(고종 25년) 7월 14일에 폐간되었다. 《한성주보》만 폐간당한 것이 아니라 신문을 제작하던 박문국 자체가 교섭아문으로 통합되었다.[8]
[1] 사진 출처 - 《우리문화신문》.[A]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성주보》.[3]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5 ~ 17.[B]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5.[A] [B] [B] [8] 김혜진(2008), 《한성주보의 국어학적 연구》, 안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학위논문, p.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