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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할리드에서 넘어옴
초기 이슬람 3대 명장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라시둔 칼리파국의 명장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خالد بن الوليد بن المغيرة المخزومي
파일:Syria 1970 Khalid ibn al-Walid postage stamp.png

1970년 시리아에서 발매한 우표에 그려진 그의 일러스트[1]
본명خالد بن الوليد بن المغيرة المخزومي‎‎
Khalid ibn al-Walid ibn al-Mughira al-Makhzumi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이븐 알 무기라 알 마크주미
별명Sayf Allāh al-Maslūl('알라가 뽑아든 검')
출생585년
메카
사망642년 (향년 57세)
메디나 혹은 홈스
복무 기간629년~638년
1. 개요2. 생애
2.1. 이슬람의 적으로의 활약2.2. 이슬람 개종과 릿다 전쟁2.3. 아부 바크르 시대의 전쟁2.4. 우마르 시대의 전쟁2.5. 연표(활약상 & 전투 목록)
2.5.1.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참여한 전투들
2.6. 해임과 말년
3. 평가4. 이슬람권에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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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는 무슬림들을 위해서 알라께서 선택하신 방패였네. 그의 가슴은 모든 증오와 분노로부터 순수했었지.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
이슬람권에서 전설 중의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뛰어난 전공을 자랑하는 라쉬둔 칼리파조 이슬람 제국의 명장이다.

2. 생애

2.1. 이슬람의 적으로의 활약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이전의 할리드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그는 처음에는 무함마드의 적이었다. 부족의 족장이었던 할리드의 아버지는 무함마드에 적대적이어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고 622년 헤지라를 할 때까지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않은 채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에 속한 우마이야가(家)와 뜻을 함께 하며 무함마드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할리드의 동생 왈리드는 624년의 바드르 전투에서 무슬림군에 포로로 잡혔고, 이에 할리드가 메디나로 찾아가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데려왔는데, 그 여정 중에 동생이 몰래 메디나로 다시 복귀하여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할리드는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 대활약하며 무함마드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으나, 627년의 한다크 전투를 끝으로 돌연 할리드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2.2. 이슬람 개종과 릿다 전쟁

메디나 포위전에서 무슬림군에게 패배당하고 나서 휴전이 성립되었는데 그의 형제인 왈리드 빈 왈리드가 이슬람교로 개종한 뒤로 형 할리드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할리드는 부족 내 원로인 아부 수피안의 협박섞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를 찾아가서 개종의 뜻을 밝히며 무슬림이 되었다.

그리고 629년 무함마드는 동로마 제국의 속국인 가산 왕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총사령관으로 자파르 이븐 아비 탈리브가 임명되었고, 만약 그가 죽는다면 후임으로 아부 알란 이븐 라와하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군대와 격돌한 무타크 전투에서 이들이 모두 전사함으로써 할리드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무슬림 군대 3,000명으로 동로마-가산 연합군 10,000명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당한 악조건속에서 무타크 전투는 계속 이어져갔다.

할리드가 가지고 있는 9개의 검이 전부 부러질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다. 하지만 할리드는 현 상태로는 승산이 없다고 파악해 신속한 퇴각으로 간신히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이후 메디나에 돌아온 무함마드는 할리드에게 다시 전쟁을 수행하라고 부추겼는데 이때 그에게 '알라가 뽑아든 검'이란 칭호가 붙었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동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거인에 도전해 아랍의 부족들에게 존재감을 줬다는 사실에 전략적 성공이라고 주장한다.

할리드는 이후에도 무함마드와 가깝게 지내면서 메카 정복에 공헌한 뒤로 무함마드의 마지막 메카 순례에 참여하며 약간의 머리카락을 얻었는데 그 머리카락을 자신의 모자에다가 넣었고 항상 그 모자를 쓰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무함마드 사후에 아라비아 각지에서 자신이 무함마드의 후계자라며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취임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나자(릿다 전쟁)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며 아부 바크르의 통치를 안정화시켜 나갔다.

2.3. 아부 바크르 시대의 전쟁

반란군의 붕괴로 아라비아 반도는 메디나의 칼리파 아부 바크르 아래 완전히 통일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제국을 확장시키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확장인지 아니면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인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하여튼 할리드는 9,000명의 병력과 함께, 동로마 제국사산 제국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완충지역으로 진격했고, 페르시아의 메소포타미아 강 하류를 점령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633년의 살라시 전투알 마다흐 전투에서 사산군을 격퇴했으며, 왈라자 전투에서 사산 제국의 본대가 괴멸당하면서 메소포타미아 하류가 이슬람에게 점령당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고 대규모 군대를 재파병했다.

수적 열세인 할리드는 대규모 총력전을 회피하고 4개의 부대로 분산되어 있는 사산 제국의 군대를 각개 격파하기로 했다. 군대를 3개로 나눈 그는 야간 기습으로 사산군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10,000명의 사산 제국의 군대가 연이어 패배했고, 심지어 사산 제국, 동로마 제국 연합군 150,000명의 대군이 참전한 피라즈 전투에서 15,000명의 할리드군에게 대패해 100,000명이 전사하면서 사산 제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심지어 수도 크테시폰이 이슬람에게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사산 제국 원정이 완벽한 성공을 거두면서 아부 바크르레반트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슬람 세력은 군대를 일으켜 침공했고 이에 동로마 제국은 전군을 팔레스타인으로 집결해 대응했다. 동로마 제국의 저항이 거세자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는 아부 바크르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할리드가 레반트 지역에 파견되었다.

할리드는 사막을 가로질러 그해 6월 시리아로 진입했고, 국경 요새인 팔미라, 수크난, 콰라탄과 하와린을 점령했다. 그리고 신속하게 보스라로 진격해 들어갔다. 가산 왕국의 군대를 격퇴하고 본대와 합류해 보스라를 함락시키고 가산 왕국을 멸망시켰다. 게다가 634년 6월 30일 아자나단 전투에서 150,000명의 동로마군을 사살함으로써 레반트 지역을 점령했고,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당시 다마스쿠스에는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아들 토마스가 있었는데 황제의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로 오는 황제의 군대를 상대로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쳤고, 진격이 늦춰진 틈을 타 총력전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그리고 도망치던 토마스의 군대를 완벽한 포위전으로 섬멸했다.
파일:Mohammad_adil_rais-batte_of_majar_ud_dibaj.gif

그리고 이때 아부 바크르가 붕어했고 우마르가 제2대 정통 칼리파로 즉위했다. 그는 할리드를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시리아 이슬람군의 사령관으로 아부 우바이다를 임명했다. 하지만 할리드는 공성전 당시에 그 소식을 받았기에 끝날 때까지 발표를 미뤘다.

2.4. 우마르 시대의 전쟁

짐은 그대가 나의 군대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대는 나의 사위를 죽이고 나의 딸을 사로잡았다. 그대는 승리하였고, 무사히 빠져나갔다. 이제 난 그대에게 내 딸을 청한다. 몸값을 받고 돌려주든, 혹은 그녀를 나에 대한 선물로 주길 바란다. 그대의 가치관에 있어 명예가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봐서.

ㅡ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할리드에게
그녀를 선물로서 데려가시오. 몸값은 없을 것이오.

ㅡ 할리드가 이라클리오스(헤라클리우스) 황제에게

634년 8월 22일 아부 바크르가 붕어하자 할리드의 사촌인 우마르가 새로운 칼리파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첫 인사 이동은 사촌인 할리드를 사령관에서 해임시키고, 아부 우바이다 이븐 알 자라를 시리아 이슬람군의 사령관에 임명한 것이었다. 이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신의 뜻이 아닌 할리드의 공으로 돌리는 여론을 탐탁지 않아한 우마르의 판단이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조심성이 많은 장군이었기에 전선을 느리지만 꾸준히 진격시켰다. 그래서인지 시리아 정복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그때 동로마군이 베이루트에 집결한다는 속보를 들은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파견해 이들을 격파하게 했다.

할리드는 이에 응해 634년 10월 15일 출진해 동로마군을 격파했고 100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로마는 이 전투의 패배로 시리아를 완전히 상실해 팔레스타인에 집결한 동로마군은 본토와 연결이 끊어지게 되었다. 아부 우바이다는 파할로 진군했는데 이곳은 해수면보다 약 150m 아래에 위치한 곳이었고, 동로마군 패잔병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확보하지 않으면 아라비아 본토와의 보급로 유지에 문제가 있었기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역이었다.

635년 할리드는 이곳으로 이동해 요르단 강의 물로 강 둑을 터트려 물로 이들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이슬람군은 두 개로 나뉘어 팔레스타인과 북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로스 장군에게 다마스쿠스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파할 전투가 끝나고 무슬림 군대는 에메사로 향하고 있었다. 길이 겹친 두 군대는 에메사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서 만났고, 테오도로스 장군은 별동대로 다마스쿠스를 야간 습격으로 점령하기로 했다. 하지만 할리드의 정보망에 들켰고, 우바이아 장군의 허락 아래 친위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로 이동했다.

아부 우바이다가 발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테오도로스의 별동대와 할리드와의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났고, 테오도로스가 전사했다. 우바이다군은 발벡(헤일로폴리스)을 점령했고 636년 에메사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평화협상이 결렬되자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대규모의 동로마군과 이슬람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5개의 부대로 나뉘어진 동로마군이 636년에 출병했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야전에서 전투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로마군의 주축인 카타프락토이(중갑기병)는 이슬람의 경기병 부대에 상당히 취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할리드의 제안에 아부 우바이다는 전군을 자비야에서 야르무크 강으로 재배치시켰다. 그리고 아부 우바이다에게 사령관직을 받은 할리드는 야르무크 강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해 8월 15일 야르무크 전투가 시작되었다. 6일간 지속된 격전 끝에 이슬람군은 동로마군 대다수를 섬멸했고 동로마 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이에 할리드의 이슬람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1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예루살렘은 항복했고, 이슬람군은 시리아로 진격했다.

우바이다와 할리드의 진격에 칼키스와 안티오크 같은 대도시는 긴장했다.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켜야 할 동로마 제국으로서는 반드시 칼키스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르 전투 당시, 칼키스 요새에서 뛰쳐나온 동로마군을 할리드가 포위섬멸전으로 전멸시킴으로써 칼키스를 함락시켰고, 우바이다군은 637년 10월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알레포를 점령했다. 이제 다음 목표는 안티오크였다.

당시 안티오크는 동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주도였기에 동로마는 이곳을 잃으면 아시아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안티오크를 구원하기 위해 진격했다. 하지만 강철 다리 전투에서 또다시 할리드에게 완전히 깨지고 안티오크는 함락되었다.

황제의 연이은 패배와 레반트 지역의 완전한 상실로 동로마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해 들어오는 이슬람 군대과 맞서 싸운 동로마군은 연전연패했으며, 결국 아나톨리아 동부의 요새들과 도시를 황제는 포기했다.

하지만 이 정복이 할리드의 마지막 정복이 되었다.

2.5. 연표(활약상 & 전투 목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Mohammad_adil-Campaigns_of_Khalid.png

2.5.1.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참여한 전투들

이슬람 팽창 문서에서 일부 발췌
릿다 (배교) 전쟁 (632 ~ 633년)
632년 9-10월: 주후사 전투 (승)[2], 부자카 전투 (승), 감라 전투 (승), 나크라 전투 (승)[3], 자파르 전투 (승), 부타 전투 (승). 타북/다뭇 원정
632년 12월: 야마마 전투 (승)[4]
1차 메소포타미아 원정 (633년)
633년 4월: 살리실[5] 전투 (승), 알 마드하르[6] 전투 (승), 우발라 함락 → 첫 지즈야 납부
633년 5월: 왈라자 전투 (승), 울라시스 전투 (승), 아라비아 북부의 반란, 1차 다우맛 알 잔달 전투 (승)[7], 알 히라 함락[8] → 라흠 왕국 멸망
633년 6월: 안바르 포위
633년 7월: 아인 알 타므르 전투 (승), 안바르 함락
633년 8월: 2차 다우맛 알 잔달 전투 (승)
633년 11월: 무자야흐 전투 (승), 사니이 전투 (승), 주마일 전투 (승), 이라크의 이란 군대 괴멸
634년 1월: 피라즈 전투 (승) 이란-로마 연합군 격파
1차 시리아 원정 (634년)
634년 4월: 말흐 알 라힛 전투 (승)[9]
634년 6월 : 팔미라 함락, 알 콰레야틴 전투 (승)[10]
634년 7월: 보스라 함락[11], 야쿠사 전투 (승)[12]
634년 8월: 아인나딘 전투 (승)[13], 마르 알 사파 전투 (승)[14], 다마스쿠스 포위[15], 아부 바크르 붕어[16]
634년 9월: 산티나 알 우캅 전투 (승)[17], 다마스쿠스 함락, 마라 알 데바 전투 (승)[18]
634년 10월: 아블라 전투 (승)[19]
2차 시리아 정복 전쟁 (635 ~ 636년)
635년 1월: 파흘 전투 (승): 팔레스타인 로마군 소멸
635년 2월: 티베리아스 함락, 2차 아이나딘 전투 (승)
635년 가을: 다마스쿠스 전투 (승)[20]
635년 가을-겨울: 하마, 마라트 알 누만 함락.[21]
635년 12월: 에메사 (홈스) 포위[22]
636년 3월: 에메사 함락
636년 7월: 무슬림 군대가 야르무크 평원에 집결[23]
636년 8월: 야르무크 전투 [24]
636년 11월: 예루살렘 포위[25]
3차 시리아 정복 전쟁
637년 4월: 예루살렘 함락
637년 6월: 하지르 전투 (승), 칼키스 항복
637년 8월: 알레포 포위
637년 10월: 알레포 항복[26], 아자즈[27] 함락, 안티오크 철교 전투[28] (승), 안티오크 항복[29]
637년-638년: 카이세리, 세바스티아, 말라티야 습격, 카파도키아의 키지르마크 강 도달[30]
북부 메소포타미아[31] 평정 & 아르메니아 원정
638년 3월: 자지라에서 아랍 기독교도들의 봉기[32]
638년 여름: 에메사 전투 (승)[33], 자지라 평정[34]
638년 가을: 에데사, 아미다, 말라티야 함락[35]
638년 말: 게르마니케아 함락 [36]

632 ~ 638년의 7년간 할리드는 미친 듯한 활약을 보였다. 그 시기 이슬람 군대가 행한 전투 중 70% 이상은 그가 지휘관 혹은 장군으로 참전했고, 100%의 승률을 자랑했다.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의 도시들은 할리드의 이름만 듣고도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하기 일쑤였으며, 할리드의 친위대(Mobile guard)는 지고 있던 전투도 승리로 역전시켰던, 몽골 제국의 제베의 특공대를 능가하는 위엄을 보였다. 이슬람 팽창에서 할리드의 활약을 빼면 내용이 별로 없을 정도...

다만 승리를 신의 뜻이 아닌 할리드의 공으로 돌리는 여론을 탐탁지 않아한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는 그를 총사령관에서 해임했고 신중한 아부 우바이다를 그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우바이다 역시 할리드를 존중하여 중용했고, 레반트 지역의 운명을 결정지은 야르무크 전투 시에는 총지휘권을 야전에 능한 할리드에게 넘기기까지 했다. 이슬람 팽창기에 할리드의 활약이 없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할리드를 해임했던 우마르도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을 만큼 성격도 큰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2.6. 해임과 말년

파일:14693554561_e385b9677c_o(1).jpg
그가 말년을 보낸 시리아의 도시 홈스에 건립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사원

그러나 너무 뛰어난 활약으로 민중들에게 신으로까지 추앙받을 정도가 되자,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는 그를 장군직에서 해임했다. 이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교리 때문이었다.[37] 그렇지만 해임당하기는 했어도 위낙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뭇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존경을 받았고, 우마르는 나중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를 해임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한다. 할리드는 자신을 해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마르에게 계속해서 충성을 바쳤고, 4년 뒤에 에메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때 장군의 몸이 되어 전장에서 죽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는데, 그의 부인이
"알라의 검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 전쟁에서 져서 죽으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라며 위로하자 그제야 편히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사실 642년의 니하완드 전투 이후 이란 정복을 결심한 우마르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은퇴한 할리드를 사령관으로 선임하려 했다. 하지만 그 소식이 닿기 전에 할리드가 임종했다고 하니 안타까울 다름이다. 다만 이란 정복은 압둘라 이븐 우스만의 지휘로 순조로히 이루어지긴 했다.

3. 평가

전쟁의 신 할리드의 활약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랍보다 국력이 압도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패배하게 되어 멸망하게 되었고, 동로마 제국 역시 레반트 지역을 이슬람 제국에게 빼앗겨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아라비아 반도를 고작 3개월 만에 통일하고, 6년 만에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로마 제국령을 털고 다녔으며 패전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먼치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최고의 명장이었다. 물론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로마가 서로 목숨걸고 물어뜯으며 싸운 이후였기에 저 둘의 힘이 약해진 상태에서 어부지리로 얻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저 정도의 성과를 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 이슬람권에서의 평가

이렇게 가공할 만한 활약으로 초기 이슬람 전파에 큰 공을 세운 데다가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후 부활의 길을 걷는 듯했던 동로마 제국도 격파하여 레반트와 이집트 일대를 이슬람 제국의 영역으로 포함시킨 덕택에,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존경받는 명장으로 추앙받는다. 테러단체들 중에서 그의 이름을 딴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여단'이라는 단체까지 있을 정도이다.

[1] #[2] 9월[3] 10월[4] 12월[5] 사슬 / 카지마흐 전투[6] 4월 3번째 주, 유프라테스 강 / 우발라 전투[7] 할리드 알 왈리드[8] 5월 말, 라흠 왕국의 멸망[9] Battle of Marj Rahit, 4월 24일, vs 가산 왕국[10] Battle of Al-Qaryatayn[11] 6~7월. 가산 왕국 멸망[12] 7월 20일, 티베리아스 호수 근처[13] 7~8월, Battle of ajnadayn[14] 8월 19일, Battle of Marj al-Saffar (634)[15] 8월 21일 ~ 9월 19일, Siege of Damascus (634)[16] 우마르의 즉위 이후 할리드는 총사령관에서 장군으로 좌천됨[17] 할리드가 다마스쿠스를 향하던 동로마 지원군 격파[18] Battle of Maraj-al-Debaj[19]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베이루트 인근에서 로마군에 포위되어 있었던 아부 알 쿠다스의 군대를 구원. 10.15[20]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친위대만을 이끌고 테오도로스의 다마스쿠스 탈환 시도 격퇴[21] 무슬림 군대는 일시적으로 킬리키아 지방의 마라쉬 (현재 터키)까지 점령했다.[22] 원래 칼키스와 에데사는 아부 우바이다와 1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으나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대규모 군대를 안티오키아에 군집시키자 아랍 측은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두 도시를 포위했다.[23] 이라클리오스의 포위 후 각개격파 전술을 간파한 할리드가 아부 우바이다에게 간언한 전술이 채택된 것이다. 점령지의 무슬림 군대는 전부 도시를 버리고 후퇴했다. 경기병대가 강점인 아랍 군대는 전통적으로 회전에 강했다. 자비야 평원에서 야르무크 평원으로 이동하던 아랍 군대의 후미는 할리드와 그 친위대가 지켰고, 동로마군의 선발대를 격파하여 기선을 제압했다.[24] 8월 15 ~ 21일, 할리드의 지휘. 이후 이라클리오스의 레반트 포기[25] ~ 637년 4월, 무슬림 군대는 수비군의 식량이 바닥나기만을 기다렸다. 이후 총대주교는 칼리파 우마르에게 직접 항복한다는 조건으로 백기를 들었다.[26] 항복 후 동로마군 사령관 요아킴은 4,000명의 그리스 병사들과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충실한 장군이 되었다.[27] 현재 시리아 북부 터키와의 국경도시. 터키 도시인 킬리스와 마주하고 있으며, 알레포와 가지안테프 중간 쯤에 있다. 이들리브 - 알레포 - 킬리스 - 가지안테프로 도로가 이어진다. 안티오크 포위의 전초전[28] 아이나딘 전투와 야르무크 전투 다음으로 동로마 측이 가장 큰 인명 손실을 본 전투.[29] 10월 31일. 패잔병들은 동로마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30] 할리드의 원정대[31] 자지라[32] 이라클리오스 황제의 사주를 받았다.[33] 7월경으로 추정됨. 할리드가 지휘하는 친위대의 대승리. 기독교 아랍인들의 후퇴[34] 8월[35] 할리드 이븐 왈리드와 리야드 이븐 가늠[36] 현재. 터키의 카라만마라쉬.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킬리키아 관문을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던 중 할리드의 군대와 간발의 차이로 접촉을 피했다. 시리아를 두고 후퇴하며 그가 남긴 시는 헤라클리우스 문서의 후반 부분 참고[37] 물론 진짜 목적은 할리드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