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6b6b, #008080 20%, #008080 80%, #016b6b);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온조왕조 | 우보 | 을음 | 해루 |
제2대 다루왕조 | 우보 | 흘우 | 진회 | |
좌보 | 흘우* | ||
제8대 고이왕조 | 우보 | 부여질 | 진충 | |
* 우보에서 승차. | |||
}}}}}}}}} |
백제국 우보 해루 | 解婁 | |
<colbgcolor=#00A6A9> 직위 | 우보(右補) |
국적 | 부여 ➝ 고구려 ➝ 백제 |
출생 | 기원전 55년 |
사망 | 34년 |
성씨 | 해(解) |
이름 | 루(婁) |
재임기간 (음력) | 백제 우보 |
23년 1월 ~ 34년 2월 (11년 1개월) |
[clearfix]
1. 개요
백제 온조왕 ~ 다루왕 대의 대신.2. 생애
전씨세보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남쪽으로 옮겨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 중 한 명이다.[1]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해루는 본래 부여 출신의 사람이었으나 온조왕이 고구려를 떠나올 때 함께 남하해 왔다. 이 말이 참이라면 해루는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함께 따라 나섰다가 온조왕이 남하하자 이를 또다시 따라 나서 백제 건국을 도왔으니 무려 두 나라의 건국을 도왔다고 할 수 있다.(...)23년(온조왕 41년)에 우보 을음이 죽었는데 이에 온조왕은 해루가 지식이 많고 나이가 70세가 넘도록 힘이 줄지 않는다며 그를 우보로 삼았다. 우보는 당시 좌보와 함께 백제의 재상직이자 최고위직이었다.[2]
34년(다루왕 7년) 2월에 해루는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70세가 넘어 재상직을 지내고도 죽지 않고 무려 10년 이상 자리를 지킨 셈. 온조왕은 동부 사람인 흘우로 하여금 뒤를 이어 우보의 관직을 내렸다.
3. 기타
백제의 대성팔족 가운데 하나인 해(解)씨 가문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가장 먼저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해씨 가문의 시조로 추정되기도 한다. 한편 해루가 부여출신이며, 그 성씨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부여 왕실의 성씨인 해(解)씨라는 사실 때문에 초기 백제의 건국 세력이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고구려 계통이라기보다 부여 계통에 더 가깝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백제가 2세기 중후반 임진강 일대에 처음 출몰했을 당시 오로지 압록강 이남 고구려 양식만이 나타날 뿐 당대 부여 양식이 일체 나타나지 않아 백제 건국 세력은 순수한 고구려 세력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부여인 해씨'는 고구려의 건국 세력 중 하나인 졸본부여계 고구려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동부여나 북부여에서 남하하기에 임진강 일대는 너무 서쪽이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실제 건국 연대는 사서의 기록(기원전 1세기)과 달리 기원후 2세기 중후반이라는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에, 해루는 실제로는 2세기 중후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1] 십제공신으로 이름이 기록된 사람 가운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오간, 마려, 을음, 해루, 흘우 등이며 나머지는 전씨세보에서만 이름이 언급된다.[2]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7대 차대왕 때까지 나오는 직위다. 삼국사기 기록을 그대로 믿으면, 백제 왕실이 고구려에서 내려왔는데 재상직인 좌보, 우보는 고구려보다 먼저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