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가 실업축구로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홍콩이 영국 시스템의 세미프로리그를 운영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축구 리그를 운영하고 있었고, 현실적으로 한국 선수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홍콩 리그가 최선의 무대였다. 1969년 허윤정이 이 물꼬를 튼 이후, 1970년대 초 국가대표팀이 아시아 강호로 발돋움하면서 홍콩 리그에서 적극적인 스카우트가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국가대표 골키퍼 변호영을 시작으로 지금도 축구계 레전드로 꼽히고 있는 박이천, 김재한 등이 홍콩 리그에 진출한다.
그러던 와중 대표팀 최고의 유망주이자 주포인 차범근이 덜컥 유럽에 진출해 버리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아시아에만 머물러 있던 국내 축구계의 시선이 처음으로 축구 본류인 유럽을 향하게 되었고 거기다 차범근이 첫 풀타임 시즌부터 주전을 확보하면서 리그에서 손꼽히는 공격수에 올라가 이후 80년대에는 일약 해외 진출 붐이 일게된다.
대한민국 축구 선수 최초로 해외 리그에서 뛴 선수는 1964년 AFC 아시안컵과 1964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로 활동하신 허윤정 옹이다. 전설의 축구팀 양지 축구단의 멤버이기도 했던 그는 1969년 팀에서 나와 당시 아시아에서 제일 강하고 선진적인 리그였던 홍콩 리그 싱 타오팀에 입단해 1시즌간 활약했다.[2] 다만 워낙 오래전 일이다보니 세부 스탯이 남아있지 않는다.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유럽파가 탄생한 시즌. 1978년 12월 공군 전역을 앞두고 있던 차범근 선수가 독일로 떠나 여러번의 입단 테스트 끝에 무려 1부리그인 SV 다름슈타트 98 입단에 성공하면서 곧바로 데뷔전까지 치러 역사상 첫 한국인 분데스리가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차범근의 78-79 시즌은 단 1경기 출장에 그친 채 끝나버리고 마는데, 바로 공군 입대 당시 약속 받았던 의가사 전역 공약이 이행되지 않아 남은 5개월여치 복무를 그대로 이행하라는 지시로 인해 곧바로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에누리 없이 2년 6개월간의 공군 복무를 마치고 1979년 5월 31일 전역과 동시에 차범근은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독일로 향한다.
차범근이 공군 전역 이후 완전한 첫 풀시즌으로 분데스리가에 나타난 시즌이다. 또 차범근을 1경기만 뛰고 돌려보내야 했던 SV 다름슈타트 98은 아예 한국인 선수 김진국과 김민혜 2명을 더 영입해 시즌을 치렀다. 첫 풀타임 시즌에서 차범근은 12골이나 잡아내는 등 단숨에 프랑크푸르트의 주전으로 올라서는 활약을 보이며 1년전 임팩트가 우연이 아님을 입증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가 UEFA컵에서 우승하면서 차범근은 유럽 진출 2년도 안 되어 유럽컵 타이틀을 따낸 선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