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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퍼시(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출생 1421년 7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
사망 1461년 3월 29일 (향년 39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토우턴
아버지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어머니 엘레노어 네빌
형제 존, 토머스, 캐서린, 조지, 랄프, 리처드, 윌리엄, 조앤, 앤
배우자 엘레노어 포이닝스
자녀 앤, 마거릿, 헨리, 엘리자베스
직위 포이닝스 남작,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가 토우턴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421년 7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콘필드에서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곤트의 존의 딸인 조앤 보퍼트의 딸 엘레노어 네빌의 아들로 출생했다. 1426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35년 6월 25일 아버지와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의 주선으로 서식스 포이닝스의 리처드 포이닝스 남작의 딸이자 상속녀인 엘레노어 포이닝스와 결혼했고, 아내의 자격으로 포이닝스 남작을 칭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잉글랜드 남부의 상당한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1440년 4월 1일 스코틀랜드 국경 동부 변경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4년간 맡다가 1444년과 1445년에 잇달아 연장되어 7년을 더 수행했다. 이 직책에는 베릭 성의 관리 및 방어 책임도 포함되었다. 1448년 5월 아버지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던바 성과 돔프리스를 약탈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이에 대한 복수로 노섬벌랜드의 안윅 성과 워크워스 성을 공격해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정부ㅢ 지시에 따라 더럼에서 5,00 병력을 이끌고 돔프리스셔를 습격했지만, 10월 23일 사크 강변에서 스코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생포되었다. 헨리 6세는 그가 포로 생활에서 석방되도록 퍼시 가문이 지출한 몸값을 보상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헌납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분쟁이 계속 벌어지자, 잉글랜드 정부는 포이닝스 남작, 그의 아버지 및 다른 스코틀랜드 변경 귀족들이 의회에 출석하기 보다는 국경에 머물면서 스코트랜드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걸 허용했다. 1451년 여름, 포이닝스 남작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휴전이 임박한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사절단과 협상했따. 1455년 7월, 그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베릭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헨리 6세로부터 칭찬받았다.

1440년대 후반, 노섬벌랜드 백작인 그의 아버지를 모시는 요크셔 소작인들은 요크 대주교의 이웃 소작인들과 거의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노섬벌랜드 백작과 요크 대주교 간의 무력 충돌이 종종 벌어지자, 헨리 6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1448년 잉글랜드 북부로 가서 양자를 중재했다. 1448년 그의 친척인 로버트 포이닝스가 노섬벌랜드 백작의 가신들에게 서식스 영지에서 쫓겨났다. 1년 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로버트 포이닝스가 봉토로 받은 켄트의 뉴잉턴 버트램 영지를 습격했다. 로버트는 이때 심각한 약탈 행위가 벌어졌으며, 자신은 3년간 법적 구제책을 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1450년대 초,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포이닝스 남작의 동생인 에그레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는 1453년 8월 24일 7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요크 근처 헤워스에서 노커스 네빌과 모드 스탠호프의 결혼식을 습격했다. 다행히 신랑과 신부, 그리고 하객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의 갈등이 심화했다, 1453년 10월 8일, 아버지의 원정군에 가담하여 요크셔의 거점 탑클리프에서 샌드허튼에 주둔한 네빌군과 대치했다. 양측 모두 해산하라는 왕의 명령을 무시했고 전투는 불가피해 보였지만, 결국 휴전이 성립되었고 양군은 철수했다.

1455년 5월 22일,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포이닝스 남작 헨리 퍼시는 아버지가 왕을 위해 복무했다가 전사했기 떼문에 왕실에 구제금을 지불할 필요없이 제3대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1458년 10월 런던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위시한 주요 귀족이 서로의 손을 잡고 행진하며 화해를 도모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그는 여기에 참석하려 했지만, 너무 많은 병력[1]을 이끌고 도착했기에 런던 시는 그의 진입을 거부했다. 이후 왕실은 내전을 피하고 싶었기에 그와 동생 토머스 퍼시는 각자 4,000 파운드 이상을 받았다.

1459년 10월 여러 범죄로 고발된 요크 가문 추종자들을 반역자로 낙인 찍힌, 소히 악마 의회에 참석했다. 1460년 12월 30일, 헨리 퍼시는 랭커스터군 중앙 부대를 이끌고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아들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그리고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처단했다. 1461년 2월 17일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격파했지만 런던 입성은 런던 시민들의 항전 의지로 인해 좌절되어 잉글랜드 북부로 후퇴했다. 그 후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선봉대를 지휘했지만 참패를 면치 못했고, 근접전 도중에 죽거나 중상을 입은 뒤 곧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요크의 세인트 데니스 교회에 안장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토우턴 전투에서 승리한 뒤 1461년 11월에 개최한 의회에서 퍼시 가문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그의 아들 헨리 퍼시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3. 가족

  • 엘레노어 포이닝스(1442 ~ 1484): 포이닝스 남작 리처드 포이닝스의 딸.
    • 헨리 퍼시(1449 ~ 1489): 1459년 에드워드 4세와 화해한 뒤 제4대 노섬벌랜드 백작이 되었다.
    • 앤 퍼시(1444 ~ 1522): 로든의 토머스 헝거퍼드 경과 초혼, 로렌스 레인스퍼드 경과 재혼, 토머스 본 경과 삼혼.
    • 마거릿 퍼시(1447 ~ ?): 윌리엄 기스코인의 부인.
    • 엘리자베스 퍼시(1460 ~ 1512): 볼튼의 제6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스크루프의 부인.

[1] 약 1,500명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