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천
세대 | 알파 | 뉴 알파, 알파 DOHC | 개선 알파 | 알파 VVT | 알파-Ⅱ · 1.4 알파 VVT |
EMS 버전 | 2 | 7 | 7.9.8 | ||
EMS 비트 수 | 8 | 16 | |||
컨트롤러 | ECM+TCM | ECM+TCM 일부사양 PCM | PCM | ||
컨트롤러 위치 | 실내[1.4제외] | 엔진룸 | |||
점화 계통 | 배전기 | DLI | CoP | ||
자동변속기 | A4AFx | A4CF1[HDc] |
- 한국 내수 액센트(X3) 중, 지멘스 EMS 채용 사레 있음.
- 북미 OBD-Ⅱ 대응 뉴 알파 및 알파 DOHC의 경우, EMS 버전 4.1
- SOHC : 별체식 유압 태핏, DOHC : 직동 유압 태핏
2. 여담
- 1984년 중반, 마북리 연구소에서 설계에 돌입했었다. 1988년경에 린번 사양 개발도 착수했다.
- 이 엔진의 개발과 관련해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 엔진의 개발을 주도한 사람은 현대자동차의 전 부회장 이현순[3]인데, 당시 그를 제외한 경영진 모두가 엔진 개발을 반대했었다. 오직 정주영 회장은 그를 믿었기에,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 당시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에서 사오는 부품 대금을 주식으로 지불해, 미쓰비시가 대주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초 미쓰비시는 현대의 엔진 개발을 알고도 실패할 것이라 생각해 별 간섭을 하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자 정주영 회장이 현대전자 설립에 골몰하는 동안 대주주 파워를 이용해 이현순을 해임하기도 했었고, 정주영 회장에게 기술도입료를 반으로 깎는 대신 엔진 개발을 중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왕회장은 현대전자 설립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현순을 즉각 복직시키고, 미쓰비시의 기술도입료 인하 제안을 거절하고 이런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보니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에 더 자신감을 얻고 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는 현대가 미쓰비시의 기술 종속을 벗어나는 큰 계기가 되었다.
- 미쓰비시의 집요한 압박과 회유 시도에도 현대자동차와 이현순의 엔진 개발은 진전했다. 이에 경악한 당시 컨설턴트이자 미쓰비시 전 회장(상담역)이었던 구보 도미오(久保富夫)는 귀국 즉시 미쓰비시연구소로 가서 퇴근 중지 명령을 내린 후, 연구원들에게 "내가 지금 한국에서 오는데 현대차에 독한 놈이 한 놈 있다. 너희들 지금처럼 슬렁슬렁하다가는 10년 내로 기술 배우러 현대차에 갈 거다. 정신 차려라."라고 경고했다.[4] 결국 구보 전 회장의 경고는 미쓰비시 자동차가 1990년대 후반 이후 하락세를 걷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GEMA를 통해 세타 엔진을 기반으로 미쓰비시 4B1 엔진을 개발하면서 되려 미쓰비시 자동차가 현대차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 입장이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 이현순 박사의 회고에 따르면, 정주영 회장을 제외한 현대자동차 내부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독자 엔진 개발이 비교우위론에 따라 필요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한다. 엔진 개발 당시 정부의 한 고위 관료는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자동차 회사에서 박사가 할 일이 없으니 (대학교) 교수로 가시라”고 말했는데, 자동차는 독자 기술을 개발할 역량도, 부품사 인프라도 없으니 기술을 받아서 쓰자는 주장이었다. 현대자동차 울산 연구소장조차 “니들이 무슨 실력으로 미쓰비시를 뛰어넘느냐. 돈만 날리고 너희들은 안 될 거야. 웃기지 마”라고 비판했다. 그의 보직 해임도 소위 '친(親)미쓰비시' 인물들이 했을 정도로 당시 독자 엔진 개발은 현대자동차 내부의 견제를 넘어 내란이 일어날 수준이었다. 오직 정주영의 지지만으로 엔진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정주영은 미국에서 이현순 박사를 영입할 때 “세계 시장에 나가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엔진을 개발해 다오”라고 주문했다고 한다.[5]
- 엔진 개발 당시 엔진 제작비는 한 대당 2,000만 원으로, 80년대 후반 은마아파트 30평대 한 채에 달했다. 변속기 개발까지 포함한 전체 개발비는 1,000억 원으로 은마아파트 5,000채에 달하는 자금이 투입되었다.
- 1991년 제1회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한 영광을 안았다. 당시 이 사실을 대서특필한 언론 보도나 현대자동차의 광고를 보면 알파엔진 개발을 자동차 엔진 국산화의 쾌거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6][7]
- 흔히 알파 엔진 개발 직전~직후까지 현대의 기술적 기반이 미쓰비시라 알려져 있고 당시 기준 사실이었다. 또한 이 엔진을 설계할 때, 기존 레이아웃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보어 및 실린더 스페이싱을 포함한 각종 치수도 뉴-오리온의 치수를 답습했다. 아무래도 첫 독자개발인데다, 이 엔진을 최초 탑재한 바디 및 섀시는 여전히 미쓰비시 설계였기 때문이다. 설계까지 현대가 한 완전 100% 독자개발 엔진은 1.8/2.0L 사양의 베타 엔진이다.
[1.4제외] [HDc] 위에둥 한정[3] 서울대학교 기계공학 학사,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교육대학원 기계공학 박사. 현대차 연구개발본부 담당부회장을 역임한 뒤 두산그룹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다가 중앙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4] 「“로열티 50% 깎아줄게 이현순 내보내라” 미쓰비시 제의 거절 10년 만에 기술 추월」, 주간조선, 2012-09-02.[5] 「"반드시 성공 일념, 주 7일 밤을 새며 개발"…'은마 5000채' 자본 R&D 쏟아부어 엔진 독립」, 서울경제, 2025-02-02.[6] 「IR52장영실상 금주의 蔣英實賞(장영실상) IR52 本社(본사)·産技協(산기협) 공동주관 每週(매주)시상 엔진設計(설계)서 제작 완전國產化(국산화)」, 매일경제, 1991-01-07.[7] 「해시계,물시계,측우기…그리고 알파엔진!」, 매일경제, 1991-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