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혜암 스님(慧庵, 1885년 ~ 1985년 5월 19일)은 경허와 만공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 선불교의 법맥을 이은 고승으로, 조계종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을 역임하였다. 여느 선지식처럼 기이한 언행보다는 묵묵한 수행과 정진을 통해 선풍을 드높였으며, 100세가 넘는 생애 동안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많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한 인물이다.2. 생애
| 혜암스님 다비식 |
어린 시절부터 지극한 효심을 지녔으며, 어머니가 찾아오자 출가자 신분임에도 외면하지 못하고 지극히 보살폈다. 17세에 어머니마저 여읜 그는 전국의 선원을 돌며 6년 간 운수행각을 떠났고, 이후 해담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성월 스님에게서 화두를 받아 본격적인 참선 정진에 들어갔다.
만공, 혜월, 용성 등의 선지식을 시봉하고 법거량하며 끊임없는 수행을 이어갔고, 마침내 깊은 용맹정진 끝에 오도의 경지를 이루었다. 이 수행의 공덕을 인정받아 1929년 수덕사 조실이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전법게와 함께 '혜암'이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3. 활동
- 전국 선원에서의 오랜 정진과 용맹정진 실천
- 만공 스님의 전법을 계승, 덕숭선맥 유지
- 1985년 덕숭총림 초대 방장 추대
- 재가자 대상 참선 지도 및 대중 설법
- “공부에는 출·재가의 구분이 없다”는 가르침 설파
4. 법맥
| 세대 | 이름 |
| 1세 | 경허 스님 (鏡虛, 1849~1912) |
| 2세 | 만공 스님 (滿空, 1871~1946) |
| 3세 | 혜암 스님 (慧庵, 1885~1985) |
5. 평가
혜암 스님은 무애한 언행보다는 철저한 정진과 정묵한 수행으로 선가의 본분을 보여준 선사로 평가된다. 조계종 총림 체제 정비의 출발점이 된 덕숭총림 초대 방장으로 선풍을 드높였으며,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참선 수행을 멈추지 않아 ‘수행자의 표상’으로 남았다.6. 선관법요
저서로 선관법요가 있다. 아래는 선관법요의 일부분이다.수덕사(修德寺) 수계법문(受戒法門)
수덕사에서 기유년(己酉年) 동안거(冬安居)의 결제(結制)를 기(期)하여 비구니 수계산림(受戒山林)을 열고, 혜암(惠菴) 스님, 춘성(春城) 스님을 모시게 되었다. 이 법회에서 비구니의 선문답(禪問答)이 있었다.
처음에 혜암 스님, 또 그 다음에 춘성 스님의 계법문이 있었다.
춘성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혜암 스님은 자기 처소로 돌아가신 후 시자에게 “나는 귀가 어두워 다른 스님의 법문을 못 들었다. 네가 다시 말해 보라.” 하셨다.
시자가 말하기를 “춘성 스님이 법상에 오른 후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삼십년 전에 만공(滿空) 스님의 법어(法語) 한 가지 입니다.’ 하고, 이어 ‘만공 스님이 그 방장실(方丈室)에 쳐 놓은 십우도(十牛圖) 병풍의 견적(見跡)을 가리키면서 <소가 없는데 왜 그 발자국이 앞에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그 때에는 아무도 거기 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대중 스님네는 이 법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 번 일러 보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비구는 나와 춘성 스님께 절을 하고는 돌아가 앉았고, 한 비구니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춘성 스님께 반배(半拜)하고 “음매, 음매.” 하면서 송아지 우는 소리를 냈읍니다.
“그 때 월산(月山)스님은 ‘시자야, 저에게 꼴을 한 줌 갖다 주어라.’ 하셨으며, 혜공(惠公) 스님은 ‘와, 와!’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혜암 스님은 “그 때 만일 이 혜암 같으면, ‘음매, 음매!’ 할 때에는 더 큰 소리로 ‘음매, 음매!’ 하였을 것이요, 풀 한 줌 갖다 주라 할 때에는 풀뜯어 먹는 시늉을 내었을 것이며, ‘와, 와!’ 할 때에는 잠깐 말을 그쳤을 것이요, 또 참으로 알고 절했다면 나도 웃으면서 절했을 것이다.” 하시고, 이어 “구름 밖에 벗어난 토끼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고, 해 다 진 저문 날에 굶주린 매가 토끼 잡아 먹을 줄 알지 못하며 속절없이 혼자 울기만 하는구나.”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고인(古人)의 말에 문처분명 답처친(問處分明答處親)이라, ‘묻는 곳이 분명하여야 답하는 곳에 친합한다’ 한 것이다.” 하셨다.
수덕사에서 기유년(己酉年) 동안거(冬安居)의 결제(結制)를 기(期)하여 비구니 수계산림(受戒山林)을 열고, 혜암(惠菴) 스님, 춘성(春城) 스님을 모시게 되었다. 이 법회에서 비구니의 선문답(禪問答)이 있었다.
처음에 혜암 스님, 또 그 다음에 춘성 스님의 계법문이 있었다.
춘성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혜암 스님은 자기 처소로 돌아가신 후 시자에게 “나는 귀가 어두워 다른 스님의 법문을 못 들었다. 네가 다시 말해 보라.” 하셨다.
시자가 말하기를 “춘성 스님이 법상에 오른 후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삼십년 전에 만공(滿空) 스님의 법어(法語) 한 가지 입니다.’ 하고, 이어 ‘만공 스님이 그 방장실(方丈室)에 쳐 놓은 십우도(十牛圖) 병풍의 견적(見跡)을 가리키면서 <소가 없는데 왜 그 발자국이 앞에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그 때에는 아무도 거기 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대중 스님네는 이 법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 번 일러 보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비구는 나와 춘성 스님께 절을 하고는 돌아가 앉았고, 한 비구니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춘성 스님께 반배(半拜)하고 “음매, 음매.” 하면서 송아지 우는 소리를 냈읍니다.
“그 때 월산(月山)스님은 ‘시자야, 저에게 꼴을 한 줌 갖다 주어라.’ 하셨으며, 혜공(惠公) 스님은 ‘와, 와!’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혜암 스님은 “그 때 만일 이 혜암 같으면, ‘음매, 음매!’ 할 때에는 더 큰 소리로 ‘음매, 음매!’ 하였을 것이요, 풀 한 줌 갖다 주라 할 때에는 풀뜯어 먹는 시늉을 내었을 것이며, ‘와, 와!’ 할 때에는 잠깐 말을 그쳤을 것이요, 또 참으로 알고 절했다면 나도 웃으면서 절했을 것이다.” 하시고, 이어 “구름 밖에 벗어난 토끼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고, 해 다 진 저문 날에 굶주린 매가 토끼 잡아 먹을 줄 알지 못하며 속절없이 혼자 울기만 하는구나.”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고인(古人)의 말에 문처분명 답처친(問處分明答處親)이라, ‘묻는 곳이 분명하여야 답하는 곳에 친합한다’ 한 것이다.” 하셨다.
염화미소(拈花微笑)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하실 때 백만억 대중이 모이었다.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그것을 보고 미소(微笑)를 지었다. 가섭은 부처님의 수제자(首弟子)였다.
그런데 가섭은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었던가? 우리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
누가 내게 묻더라도 나는 그 뜻을 전부는 말할 수 없고, 三분의 一만은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가섭의 미소는 무슨 뜻인가?
그 웃음은 비웃음의 웃음이다.
비웃음의 뜻을 알면 세존께서 꽃을 드신 뜻도 알 수 있고, 가섭이 미소한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중은 말해 보라.
가섭이 무슨 뜻으로 비웃는 웃음을 지었던가?
만일 나에게 묻는다면 "같잖다는 생각으로 웃었느니라." 하리라.
부처님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하실 때 백만억 대중이 모이었다.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그것을 보고 미소(微笑)를 지었다. 가섭은 부처님의 수제자(首弟子)였다.
그런데 가섭은 무엇 때문에 미소를 지었던가? 우리는 그 뜻을 알아야 한다.
누가 내게 묻더라도 나는 그 뜻을 전부는 말할 수 없고, 三분의 一만은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가섭의 미소는 무슨 뜻인가?
그 웃음은 비웃음의 웃음이다.
비웃음의 뜻을 알면 세존께서 꽃을 드신 뜻도 알 수 있고, 가섭이 미소한 뜻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중은 말해 보라.
가섭이 무슨 뜻으로 비웃는 웃음을 지었던가?
만일 나에게 묻는다면 "같잖다는 생각으로 웃었느니라." 하리라.
불교(佛敎)와 기독교(基督敎)의 동일점(同一點)
부처님께서 가비라국 정반왕(淨飯王) 왕가(王家)에 태어나실 때, 대지(大地)에 광명(光明)을 놓아 시방 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비추시고 땅에서는 금련화(金蓮花)가 솟아나 그의 두 발을 받드니, 그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칠보(七步)를 걸으시고, 두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시며, 사자후(獅子吼)하시기를 “상하사유(上下四維)에 무능존아자(無能尊我者)라.” 하셨다. 이것은 ‘하늘과 땅 또 사방에 나보다 높은 자가 없다’는 뜻이다. 또 ‘태자 서응경(太子署應經)’에도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곧 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제일 높다.” 하셨다.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온갖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가세존의 이 말씀의 근본 뜻은 바로 알기 어렵다. 서가세존의 ‘오직 <나>만이 홀로 높다’ 하신 이 말씀은, 서가 자신 곧 육신(肉身)이 홀로 높다는 뜻이 아니다. 일체 중생, 심지어 저 곤충까지도 천상 천하에 가장 높은 <나>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존께서 세상에 나시면서 그 진리를 교시(敎示)하시기 위하여 세존 자신이 홀로 높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지 아니한다. 기독교 ‘성경(聖經)’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곧 영생(永生)을 얻으리라.” 하였다. 그런데 이 말에 <나>라고 한 말씀은 예수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가진 참 <나>를 가리킨 말인 것이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천국(天國)에 갈 수 있겠읍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나>를 따르라는 말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물으면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이라 하니,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본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서가세존의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높다’는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요, 예수님의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하신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사상법(事相法)으로 말하더라도 밖으로 쓴즉 나타나고, 안으로 거두운즉 감추는지라, 밖으로 공경하는 것을 들어서 안으로는 참된 성품을 밝히고, 나의 성품과 밖의 형상이 서로 응함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불상(佛像)을 위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로 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도리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우상은 배척해야 된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식 밖의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우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성경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부처님도 예수처럼 믿을 것이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가는 한 가정에서도, 부모는 불교도요 자녀는 기독교도라 해서 그 의견이 서로 같지 않음을 흔히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도 불교를 믿는 부모에게 효도를 달리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불교를 믿는 부모들도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달리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는 진리(기독교와 불교)가 겉으로는 다르지마는, 그것은 마치 물은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와 같이 모든 종교의 진리가 하나임을 알아야 하며, 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채, 남의 옳지 못한 말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금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비유를 들어 보이리라.
가령 달 밝은 밤에 접시 · 사발 · 동이 · 항아리 등 무수한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보면, 그 그릇마다 달은 다 비추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 등은 곧 접시달 · 사발달 · 항아리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즉 그릇은 각기 다르나 그 달은 같은 달인 것이다. 보라. 청천에 떠 있는 달은 우주에 오직 한 몸만 비추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알면,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깨끗한 정신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에서 철학(哲學)이 어떠니, 심리학(心理學)이 어떠니, 인생관(人生觀)이 어떠니 하고 떠들며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이다. 참으로 위에 것을 달관(達觀)하여 인생이란 것을 철저히 타파(打破)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 자기가 과거에 어디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만 번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하여 이르더라도, 그것은 다 뜨거운 불위의 한 점[一點] 눈[雪]이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글이야 한 자도 모르더라도, 내가 전생에 어디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온 곳을 알아야 한다. 그 온 곳을 진실로 밝게 알면, 따라서 내생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인생관이 성립되는 것이고, 완전(完全)한 인격자(人格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金仙耶蘇本面目 부처님과 예수님의 본래 면목이
人前各自强惺惺 각자 사람 앞에 스스로 똑똑하게 밝았으니,
一坑未免但埋却 다만 한 구덩이에서 면하지 못하고 묻히면
不知身在眼子靑 몸 가운데에 푸른 눈알이 있음을 알지 못하리라.
부처님께서 가비라국 정반왕(淨飯王) 왕가(王家)에 태어나실 때, 대지(大地)에 광명(光明)을 놓아 시방 세계(十方世界)를 두루 비추시고 땅에서는 금련화(金蓮花)가 솟아나 그의 두 발을 받드니, 그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칠보(七步)를 걸으시고, 두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시며, 사자후(獅子吼)하시기를 “상하사유(上下四維)에 무능존아자(無能尊我者)라.” 하셨다. 이것은 ‘하늘과 땅 또 사방에 나보다 높은 자가 없다’는 뜻이다. 또 ‘태자 서응경(太子署應經)’에도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곧 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제일 높다.” 하셨다.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온갖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가세존의 이 말씀의 근본 뜻은 바로 알기 어렵다. 서가세존의 ‘오직 <나>만이 홀로 높다’ 하신 이 말씀은, 서가 자신 곧 육신(肉身)이 홀로 높다는 뜻이 아니다. 일체 중생, 심지어 저 곤충까지도 천상 천하에 가장 높은 <나>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존께서 세상에 나시면서 그 진리를 교시(敎示)하시기 위하여 세존 자신이 홀로 높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지 아니한다. 기독교 ‘성경(聖經)’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곧 영생(永生)을 얻으리라.” 하였다. 그런데 이 말에 <나>라고 한 말씀은 예수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가진 참 <나>를 가리킨 말인 것이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천국(天國)에 갈 수 있겠읍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나>를 따르라는 말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물으면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이라 하니,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본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서가세존의 ‘천상천하에 나만이 홀로 높다’는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요, 예수님의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 하신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사상법(事相法)으로 말하더라도 밖으로 쓴즉 나타나고, 안으로 거두운즉 감추는지라, 밖으로 공경하는 것을 들어서 안으로는 참된 성품을 밝히고, 나의 성품과 밖의 형상이 서로 응함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불상(佛像)을 위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로 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도리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우상은 배척해야 된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식 밖의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우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성경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부처님도 예수처럼 믿을 것이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 가는 한 가정에서도, 부모는 불교도요 자녀는 기독교도라 해서 그 의견이 서로 같지 않음을 흔히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도 불교를 믿는 부모에게 효도를 달리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불교를 믿는 부모들도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달리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는 진리(기독교와 불교)가 겉으로는 다르지마는, 그것은 마치 물은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와 같이 모든 종교의 진리가 하나임을 알아야 하며, 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채, 남의 옳지 못한 말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금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비유를 들어 보이리라.
가령 달 밝은 밤에 접시 · 사발 · 동이 · 항아리 등 무수한 그릇에 물을 떠 놓고 보면, 그 그릇마다 달은 다 비추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 등은 곧 접시달 · 사발달 · 항아리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즉 그릇은 각기 다르나 그 달은 같은 달인 것이다. 보라. 청천에 떠 있는 달은 우주에 오직 한 몸만 비추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알면,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깨끗한 정신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에서 철학(哲學)이 어떠니, 심리학(心理學)이 어떠니, 인생관(人生觀)이 어떠니 하고 떠들며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이다. 참으로 위에 것을 달관(達觀)하여 인생이란 것을 철저히 타파(打破)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 자기가 과거에 어디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만 번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하여 이르더라도, 그것은 다 뜨거운 불위의 한 점[一點] 눈[雪]이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글이야 한 자도 모르더라도, 내가 전생에 어디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온 곳을 알아야 한다. 그 온 곳을 진실로 밝게 알면, 따라서 내생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인생관이 성립되는 것이고, 완전(完全)한 인격자(人格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다.
金仙耶蘇本面目 부처님과 예수님의 본래 면목이
人前各自强惺惺 각자 사람 앞에 스스로 똑똑하게 밝았으니,
一坑未免但埋却 다만 한 구덩이에서 면하지 못하고 묻히면
不知身在眼子靑 몸 가운데에 푸른 눈알이 있음을 알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