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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堀江貴文
1972년 10월 29일 ([age(1972-10-29)]세) 출생
일본의 기업인, 평론가, 방송인. 별명은 통통하며 호감있는 인상인 도라에몽과 본인의 이름인 호리에를 합친 호리에몽이다.
2. 기업 경영
후쿠오카현 야메시에서 평범한 샐러리맨 가정에서 태어났다. 구루메대학 부설중고등학교[1]를 졸업했다.도쿄대학 문학부 재학 중 웹사이트 제작회사인 온 더 엣지를 자본금 600만엔으로 설립하여 벤처기업으로서 사업을 시작하였고, 2002년 경영이 파탄난 옛 웹 기반 기업인 라이브도어의 경영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회사명을 라이브도어로 아예 바꾸고 인터넷 포털사이트 라이브도어와 라이브도어 블로그 서비스로 대박이 난다. 이 시기 전자결제 회사 비트캐시의 인수를 추진하는 등 회사 몸집을 크게 불리고 4년간 일본 IT업계의 거물로 급 성장했다.
2004년에는 당시 경영난에 있던 프로야구 구단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를 인수하려고 했으나 실패한다. 이 사건으로 그의 인지도는 대폭 상승했다. 기업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워간 호리에의 라이브 도어는 2005년에는 후지테레비의 주요 자회사인 닛폰 방송의 주식을 대거 사들여 최대주주가 되어 인수를 추진하여, 이 해 일본의 최대 이슈메이커로 떠올랐다. 승승장구하고 있다고는 하나, 웹 기반 기업의 30대 기업주가 거대언론사를 인수하려고 했다는 발상이 일본사회에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수 자금은 리먼 브라더스에서 800억엔 상당의 대출을 받아서 했기 때문에 이 방식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당시 닛폰 방송의 주식점유를 놓고 후지테레비 측과 호리에 측이 매번 공방을 벌이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영되었고, 호리에는 상대의 반응에 "상정범위내(想定の範囲内)"라고 응수함으로써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 4월 후지 측과 극적으로 화의가 성립하여, 라이브도어의 보유주식을 후지 측에 넘겨 라이브도어는 약 1400억엔의 수입을 거둬들였다.
3. 정치 경력과 구속
2005년 8월 16일, 중의원 해산에 따른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후쿠오카현 제1구에서 출마를 고려했다. 한편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대표와도 회담을 했지만 민주당에서 출마는 보수적 성향 탓에 불발되었다. 그러다가 호리에는 무소속으로 자민당 이탈파인 가메이 시즈카의 선거구 히로시마현 제6구에 출마한다고 발언했다. 비록 84,000표를 득표했지만 튼튼한 조직을 갖고 있던 가메이에게 패배하여 낙선한다.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일본의 국가원수가 천황제로 규정되어 있는 헌법에 회의감을 느낀다",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 등의 정견발표 등에 의해 자민당 내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절정을 구가하던 호리에는 2006년 1월 도쿄 지검 특수부에 의해 증권거래법 위반혐의로 조사를 받은후 체포되었고 이후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한다. 2007년 3월 1심 공판에서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날 항소, 보석금 2억엔을 납부하고 재보석상태에 있다가 2011년에 형이 확정되어 2년 정도 복역하였었다. 하지만 2021년 현재까지도 본인은 잘못한 것이 없으며,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역 기간 동안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며 복역 중에도 연 매출 1억엔 가량을 벌어들었다고 한다. 호리에가 복역 할때를 생생하게 그린 《감옥에서》(刑務所なう)란 만화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그의 손을 떠난 라이브도어는 핵심 사업이던 블로그 서비스를 중심으로 근근히 운영되다가 2010년 당시 네이버의 일본 법인이었던 NHN 재팬이 인수하였다.
4. 석방 이후
2013년에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 후 다시 사업도 하고 방송에 출연하는 등 체포 전과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라이브도어를 인수한 NHN 재팬의 계열사 네이버 재팬에서 LINE을 출시하며 일본 모바일 시장을 잡아먹은 것도 복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비록 호리에나 라이브도어가 라인 개발에 기여한 것이 전무하기는 하지만[2] 라인 주식회사 경영진 가운데 호리에의 부하였던 구 라이브도어 임원 출신도 있는데다 일본에서는 라인이 일본제라는 인식도 있기 때문에 그런 연결고리들을 잘 활용한 것. 일본 미디어에서 라인 관련 뉴스를 호리에에게 해설시키는 경우도 왕왕 있다.2016년 12월에 여장남자 오오시마 카오루와 사귀고 있는 것이 알려졌다.[3]다만 몇달 후에 오오시마 카오루가 다른 뉴하프 배우들와 사귀고 있다는 글을 쓴 것을 보면 오래치 않아 헤어진 듯하다.
이후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가 거론되었고,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대표 타치바나 타카시가 그를 지지하는 '호리에몬 신당'을 세워 신당에서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다마키 유이치로 국민민주당 대표의 유튜브에 출연했다.#
홋카이도 다이키정에 소재하고 있는 인터스텔라 테크놀로지스라는 민간 항공 우주기업도 설립하여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WAGYUMAFIA라는 이름으로 외식사업도 하고 있는데, 하이볼, 1만엔 교자 무한리필이 워낙 비싸서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
니이타니 마사미츠의 신작 뇨키뇨키 크라운드 펀딩 당시 응원의 메세지를 보냈다.
2ch 창립자 니시무라 히로유키와 오랜 맹우로 여겨져왔는데[4] 2020년 절연하고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선 상황이다. 계기는 사소한 불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코로나 시국에서 평소 마스크 착용에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던 호리에가 마스크를 끼지 않고 식당에 들어가려다 점주와 마찰을 빚고 그 가게를 자신의 SNS에서 공개 저격하였고, 결국 점주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가게가 휴업위기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자 히로유키가 그 가게를 지원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였고, 호리에는 히로유키가 크라우드 펀딩을 빌미로 자신을 악역으로 몰아가려고 한다며 절연을 선언하였다. 이후 호리에는 사실 히로유키와는 비즈니스 관계였다면서 관계를 부정하며 틈틈히 히로유키를 저격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부터 현재까지 히로유키가 일본 주요 방송국 및 매체에 계속 출연하는 유명 방송인이 되면서 지위가 역전된 상황.
이후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민간 항공 우주 스타트업체 인터스텔라 테크놀로지 대표 및 요식업체의 대표, 그리고 인플루언서로 여전히 활동 중에 있지만 https://select.mamastar.jp/726580 방송보다 강연 활동 및 책 관련 집필에 집중하고 있다.
2023년에는 일본이 대규모 이민정책을 시행해야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중국의 기업이나 재력가들이 일본의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을 장려해야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고 있다.
5. 기타
- 양성애자이며, 슬하에 전처가 키우고 있는 아들이 있다. 호리에 본인은 양육은 커녕 만나지도 않지만 양육비는 부쳐줬다고 한다.
- 과거 현대자동차가 일본 시장에 처음으로 진출했을 당시, 현대차가 일본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야구 구단을 인수하는 것이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 만약 총선에서 승리해 국회의원이 되는데 성공했다면 곧바로 아베 신조와 대결해서 자민당 총재까지 노릴 심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한창 라이브도어가 잘 나갔을 때는 소니를 인수해서 게임 사업부처럼 돈 될만한 것들은 마이크로소프트 등 군침을 흘리던 미국 대기업들에게 팔아버리고, 소니를 슬림한 인터넷 기업으로 변신시킬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 과거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루머가 있었고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심지어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가 일본 검찰과 언론의 먹잇감이 되며 순식간에 몰락한 것은 이런 배경 탓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아다녔다. 이러한 루머가 나돈 이유는 일류 코스가 보장되어있던 도쿄대학 재학생이 취업은 커녕 졸업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인터넷 마케팅 회사를 창업하는 매우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5] 물론 어디까지나 루머에 불과하다.
6. 저서
- 가진돈은 몽땅써라, 2021
[1] 소프트뱅크 회장 손정의가 미국 유학 전까지 이곳에 다닌 고교 선배이며, 손정의의 동생 손태장과는 동창이다.[2] 라인은 네이버 마토메 등을 운영하고 있던 네이버 재팬과 네이버톡 인프라를 갖고 있던 한국 네이버 본사에서 협력해서 개발한 것이다.[3] 주간 문춘 2016/12/15 - 호리에몽(호리에 타카후미), 여장남자 탤런트 오오시마 카오루 열애 보도 호리에몬의 "신연인" 여장 남자는 '20센치 대물' 소유자였다! #[4] 호리에가 감옥에 들어갈 때에도 동행하였고 호리에의 출소 후에도 잡지에 공동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5] 과거 재일교포들은 일반적인 루트로는 취업이 잘 되지 않아 자영업 아니면 전문직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호리에의 행보가 이에 들어맞는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