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José María Teclo Morelos Pavón y Pérez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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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호세 마리아 테클로 모렐로스 파본 이 페레스 José María Teclo Morelos Pavón y Pérez |
| 출생 | 1765년 9월 30일 |
| 누에바에스파냐 비야돌리드 | |
| 출생 | 1815년 12월 22일 |
| 누에바에스파냐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 | |
| 국적 | |
| 학력 | 성 니콜라스 주교 대학[1] |
| 종교 | 가톨릭 |
| 직업 | 신부 |
1. 개요
멕시코의 독립을 이끈 멕시코 성직자로 멕시코 독립 전쟁의 두 번째 조직 단계에서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2. 생애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는 목수 호세 마누엘 모렐로스와 교사의 딸이자 크리올 여성인 후아나 마리아 과달루페 페레스 파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살 무렵부터 외조부의 학교에서 공부했고, 아버지 마누엘 모렐로스가 가정 문제로 집을 떠나면서 가세가 기울자 14세 때 삼촌의 타우에호 농장에서 일했다. 이후 그는 아타하도르, 노새몰이꾼, 목동 등으로 일하며 농업과 목축을 배웠고, 일하다가 코에 상처를 입어 평생 흉터가 남았다. 11년간 일하며 멕시코시티를 여덟 번 오갔고, 독학으로 문법을 공부했다. 1789년 부친이 사망하자 홀로 된 어머니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2] 그는 25세에 산니콜라스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신부가 되었다.한편 1808년 스페인 아란후에스에서 민중봉기로 마누엘 고도이가 실각하고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그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앉히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 소식이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에 전해지자 모렐로스는 교구의 요청에 따라 스페인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충성을 다짐했다. 그러나 1809년 바야돌리드에서 프랑스 침입에 대비해 자치 정부를 세우려는 음모가 발각되었고, 이 사건에 이투르비데 등 후일의 독립 인물들이 연루되었다. 1810년에는 케레타로에서 또 다른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미겔 이달고, 호세파 오르티스 데 도밍게스, 알렌데, 아바솔로 등이 참여했다. 원래 12월 8일 봉기 예정이었으나, 음모가 발각되자 9월 15일 밤 이달고가 급히 봉기를 결정하고 스페인인을 체포해 자금을 징발하며 멕시코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10월 20일 모렐로스는 차로 근처에서 이달고를 만나 독립운동 참여 의사를 밝혔고, 이달고는 그에게 남부 지역에서 병력을 모으고 아카풀코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주며 ‘남부 지방의 정복과 새 정부를 위한 아메리카 총사령관’ 칭호를 내렸다. 모렐로스는 10월 25일 사목직 사임 허가를 받고, 카라쿠아로에서 무기를 가진 25명을 모집한 후 출정했다. 그는 정의로운 이유라면 사제라도 무기를 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모렐로스는 우에타모에서 병력을 350명으로 늘리고, 무기와 훈련이 없는 대중의 무모한 참여를 막으며 식량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산헤로니모, 코유카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아카풀코를 포위했다. 1811년 1월 벨라데로 언덕을 점령했으나, 아카풀코 요새의 장교 가고가 약속을 어기며 반군을 배신해 퇴각했다. 그러나 모렐로스는 재정비하며 세력을 유지했고, 현지 주민의 지지를 받았다. 테크판에서는 마을을 ‘과달루페 데 테크판 성모’ 주로 승격시키고 세금을 유지하되 병사에 대한 세금을 면제했으며, 교회 재산 일부를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그곳에서 그는 브라보 가문과 비센테 게레로, 훗날 멕시코 초대 대통령이 되는 과달루페 빅토리아를 자신의 휘하에 넣었다. 그러는 사이 미겔 이달고가 아쿨코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도주 중 이달고와 지도자들은 배신자 이그나시오 엘리손도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러자 반군은 급속도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초기 지도자들이 죽은 후 군대는 흩어졌고 눈에 띄는 지휘관이 없었지만, 모렐로스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모렐로스는 이그나시오 로페스 라욘 으로부터 반군 지도부 위원회를 조직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라욘의 제안에 따라 페르난도 7세가 없을 때 국가를 통치할 최고 국민 통치 위원회의 구성원을 선출하였고, 모렐로스는 그곳의 위원이 되었다. 1812년 1월 카예하가 시타쿠아로 전투에서 승리해 평의회가 문서를 잃자, 모렐로스는 병중에도 평의회를 구하기 위해 출정해 테난싱고에서 왕당파를 격파하고 쿠아우틀라로 이동해 수도나 푸에블라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부왕 베네가스는 카예하를 보내 쿠아우틀라를 포위했고, 2월 9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모렐로스는 “스페인도 왕도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싸움은 종교와 조국을 위한 것”이라며 군을 독려했다. 카예하는 식수와 보급을 끊고 시체로 우물을 오염시켜 항복을 강요했으나, 모렐로스는 항복 제안을 거절하며 “그 제안을 너희에게도 돌려준다”고 맞섰다. 어린 소년 나르시소 멘도사는 전투 중 대포를 발사해 적의 돌격을 막아 ‘소년 포수’라 불렸고, 모렐로스는 그에게 상금을 주었다. 63일간의 포위전 끝에 5월 2일 새벽 모렐로스와 독립군은 탈출에 성공했고, 카예하는 분노해 쿠아우틀라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후 그는 수도로 돌아와 멕시코시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쿠아우틀라 전투 후 모렐로스는 중앙 산악지대로 이동해 이수카르, 오쿠이투코, 치텔라, 치아우틀라 등을 점령하고 남부 진격을 준비했다. 그때 동지 레오나르도 브라보가 배신으로 체포되어 1812년 9월 13일 처형되자, 모렐로스는 그의 아들 니콜라스 브라보에게 복수를 허락했지만 브라보는 포로들을 용서해 ‘관대한 장군’이라 불렸다. 이후 모렐로스는 쿠아우틀라 승리로 최고평의회 4번째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오악사카의 발레리오 트루하노를 구원하러 갔다가 그가 전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심한 질병과 결핵으로 고생했지만, 마타모로스와 갈레아나와 함께 중앙 원정과 쿠아우틀라 방어를 계획했다. 라욘은 평의회를 분산 운영하기로 하고 모렐로스를 남부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렐로스는 라욘에게 병력을 보냈지만 양측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는 평의회의 헌법 초안을 검토하며 왕의 이름을 삭제하고 5번째 위원을 추가하자고 제안했으며, 세금 감면과 무기 생산체제 정비 등 개혁을 단행했다. 1812년 11월 그는 테우아칸과 오리사바를 점령하고 오악사카로 진군, 11월 25일 오악사카를 함락시켰다. 2월 13일 오악사카에서 최고평의회에 대한 공식 선서식이 열렸고, 모렐로스는 군중이 왕의 초상 앞에서 환호하는 것을 보며 “그들은 아직도 아메리카의 금화보다 왕의 동전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탄식했다. 이후 그는 오악사카를 떠나 아카풀코를 다시 공격해 1813년 8월 산디에고 요새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식스토 베르두스코가 라욘의 승인 없이 바야돌리드를 공격했다가 패배하자 라욘은 그를 해임했고, 성직자 파블로 델가도를 재판하려 해 논란이 일었다. 이로 인해 라욘, 리세아가, 베르두스코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모렐로스는 침묵을 유지했으나 이 사건으로 라욘과 불화가 생겨 탈푸하우아가 왕당파에 함락되었다. 결국 1813년 5월 모렐로스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며 최고평의회를 개편했다
모렐로스는 카를로스 마리아 데 부스타만테의 제안으로 오아하카에서 기존의 최고군사평의회를 해체하고 칠판싱고 의회를 소집하여 주권을 대표하는 새로운 기관을 창설했다. 라욘은 이를 “총칼의 산물”이라 비난했으나, 모렐로스는 권력 분립을 주장하며 의회 구성을 추진했다. 1813년 9월 13일 칠판싱고에서 회의가 개막되었고, 모렐로스는 ‘국가의 감정(Sentimientos de la Nación)’을 발표하여 노예제 폐지와 모든 국민의 평등을 선언했다. 그는 국민의 칭송으로 최고사령관으로 선출되었으나 “국가의 종”이라 자칭하며 겸손을 보였다. 이후 11월 6일 의회는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을 선포하고 헌법 제정을 시작했다. 그 후 모렐로스는 다섯 번째 원정에서 바야돌리드를 공격했지만, 1813년 12월 23일 산타마리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1814년 1월 4일 푸루아란 전투에서는 부하 마타모로스가 포로로 잡혀 2월 3일 총살되었다. 의회는 모렐로스를 군사 지휘권에서 해임했으나 그는 이후 아파칭간 헌법 제정에 협력하여 멕시코 최초의 헌법 수립에 기여했다. 그는 리세아가, 코스와 함께 최고행정부를 구성해 전쟁을 계속했으나 부하 갈레아나가 전사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모렐로스 정부는 미국과 외교를 시도해 외교사절을 파견하고, 푸루아란에서 멕시코 최초의 군기를 제작했다. 1815년 3월 아리오에서 최고법원이 설치되며 삼권 분립이 완성되었지만,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복귀로 헌정질서가 붕괴되고 이투르비데 등 왕당파가 반격을 강화했다. 반면 게레로, 비토리아, 미에르 이 테란 등이 베라크루스를 장악했으나, 반목과 내분으로 혁명 세력은 약화되었다. 특히 코스가 의회를 부정하고 군권 복귀를 요구하자 모렐로스는 그를 체포했으나, 리세아가의 중재로 처형은 면했다. 결국 1815년 중반 이후 왕당군의 공세로 오아하카와 아카풀코가 함락되고, 9월 29일 모렐로스는 브라보와 함께 의회를 테후아칸으로 호송하며 후퇴했다.
1815년 11월 5일, 모렐로스는 테스말라카(게레로)에서 마누엘 데 라 콘차 대령 휘하의 스페인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의회를 테후아칸으로 호송하던 중 병사들을 구하려다 붙잡혔으며, 함께 포로가 된 200명 중 150명은 그의 눈앞에서 처형되고 50명은 마닐라로 노예로 보내졌다. 체포 소식은 11월 9일 멕시코시티에 전해졌고, 부총독 카예하와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그를 반역죄와 이단 혐의로 재판하기로 했다. 11월 13일 수도로 이송된 모렐로스는 세속재판과 교회재판을 받았으며, 왕과 신, 조국에 대한 반역, 전쟁 유발, 독신 서약 위반, 사생아 문제 등으로 비난받았다. 그는 “스페인에는 더 이상 왕이 없었다”고 반박했으나 11월 23일 종교재판소는 그의 성직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7일 성직 박탈식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으며, 주관자는 오아하카 주교 베르고사가 맡았다. 모렐로스는 노란 제의를 입고 성직 권한을 박탈당했으나 끝까지 침착했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은 후대의 과장이었다. 이후 종교재판은 그가 아파칭간 헌법 서명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이단 판결을 내렸으나, 실제 목적은 혁명 지도자를 종교적으로 불명예화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이었다. 총대주교 페드로 데 폰테는 모렐로스의 ‘회개문’을 위조해 유포했지만, 후대 사학자들은 이를 카예하의 조작이라 밝히며 모렐로스가 끝까지 신념을 지켰다고 평가했다. 12월 21일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는 무릎을 꿇고 이를 들으며 자신의 사제 서품일과 같은 날임을 회상했다. 다음날인 12월 22일 새벽, 그는 사슬에 묶인 채 병사 50명의 호위를 받으며 에카테펙으로 이송되었고, 과달루페 성당 앞에서 기도하려 했으나 쇠사슬로 무릎을 꿇지 못했다. 오후 1시에 처형장에 도착해 고해성사를 마치고 시편 51편을 읊은 뒤 “주여, 내가 잘못했다면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오후 4시, 두 번의 총성이 울리며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이 파본은 사명하였다.
3. 기타
멕시코에는 모렐로스주, 풀만 데 모렐로스 등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들이 많다.
멕시코 200페소 지폐에 미겔 이달고와 함께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