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0:02:59

홍영조

북한의 前 축구선수
파일:홍영조.webp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홍영조
洪映早 | Hong Yong-jo
출생 1982년 5월 22일 ([age(1982-05-22)]세)
평양시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신체 174cm
포지션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소속 4.25 체육단 (2004~2007)
FK 베자니야 (2008)
FC 로스토프 (2008~2010)
4.25 체육단 (2011~2012)
국가대표 51경기 13골 (북한 / 2002~2011)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스타일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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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축구 선수. 북한 선수로는 드물게 세르비아와 러시아 무대에서 활약했던 유럽파 출신 선수였다.

북한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진출의 주역으로 대한민국과 자주 맞붙어 국내 축구 팬들에게도 낯이 익은 선수 중 한 명이다.

2. 클럽 경력

북한 축구계의 최고 명문 구단인 4.25 체육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년 정도 북한에서 활약하며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던 그는 2008년 세르비아 리그의 FK 베자니야[1]에 입단하며 북한 선수로는 드물게 유럽 리그에 진출한다. 주성하 기자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부친이 4.25체육단 단장,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축구국장을 역임한 북한 축구계 중진이라고 하는데, 그 덕에 운신의 폭이 비교적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FK 베자니야에서 반 시즌을 뛰면서 2007-08 시즌 7경기에 나와 1골을 기록하며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이 활약상을 보고 러시아 리그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러시아 2부리그 팀 FC 로스토프가 그를 영입했다. 그는 2008시즌 잔여 경기에서 주전으로 활약해 16경기 2골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팀의 1부리그 복귀를 이끌고 북한 축구 역사상 2번째로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되었다.

1부리그에서도 홍영조는 주축 선수로 뛰며 활약했다. 2009년부터 북한 대표팀의 A매치에 소집되면서 많은 경기를 날려먹었지만, 14경기 1골로 나름의 몫을 해냈다. 하지만 북한이 2010년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하고, 극단적인 합숙 훈련과 조직력 다지기에 몰두하기 시작하며 홍영조도 대표팀을 위해 희생해야했고, 결국 2010 시즌 로스토프에선 단 1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렇게 2011년에 북한으로 귀국하여 친정팀 4.25 체육단으로 컴백하여, 모든 국내대회를 휩쓴 것으로 알려졌다. 리그 7회 우승과 북한의 컵대회라고 할 수 있는 홰불컵, 만경대체육대회, 공화국선수권대회 등 수많은 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뒀고, 선수 생활 말년인 2019년에는 AFC컵 준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2022년 현재도 은퇴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역으로 뛰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알려진 기록에 따르면 2011년 북한 복귀 후 현재까지 4.25 체육단에서 112경기 68골을 기록했다고 한다. 헌데 이 내용이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있는데, 이유는 아래에 후술되는 내용을 참고.

3. 국가대표 경력

20살의 나이인 2002년 북한 A대표팀 데뷔전을 가졌고, 2006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북한 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잡았다. 2004년 예멘과의 월드컵 2차 예선에서 데뷔골을 넣었으며, 팀의 최종예선 진출에도 한 몫을 했다.

대한민국 축구팬들에게 홍영조가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바로 대한민국에서 열린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였을 것이다. 당시 홍영조는 정대세와 함께 위력적인 역습을 보여주며 대한민국의 간담을 여러번 서늘하게 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인민 베컴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와일드카드로 나와 북한의 8강진출을 함께했다.

이후 그의 전성기던 2008~2009년 사이 그는 북한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하며 북한 대표팀의 44년만의 월드컵 본선진출의 주역이 되었다. 2008년 9월에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월드컵 예선에서도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경기는 대한민국 기성용이 동점골을 터뜨리며 1-1 무승부로 끝났다. 또한 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해서 2010년 월드컵에서는 북한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하지만 2010년 월드컵과 2011년 아시안컵에서 연이은 부진으로 조별리그 탈락을 맛봤고, 그는 2011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4. 플레이스타일

대한민국 언론에서 홍영조를 설명할 때 비교하던 선수들이 박지성이천수였다. 이 선수들과 기량에서는 큰 차이가 났지만, 홍영조는 박지성와 이천수가 주로 맡았던 2선 공격수 롤에 최적화된 공격수였다. 주로 왼쪽 측면과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쪽에 배치되었으며 팀의 전담 키커를 맡을 정도로 킥력이 수준급인 선수였다.

북한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시절에는 당시 최전방 주전이었던 정대세와 자주 공격 라인을 형성했다. 홍영조가 찔러주는 패스를 정대세가 좋은 피지컬을 이용해 지켜내며 직접 처리하거나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형식으로 북한의 역습이 진행되었다. 북한 대표팀에서 속도를 살려 볼을 찰 줄 아는 거의 유일한 선수로 항상 남북전에서 대한민국 언론들의 요주의 선수로 지목되곤 하는 선수였다. 또한 프리킥 능력을 지니고 있어 한 방을 가진 선수였다.

5. 여담

  • 정대세와의 불화설이 있다.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출전권이 걸린 2010년 AFC 챌린지컵에서 홍영조가 정대세를 폭행했다는 루머가 돌았는데, 경기 중 정대세가 공격 타이밍을 끊어먹고 볼을 끌자 홍영조가 이를 지적하며 언성을 높였고, 이후 라커룸에서 정대세를 때렸다는 내용이다. 북한 축구계가 매우 폐쇄적이라 폭력이 빈번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주 낭설은 아니어보인다. 특히 4.25 체육단은 조선인민군이 관리하는 군팀으로 더더욱 팀 문화가 경직된 곳이라 홍영조도 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므로 조총련 출신의 재일교포 정대세와는 문화적인 배경이 많이 다르다.
  • 그런데 재일교포 축구해설위원 신무광 씨의 말에 따르면 정대세가 가져온 닌텐도 DS로 게임을 하고, 쉴 때는 아이팟을 사용하기도 한 듯 하다. #
  • 또한 그가 현재 평양시에서 검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북한 보도로는 국내에서 정보력이 가장 좋다고 알려진 주성하 기자의 보도로 #, 2011년 아시안컵 졸전 후 감독과 함께 수용소를 다녀온 뒤 축구화를 벗고 대학에 들어가 법 공부를 한 뒤 검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2011년 이후 4.25체육단에서 선수로 활약했다는 내용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내용이라 아직 100퍼센트 사실로 받아들이긴 이르다. 하지만 북한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그가 2011년 아시안컵 이후 돌연 국제축구계에서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이 보도가 더 신빙성이 있어보인다.


[1] 데얀 다먀노비치가 K리그에 오기 전 뛰었던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