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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象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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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손오의 관료 및 서예가이며 자는 휴명(休明)으로서주 광릉군 강도현 사람.2. 생애
어려서 서법에 뛰어났고 두도 등에게서 서예를 배웠으며, 진양보와 함께 능서라 칭해졌다. 황상은 그 둘의 장점을 융합해 하나의 풍격을 이루어 신묘함을 얻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했으며, 그의 장초는 두도를 본받아 바둑의 엄무, 그림의 조불흥 등과 함께 팔절(八絶)이라 불렀다.황상은 산 아래 음지에서 화융의 조부에게 빌붙어 산 적이 있고 이 때 장온이 찾아와 황상에게 배우면서 집을 얻기를 원했다. 그는 시중, 청주자사로 역임하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그가 쓴 문무첩에 따르면 청주자사가 되어 아랫 사람을 현지로 보내어 업무를 보게 했다고 한다.
절석강의 큰 비석이 셋으로 쪼개졌고 그 비석에 황상이 글을 썼다고 하며, 능서인명록에 따르면 초서에 능해 세상에서는 침착하고 통쾌하다고 칭찬했다. 원앙은 그 서법을 노랫소리가 높고 낭랑하게 선회하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듯 해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은 기러기발을 버렸다고 했다.
당시에 진량보는 동떨어짐이 한스럽고 장초는 엄함이 한스러웠지만 황상이 그 사이를 적절히 고려해 그 오묘함을 크게 얻어서 중국에서 글씨를 매우 잘 쓰는 이도 미칠 수 없었다고 한다.
동진의 갈홍은 그를 서성(書聖)이라 불렀으며, 당나라의 두기는 예스러운 정감은 참됨을 탐구하기 어려워 배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용과 자발레가 움츠렸다가 나오고 펼치고 서리면서 다시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선화서보에는 형식이 화려하지 않으면서 내용이 야하지 않다고 했으며, 장회관은 그의 장초를 형상이 많았지만 형태는 하나라서 만자(萬字)가 그 정점을 이뤘다고 하면서 신품, 팔분은 묘품, 소전은 능품으로 평가했다.
그의 작품은 천발신참비, 문무첩, 급취장, 문무장대첩 등이 있으며, 서론으로는 논초서가 있다. 급취장은 고대 식자의 교과서 같은 것인데, 그가 만든 사본이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인 예주 진국 사람인 하원공(何元公)이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3. 기타 창작물
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는 장온과 함께 촉한에 사신으로 오면서 촉한에서 이름난 서예가와 서예 대결을 해 황상에 대해 감탄하면서 많이 배워간다고 하자 무슨 말씀이냐면서 고개를 숙이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소설 삼국지 유지경성에서는 손려가 손책의 아들을 후견인이 되겠다는 일로 인해 아버지 손권과 대립하면서 역적이 되자 장소가 격문을 썼는데, 손려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장온을 구하기 위해 보부인의 지시를 받은 조부인에게 장소의 격문을 전달하자 격문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는 바로 불태우고 장온을 구하기 위해 수신제가를 강조하는 격문을 썼으며, 그 격문으로 인해 손권에게 대항하는 손려에게 세력이 모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