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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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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 우크라이나 수보티우 - 1657 우크라이나 치히린(향년 62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코자키 봉기를 주도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1648년부터 1657년까지 자포리자 코자키(Військо Запорізьке, 혹은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수장을 역임했다.
우크라이나 땅에 사실상 코자키의 독립국을 세웠으나 종주권을 재확립하려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공격해 오고 몰다비아와 크림 칸국 또한 코자키의 영토를 노리는 등 상황이 안 좋아지자 신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의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를 끌어들였고, 이를 빌미로 루스는 타타르의 멍에 이후 처음으로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로 자신들만의 독립국가를 세웠다는 역사적 의의 덕분에[1]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민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그의 선택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속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우크라이나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2] 다만 2018년에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7%만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73%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정도로# 평가가 완전히 뒤집힌 것은 아니다.
2. 생애
흐멜니츠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 땅의 드니프로 강 유역에서 코자키 유력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교회 학교를 마친 후 키예프의 예수회 학교를 다녔지만, 철저한 정교회 신봉자였다. 중세 루테니아어, 우크라이나어, 교회 슬라브어, 폴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고 이런 지식 덕분에 그는 코자키 부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했다.학업을 마친 후 1620년 아버지를 따라 몰다비아 전투에 출진했다가 아버지는 전사하고 그는 포로가 되어 오스만 제국에 2년간 억류되었다. 이 때 오스만 터키어를 배우고 오스만 제국의 사정에도 정통하게 됐다. 귀국한 후 가문의 영지 경영에 전념했다. 그의 나이가 쉰 살이 넘을 때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카자크 유력자의 삶을 살았다.
2.1. 봉기 배경
흐멜니츠키가 반폴란드 봉기를 일으킬 당시 루테니아 주민들은 대부분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 국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또한 폴란드인이나 가톨릭으로 개종한 루테니아인 지주들은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의 농노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착취하여 원성을 듣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흑토(Чернозём, 체르노좀) 지대는 평야 지대의 특성상 유목민의 침략에 취약했고, 이 때문에 크림 칸국의 크림 타타르인으로부터 정기적인 침략을 받고 있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사크가 내습하는 타타르군을 지속적으로 격퇴하면서 타타르의 약탈 원정은 어느정도 가라앉게 되었다.[3]서유럽에 산업의 발전이 늦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서유럽에 곡물을 비롯한 식량과 목재를 수출하고 공산품, 생필품과 원자재를 수입하는 경제 시스템을 가졌고, 그러므로 폴란드 귀족들은 원래 폴란드 왕국에 속한 농노들을 가혹하게 착취할 뿐만 아니라 흑토 지대에도 농노제를 도입(=코사크의 농노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4] 당시 폴란드는 크림 칸국 외에도 루스 차르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이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와 힘을 합칠까 두려워 루블린 조약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내 정교도들이 서로 욕하고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르비우 시내 부유하고 교육받은 정교도 시민들로 구성된 '르비우 형제단'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르비우 형제단 전원을 르비우 시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정교회 성직자들을 포섭하여 1596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를 만들어냈다. 이후 르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정착하자 상당수의 폴란드 슐라흐타(Szlachta, 귀족계급)들은 정교회 신자 다수에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무리한 정책을 밀어부쳤다. 이 정책은 폴란드의 동부 변경 지역을 크림 칸국으로부터 방어하던 코사크의 대대적인 반발에 직면했다.
근본적인 봉기 배경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교도 억압 정책이었다. 일부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조세 증대 및 권리 축소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폴란드의 헤트만 미코와이 포토츠키(Mikołaj Potocki)는 봉기에 연루된 주민들을 오스만 제국 방식을 모방하여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형벌을 시행했으며, 자포리자(자포로제) 코사크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우크라이나 내 주요 방어 거점에 용병들을 주둔시켰다. 이 용병들이 월급이 밀릴 때마다 우크라이나 촌락들을 약탈했던 것은 덤이었다. '등록 코사크'들은 자치권을 상실한 채 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지닌 폴란드 슐라흐타 지휘관들에게 복종해야 했다. '등록 제외 코사크'들은 일반 농노들과 마찬가지로 농노 신분의 모든 부담을 맡았으며, 유대인들이 토지 관리인으로 부임해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코자키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에게 직접 찾아가서 포토츠키 장군이 축소시킨 코사크의 권리를 복원시켜 달라며 탄원하였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정교도 억압과 농노제 확대 및 강화는 그동안 같은 정교도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겹치는 부분도, 동류의식도 없던 정교도 농민과 코사크가 후일 흐멜니츠키 봉기에서 서로 연합하는데 일조하였다.
2.2. 봉기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원래 예수회 신학교까지 다닐 정도에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와의 비밀 협상에도 참여할 정도의 친폴란드파 헤트만이었으나 마그나트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에게 땅을 빼앗기고 그 와중에 가족까지 폭행과 능욕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다. 흐멜니츠키는 이를 하소연하기 위해 두 번씩이나 바르샤바를 찾아가 탄원을 넣었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인해 거부당하고 말았다.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세력을 모집하던 도중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당국에게 체포되었고, 바르샤바로 끌려가던 도중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1647년 흐멜니츠키는 자신이 원래 친폴란드파 코자키로 알려져있던 것을 이용하여 폴란드 국왕이 코자키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하지만 슐라흐타들이 이를 막고 있다는 편지를 들고 다니며 코자키들을 선동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과거 자신의 적이었던 크림 타타르인들에게 폴란드 왕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미리 선제 공격을 하여 전공을 차지하라는 전갈을 넣었다. 당시 크림 칸국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대한 노예 사냥이 막힌데다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까지 겹쳐서 식량 부족으로 많은 부족민들이 기아로 죽어나가던 상황이었다. 엎친데 덮쳐 그동안 크림 칸국의 주요 동맹 중 하나였던 노가이 칸국이 칼미크인들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었고, 노가이족 일부가 귀순해왔다. 가뜩이나 식량도 부족했던 크림 칸국에서 먹을 입도 줄일 겸 4천여 명에 달하는 노가이 기병을 파견하자, 코자키들은 흐멜니츠키의 외교력을 확인하고 그를 '헤트만'으로 선포했다. 많은 코자키들이 폴란드군 장교들을 살해하고 흐멜니츠키 봉기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흐멜니츠키의 군대는 1648년 미코와이 포토츠키의 폴란드군 주력을 공격하여 궤멸시켰으며, 이후 매복 공격을 성공시켜 우크라이나 일대의 폴란드군을 섬멸하였다. 같은 해 코자키에 비교적 동정적이었던 브와디스와프 4세마저 충격사하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폴란드 대귀족들과 카자크들 사이에 중재자가 사라진 셈이 되면서 패닉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각지에서 폴란드인들이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농노들도 봉기하여 유대인 토지관리자들을 살해하고 카자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대군은 폴란드 진압군을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격퇴하였으며 르비우 일대까지 자력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벨라루스 일대에서도 정교회를 믿는 농민들이 소요를 일으키며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군대가 오면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흐멜니츠키는 기본적으로 친폴란드파 출신이었고 자신과 과거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와의 친분이 자신의 입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폴란드와 적극적으로 적대하는 것은 일단 보류하고, 새로 선출된 폴란드 왕 얀 2세 카지미에시와 1649년 8월 18일 즈보리우 조약을 체결하여 일단 전쟁을 끝냈다. 흐멜니츠키는 카자크-타타르 동맹의 군사적 한계를 알고 있으므로, 단합되고 통일된 카자크 국가를 건설하자는 생각은 보류하고 먼저 카자크의 권리를 회복 및 진전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자치정부를 인정받는 것은 물론 키예프, 체르니히우, 브라츨라우 3주에 폴란드군의 주둔 및 유대인의 거주를 금지시키고 모든 봉기군의 사면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반독립적인 코사크 헤트만 국가의 수장이 된 흐멜니츠키는 뒤이어 국가건설(Nation-Building)에 착수하여 단순한 군사 지도자로서뿐만 뿐만 아니라 일국의 지도자로서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5]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흐멜니츠키를 두고 언젠가는 반드시 완전한 독립을 시도할 것이라고 여기며 불신하였으며, 여기에 즈보리우 조약으로 상실한 영지를 되찾아야 한다는 귀족들의 욕망까지 겹쳐 1651년 2월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재개한다. 흐멜니츠키는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대패하고 키예프까지 함락당한다.[6] 그러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고, 여지껏 협상 상대로 생각하지 않던 위험한 이웃 국가였던 바로 루스 차르국으로 달려가 원조를 청했다. 봉기 초반 오스만 제국과 그 번국 크림 칸국의 지원을 받던 상황에서, 갑자기 크림 타타르족들이 폴란드 편으로 붙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2.3. 대홍수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 지원을 얻는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에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1651년 3월 루스 차르국의 의회 젬스키는 카자크들을 루스 차르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나, 이 시절 러시아는 아직 훗날만큼 강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적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알렉세이 1세는 1653년 11월 젬스키가 카자크 헤트만국을 루스 차르국의 보호국으로 삼으며 폴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함을 결의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류했다. 마침내 다음해인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 러시아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는데 페레야슬라우 조약의 결과 카자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내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과 외교권 박탈에 동의했다. 이로써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이 개시되고 여기서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패하여 파죽지세로 밀렸다.이 때 간을 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하고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라는 명목으로 제 2차 북방전쟁을 일으킨다.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군[7]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켰고 국왕 얀 2세는 실레시아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루스 차르국 측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 곧바로 스웨덴령인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또 한편 루스 차르국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두 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가 가져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네이 협정을 맺고 말았다.
연방을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루스 차르국의 휴전을 배신이라고 생각해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던 중 1657년 8월 급사했다.
흐멜니츠키의 봉기가 실패한 이유는 당시 주변 강대국이었던 폴란드와 러시아의 무력 개입으로 인해 봉기 세력이 와해되었고 코자크의 지도부가 심각한 내분을 겪으며 분열되는등 코자크 집단의 투쟁 열기가 줄어들고 코자크군 전력끼리 대립을 겪으면서 코자크들이 원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흐멜니츠키란 구심점을 잃은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와 폴란드, 튀르크, 타타르, 코사크의 반란까지 온갖 세력이 뒤엉켜 싸우며 국토가 황폐해졌다. 이 시대는 황폐의 시대라고 부른다. 1667년 러시아와 폴란드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맺어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서쪽은 폴란드가,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된다. 흐멜니츠키가 세운 헤트만 체제는 폴란드도 현지 민심을 고려해 바로 해치우진 못했고 1700년에 폐지된다. 러시아령 지역에선 1764년까지 코사크의 자치 정부가 유지됐다.
3. 평가
폴란드 지주들의 우크라이나 농노와 코자키 착취에 맞서 우크라이나인을 구했다는 평가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제국에 종속시킨 역적이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특히 페레야슬라브 조약으로 인해 러시아가 요청에 의해 합법적으로 진출, 카자크 공동체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협정이 조인되고 이를 토대로 러시아는 지배 영역의 확대하고 과거 키예프 루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 때문에 크게 비판받는다. 다만 위에서 보듯 본인은 마지막에는 러시아 차르와 손을 끊으려고 했었다. 사실 이미 이전부터 페레야슬라브 조약의 내용들은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았는데 조약과 달리 보흐단 본인은 이전과 같이 대외 정책을 독립적으로 구가하고, 모스크바 당국에 조공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와 카자크 공동체는 서로의 흠집을 가지고 서로서로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당시 카자크들의 태도나 페레야슬라블 조약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정규 국가의 통치자가 아니라 여러 군벌 연합체의 수장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우크라이나 지역의 카자크들은 원래 폴란드-러시아-오스만(+크림 칸국)의 3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그때그때 편을 바꾸던 이들이었다. 게다가 그 카자크 내부에서도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일정 자치권만 얻어내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파벌도 상당수였다. 때문에 흐멜니츠키가 진심으로 러시아 차르에게 진심으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실현하기란 불가능했고, 이를 흐멜니츠키와 알렉세이 1세 본인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련 시절까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형제지만 몽골, 폴란드, 리투아니아 때문에 잠시 갈라졌던 걸 다시 하나로 합치게 만든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54년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프로스쿠리우 시가 흐멜니츠키 시로 개명되었다. 또 우크라이나의 5흐리우냐 주화에도 도안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친서방파와 친러파의 대립 끝에 우크라이나가 반러시아로 돌아선 현재 안 좋은 의미로 재평가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세력, 우크라이나 내 반러 세력과 친러 세력의 중재를 담당하는 중립파는 여전히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현대의 정치적 알력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크게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만, 학계의 중론은 폴리투 당국과 결정적으로 갈라서기 전에는 연방에 대한 충성심과 정체성도 나름 강했고, 대러관계에서도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이 이끈 자포리자 코자키의 이익을 대변하는데 충실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오히려 학계에서 더 문제되는건 코자키 봉기 당시 주로 세리로 일하면서 미움받아 엄청나게 학살당한 유대인 학살 문제인데 이 문제야말로 막상 현대 우크라이나, 폴란드, 러시아 모두 반유대주의적 역사관이 강한곳들이라 세간에선 잘 언급도 안 되는 형편이다.
4. 여담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여성 저격수로서 독일군 309명을 사살한 류드밀라 파블리첸코[8]가 대학생 시절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주제가 바로 흐멜니츠키 관련한 것이었다.
- 이슬람교 의혹이 있는 인물이다. 이슬람 3세 기라이와 함께 이슬람 저녁 기도를 드리고 코란을 읽었다. 그 당시 코사크들 상당수는 타타르-무슬림 출신이거나 교류가 많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무슬림이 아니었는데 칸의 지원을 구하기 위한 정치적 쇼였는지, 아니면 정말 무슬림이었는데 카톨릭(폴란드)에 대항하는 정교회로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정교도인 척 한 건지는 불명이다.
[1] 키예프 대공국은 건국세력 류리크 왕조가 이민족 바이킹인데다 여러모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국이 나뉘기 전의 공통 역사라는 성격이 있고, 루테니아 왕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독립국가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아무래도 너무 한정된 지방정권인데다 이후 우크라이나 역사와 연속성도 애매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우크라이나사에서 중요시한다.[2] 그 예로 흐멜니츠키와 루스 차르국이 조약을 맺은 페레야슬라우의 이름은 1943년 이후로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였으나(사실 소련 시절에는 러시아에 동명의 도시인 페레야슬라블-잘레스키가 있어서 혼동된 이유도 있었다) 2019년에 페레야슬라우로 이름을 환원했다.[3] 여기서 코사크가 농노를 보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케바케.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는 했겠지만 봉건영주가 자기 소유의 농노 보호한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원래 코사크가 황량한 초원에서 살아가는 무법자 집단인만큼 다른 집단을 보호할 여유도 없거니와, 실제로는 민족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팔아다 타타르에게 노예로 팔아치우는 노예무역의 중개자 역할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 당장 이 항목의 흐멜니츠키를 두고 동포를 타타르인에게 넘긴다고 원망하는 우크라이나 민요가 있었을 정도다. 즉 코사크는 힘의 공백으로 생긴 무법지대에서 필요하면 목숨걸고 싸우던 과거의 원수와도 같은 편에 서서 동포도 팔아넘겼고, 수호자로 군림하면서도 압제자이자 폭군으로 돌변하기도 했던 노회하고 냉혹한 군벌들이었다.[4]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코사크를 야만인 정교도라고 멸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반독립적 군벌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코사크는 크림 칸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주변국과 알아서 교섭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농노제 도입은 이런 군벌의 발전을 막으려는 시도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절반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떨어져나가는 대참사로 끝났다. 혹 떼려다 혹 붙이기[5] 봉기 초기 코사크에게 전황이 유리할 때부터 1651년 키이우가 폴란드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흐멜니츠키는 반독립적인 코사크 헤트만 국가를 오스만 제국의 군사 행정 체계에 맞추어 운영하려 하였다.[6] 베레스테치코에서 타타르가 사전에 폴란드와 밀약하여 코사크를 배반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출처는 모르겠으나 타타르를 지나치게 비하하는 서술이다. 전투 첫날에 코사크와 함께 돌격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고 이튿날 전투에서는 폴란드 기병대의 집중 공격을 당했음에도 그들을 일시적으로 구축했다가 보병대와 포병대에게 벌집이 되어 격퇴당했다. 이날 타타르 진영에서는 크림 칸의 처남 메흐메트 기라이와 코사크 지원군 사령관 투하이 베이가 전사했다. 셋째 날에는 크림 칸의 형제 아무라트도 치명상을 입었고 패배가 불가피할 지경에 이르자 칸의 숙소마저 버리고 다급하게 퇴각했다. 즉 타타르 입장에서는 할만큼 한 것이다.[7] 카자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군의 피해가 컸고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군을 공격하는 와중에 군대의 일축을 맡은 카자크가 루스 차르국 편에서 싸우면서 폴란드군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 또한 상당수가 지휘관인 귀족들을 따라 스웨덴 편에 가담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 생략.[8] 현 키이우, 구 키예프 출생인 우크라이나인이다. 우크라이나 이름은 류드밀라 미하일리우나 파울리첸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