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1:40:36

2013년 튀르키예 시위

2013년 터키 시위에서 넘어옴
1. 개요2. 원인3. 진행
3.1. 2013년
3.1.1. 게지 공원 개발 반대3.1.2. OccupyGezi3.1.3. OccupyTaksim3.1.4. 훌리건의 난입3.1.5. 에르도안의 후퇴3.1.6. 에르도안의 역습
3.2. 2014년3.3. 2016년3.4. 2018년
4. 기타
4.1. 튀르키예 정부에 대한 옹호 의견4.2. 반박4.3. Istanbul United4.4. 현재의 탁심
5. 둘러보기

1. 개요

2013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튀르키예의 시위. 처음에는 단순히 게지 공원(Taksim Gezi Parkı)의 재개발을 반대하는 시위였으나 에르도안 정부의 친 이슬람 정책으로 쌓인 불만과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시위가 확대되어 현재는 튀르키예 서부 도시들을 중심으로 반-에르도안, 반-이슬람 및 민주화 시위로 발전하고 있다.

6월 10일 기준 시위대 사망자 4명, 부상자 4,800여 명, 경찰관 부상자 600여 명. 피해인원만으로도 시위의 규모가 어느정도인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2. 원인

튀르키예는 국민 전체의 98%정도가 무슬림이슬람 국가이나 오스만 제국 멸망 이후 튀르키예 공화국을 성립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이념(케말리즘)과 이미 오스만 제국 말기부터 형성되어가던 세속주의자들의 세력이 맞물려 권위적인 형태의 서구화 개혁이 이루어졌고 반면에 이에 반발하는 구 오스만 제국의 기득권층과 종교세력으로 인해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가 충돌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케말 파샤 사후, 1946년부터 튀르키예에서 다당제를 허용하자 튀르키예정치는 세속주의당과 이슬람주의당의 대립구조가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튀르키예에서 정치성향의 좌우를 가르는 하나의 변수로 종교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에 세속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보수성향이었던 민주당정부를 몰아내고 난 이후, 튀르키예는 서부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세속주의(=케말주의)와 동부 농촌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인 이슬람주의의 구도가 이어져왔다. 그 때문에 튀르키예/정치에서 묘사된 것처럼 이슬람주의 정권이 집권하면 세속주의의 수호자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속주의로 복귀하는 것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는 2002년에 현 튀르키예 대통령인 압둘라 귈과 총리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이끄는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 - AKP)의 집권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정치인으로 이스탄불 시장을 역임하였으나 세속주의적인 군부의 반발로 투옥된 경험이 있던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정의개발당을 설립하여 경제발전을 중점으로 하면서 반-이슬람 정책의 완화를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워서 10여년만에 1인당 소득 4,000여 달러였던 국가가 12,000 달러까지 성장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경제발전정책을 근간으로 정의개발당의 인기는 올라갔고 정의개발당은 은근슬쩍 이슬람주의로 선회를 시작하였는데

튀르키예 군부는 2003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기민한 대응으로 실패하였고 2011년 에르도안은 소위 '에르게네콘당(Ergenekon)'이라는 군대내 사조직이 있다며 폭로하고 관련 인사들을 전부 체포하는 등 군부는 에르도안의 반격을 받아 장교단의 1/8이 숙청당하면서 사실상 몰락했다. 게다가 1980년 쿠데타와 1997년 쿠데타의 주역들도 잡아다가 죄다 최소 징역 20년 이상의 콩밥을 먹여버린다.


앙카라 지하철에서 키스를 하던 연인에게 주의를 주는 방송을 하자 5월 24일 앙카라에서는 공개적으로 키스를 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날 튀르키예 정부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술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위반시 해당 업주에게 최소 5000리라에서 20만리라(315만~1억2600만원)까지 벌금을 물릴 수 있으며 밤이든 낮이든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모스크나 관광지, 공공장소에서 최소한 100m이상 떨어져서 마셔야 한다. 위반시엔 가차없이 벌금. 또한 이 법은 외국인에게도 해당된다. [1]

이스탄불은 18세기 튤립 시대부터 시작해 세속주의의 중심지로써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구분을 하기 힘들 정도로 세속주의적인 면모가 강한 곳이다. 이스탄불의 중심가인 탁심에는 술집과 클럽이 끝없이 분포해 있으며 상점에는 튀르키예의 맥주인 에페스나 튀르키예의 전통주인 라크 등을 판매한다. 그래서 해당 조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에르도안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튀르키예의 전통음료는 라크가 아닌 아이란이다."[2][3]
"에페스 맥주 한잔만 마셔도 알코올 중독이 될 수 있다."
사실 해당 법 발표일에도 앙카라에서는 대놓고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시위를 했었다. 과거에 안전벨트 의무제를 시행하려 했을때도 튀르키예인들은 안전벨트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서 열심히 저항했다. 그리고 게지 공원에서 사건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확산되었다.

3. 진행

3.1. 2013년

3.1.1. 게지 공원 개발 반대

5월 27일 게지 공원의 개발을 반대하는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게지 공원은 이스탄불 중심가인 탁심 인근의 공원으로 원래 이 자리에는 탁심병영(Taksim Kışlası)이라는 건물이 있었고 1940년에 이를 부수고 세운 공원이다. 이스탄불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녹지이자 튀르키예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된 장소 중 하나였다. 한국으로 하면 탑골공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부는 게지 공원에다 옛 병영을 복원하고 그 건물 내부에 쇼핑몰을 만들겠다는 소위 탁심 프로젝트(Taksim Projesi)를 발표 하였고 나무를 뽑아 개발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여 수십명 규모의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게지 공원의 나무는 이미 뽑히기 시작했고 5월 28일 나무가 뽑힌 것을 확인한 시민과 환경운동가들은 게지 공원에 진을 쳐서 개발을 막는 시위를 하였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개발 반대 시위였다. 하지만 튀르키예 경찰은 강경한 진압 정책을 썼고 그 장면이 SNS와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세속적 튀르키예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LADYINREDDRESS_2585063b.jpg
위 사진이 찍힌 날짜도 5월 28일이다. 사진에 찍힌 붉은 옷의 여성은 제이다 숭구르(Ceyda Sungur)로 평범한 여성이 몸으로 가스분사를 막는 모습은 튀르키예는 물론 전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이번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당시 시위대들의 구호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Her Yerde Gezi, Her Yerde Direniş! 모든 곳에 게지, 모든 곳에 저항!

3.1.2. OccupyGezi

이렇게 게지 공원에서 강경진압이 시작되자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랍의 봄에서처럼 트위터, 페이스북 해쉬태그를 사용했다. 이 때에 나타난 해쉬태그는 #OccupyGezi로 시위의 생중계 및 연락의 수단이 된다. 이들은 경찰의 강경대응에도 굴하지 않고 게지공원으로 모였고 야간에 텐트를 치면서 농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본 정치인과 연예인들도 시위에 참가하면서 시위는 점차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튀르키예를 비롯한 그리스, 아랍국가들에게 인기를 얻고있는 사극 무흐테솀 유즈이을(Muhteşem Yüzyıl)에서 주연인 쉴레이만 대제를 맡고 있는 할리트 에르겐치가 직접 나와서 구호를 외쳤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타르칸(Tarkan)도 현장 콘서트를 했었다.

그러나 이스탄불 정복 기념일인 5월 29일에도 경찰의 강경진압은 이어졌고 최루탄에 물대포까지 동원해 시위진압을 시도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게지 공원에 몰려들었고 야당인 CHP(공화인민당)의 당수인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및 여당인 AKP계의 정치인들도 시위대를 주목하면서 이 시위는 반-에르도안 시위로 점차 나아가기 시작했다.

3.1.3. OccupyTaksim

이스탄불의 중심인 탁심은 게지 공원과 인접했기 때문이라도 초기부터 시위대들이 몰리는 장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기의 시위는 게지 공원 사수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탁심은 단지 모이는 장소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커져가면서 해쉬태그에 #OccupyTaksim도 추가되어 탁심은 시위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시점을 이 시위는 단순히 게지 공원을 지키기 위한 시위가 아닌 반정부 시위로 발전했다.

https://media.istockphoto.com/photos/occupy-taksim-picture-id471568049
5월 30일부터 탁심의 카페나 레스토랑 등 모임 장소들이 SNS를 통하여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5월 31일에는 탁심 광장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였다. 경찰은 시위대에게 수많은 최루탄을 날렸고 분노한 시민들은 이스탄불은 물론 세속주의가 강한 이즈미르, 앙카라 등에서도 봉기하기 시작했다.

3.1.4. 훌리건의 난입

파일:attachment/2013 튀르키예 시위/direnisin_rengi_olmaz.jpg
베식타스 JK, 페네르바흐체 SK, 갈라타사라이 SK의 서포터가 뭉친 모습. 이스탄불

6월 1일, 시위는 새로운 양상으로 치달았다. 여전히 경찰들의 폭력 진압이 벌어지는 중 이 날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이 보스포러스 대교를 건너 베식타쉬 지구를 거쳐 탁심 공원으로 진입하려 했고 경찰은 이 지구를 봉쇄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동네가 튀르키예 쉬페르리그의 팀들 중에서도 가장 과격한 팬들 중 하나로 악명이 높은 베식타스 JK 서포터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것.

시위의 주 무대인 이스탄불은 축구 더비전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곳으로 이 도시를 주름잡는(?) 3대 팀 갈라타사라이 SK, 페네르바흐체 SK, 베식타스 JK의 서포터는 셋 중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고 둘이 연합하면 경찰을 다굴 할 정도로 튀르키예 최강의 서포터 중 하나다. 그런 서포터의 하나인 베식타쉬의 서포터들로선 갑자기 자기네 구역에 경찰들이 들어차서 출입 통제하고 간섭하니 열받는 상황이었던 것. 거기다 그들도 튀르키예의 갑갑한 상황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는 시민들이기도 하여 시위에 가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이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친구들, 그것도 모자라서 평소 원수지간이던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의 서포터들에게도 가세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이 이에 응한 것이다![4] 하도 사건이 터지다 보니 나중엔 요 몇 년간 상대팀 홈구장으로 원정 응원가는 것을 알아서 자제할 정도. 그러던 이 둘이 손을 잡았다.

과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가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독하는 어그로를 끌어서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흐체가 연합해 상대 팀에 훌리건 짓을 했을 때도 여기 축구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엄청난 일로 받아들였는데, 이번엔 아예 베식타쉬까지 가세했기에 튀르키예 축구리그에 관심있는 해외축구 팬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3.1.5. 에르도안의 후퇴

결국 튀르키예 대통령인 압둘라 귈은 6월 2일부로 경찰을 철수시켰다. 귈 대통령은 "시위대의 목소리에 정당성이 있으며 시민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성명을 냈으며 이스탄불 시장인 카디르 톱바쉬(Kadir Topbaş)도 이스탄불 시민의 목소리를 들어 "탁심계획을 폐기하고 공원을 보존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에르도안 총리는 "거기 있는 시위대들은 전부 좌경 공산주의자들이며 국가의 전복을 주장하는 무리들"이라고 비난하고 탁심 프로젝트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을것을 천명했다. 어쨌든 경찰이 물러나자 탁심은 해방구가 되어 매일 저녁마다 문화공연과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으며 매일 저녁마다 SNS를 통해 특정시간마다 튀르키예 국가 부르기, 박수치기, 냄비뚜껑 일제히 두들기기 같은 시위를 하고 있다. 각 가정의 주부들도 이런 일제시위에 동참할만큼 호응이 컸다. 14일에는 에르도안 총리가 탁심연대 대표단과 간담회를 가지기까지 해 상황이 평화적으로 종결될 거란 희망이 커졌다.

3.1.6. 에르도안의 역습

6월 15일, 경찰이 갑자기 최루탄과 물대포를 동원해 탁심광장과 게지공원의 점령시위대를 강제해산시키자 광장과 공원에서 쫓겨난 시위대가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애초에 에르도안 총리가 "16일까지 공원에서 나가지 않으면 진압하겠다"고 경고하고 발표가 나가고 겨우 2시간 만에 전격 진압한 것. 진압 도중 경찰이 인근 호텔로 도망친 시위대까지 쫓아가 무자비하게 구타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으며 시위대는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밝히며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미국도 우려를 표할 정도가 되었다.

6월 16일 경찰과 시위대간의 산발적인 대립이 이어졌으며 노조들마저 시위에 가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7일 부총리 뷸렌트 아리츠는 경찰이 질서회복에 실패할 경우 군대가 투입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다.

6월 22일, 에르도안 총리는 "시위에는 배후에 외부세력의 음모가 있다"란 말로 시민저항의 의의를 폄하했다.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소강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고 있지만 초반처럼 폭발적이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이 24일 튀르키예의 상황에 대해 에르도안 총리와 대화를 나눴다고 하나 이후 구체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시위 과정에서 시위 참가 미성년자들이 불법 연행 및 구금당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 사태의 여진은 남아있다. 또한 28일에도 수도 앙카라에서 도로점거 시위가 일어나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7월 8일, 시위대는 이 곳에서 튀르키예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포럼을 열겠다고 밝혔고 이에 대해 휘세인 아브니 무틀루(Hüseyin Avni Mutlu) (관선) 이스탄불 도지사는 '공원은 재개방할 예정이지만 시위나 집회는 불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5]

결국 포럼을 위해 공원에 모인 시위대를 경찰이 강경 진압한 뒤 공원을 다시 폐쇄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이 무리하고 강압적인 수사를 벌여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특히 이 날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 시위 참가자 1명이 이틀 후 사망하여 더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후 시위대는 인근 다른 공원에 흩어져 포럼을 개최하고 있으며 그 주위를 경찰이 포위하여 또 다른 충돌 우려를 낳고 있다.

7월 11일, 집권 여당 소속 의원이 여기자들을 상대로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여 당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예정이다.

7월 13일, 에르도안 총리는 그 동안 사설 경비원이 경비하던 공립대학의 경비업무를 경찰로 대체하겠다고 밝혀 시위에 동참한 지식인들에 대한 재갈물리기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7월 20일, 시위 과정에서 사귀게 된 커플의 결혼식이 게지 공원에서 열렸는데 역시나 이 결혼식이 에르도안 총리에게 항의하는 시위의 장이 되었다. 신부는 시위 당시 정부의 고무탄을 막기 위해 시위대가 썼던 안전모와 최루액을 막기 위한 꽃으로 장식된 방독면을 썼다. 역시나 이번에도 정부는 시위대로 변한 하객들을 강경 진압했다.

7월 23일, 시위 기간동안 해직및 퇴사한 된 언론인이 59명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들 중 일부는 시위에 관한 호의적인 기사를 쓴 것 외에도 심지어 트위터에 올린 시위 관련 글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심지어는 시위대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해직된 이들도 있다고 한다.

7월 24일, 튀르키예 정부가 최대 재벌그룹인 코치홀딩스 계열의 에너지기업들을 대상으로 고강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튀르키예 언론들은 이번 조사가 반정부 시위 때 코치그룹이 소유한 이스탄불 게지공원 인근의 디반호텔이 시위대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것에 대한 보복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보복설을 부정했지만 실제로 에르도안 총리는 디반호텔을 "경찰을 공격한 시위대를 보호해줬다"며 여러 차례 비난한 바 있다. 한편, OECD는 튀르키예가 경제 체질 개선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OECD는 튀르키예의 빈부격차 문제와 에르도안 정권의 부패가 심각하다고 거론하였고,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는 에르도안 총리가 스위스 은행에 8개 비밀계좌를 갖고 있다고 폭로했다.

8월 4일, 이스탄불에서 시위대가 또 다시 게지 공원으로 행진했으나 경찰이 이를 무력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APF 통신 소속 사진기자 한 명이 경찰의 고무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8월 6일, 군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지난 2011년에 일어난 쿠데타 모의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중심인물들에게 종신형이 내려진 것을 비롯해 기타 야당 의원들과 언론인들도 각각 6년에서 30여 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8월 12일, 지난 주부터 언론에서 제기된 에르도안 총리 와병설에 대해 총리실에서는 공식 부정하였다.

8월 13일, 집권 여당에서 반정부 시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는 보고서가 나왔다. 직접적으로 총리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하는 내용이지만 한편으로는 집권 여당 내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전조로 보는 시각도 있다.

8월 26일, 튀르키예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침묵 평화시위인 일명 ‘스탠딩 맨’ 시위를 벌여 반정부 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 행위예술가 에르뎀 균듀즈(34)가 독일 유력 인권상인 ‘M100 미디어상’을 받았다. 한편, 시위는 대체로 잦아들었음에도 튀르키예 정부가 빗나간 마녀사냥식 대처로 경제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서방측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에르도안 총리는 시위와 튀르키예의 경제 위기를 '서방세계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서 서방측과의 갈등이 더 심화될 우려가 있다.

9월 6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14살 소녀가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사건이 일어나 다시 시위가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에 총리와 경찰은 강경대응을 시사하였고 시위 현장에서 경찰청장이 진두지휘할 정도로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9월 9일, 시위 진압 중 또 사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하르메트 아타칸(22). 초기에는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정부에서는 추락사라고 밝혔다. 이 희생자의 장례식이 끝난 뒤 시위가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때맞춰 튀르키예의 대학들이 개학철을 맞이하고 있어 전문가들은 시위가 더 확산될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편 에르도안 총리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친 상황이다. 리라화 폭락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다 쿠르드 반군과의 정전협상도 결렬되었고 쿠르드 반군은 이어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목적으로 반정부 시위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시사하고 있다. 게다가 올림픽 유치 실패 등으로 인해 자신의 위상이 만만찮게 타격을 입은 상황이며 또한 올림픽 유치를 위해 한동안 자제하던 시위 강경진압이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해 또 다른 불상사를 낳을 우려가 있는 상태이다.

9월 20일, 시위를 과잉진압한 경찰관들에 대해 근속에 따른 승급을 6~16개월 동안 정지하는 솜방망이 징계를 내려 또 다시 논란이 늘어났다. 한편, 앞서 정의개발당은 이번 사태가 촉발된 계기가 SNS에 있다고 보고 대응팀을 구성하여 국민들에게 조롱과 지탄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얼마 뒤인 26일에는 이전 시위에 온정적인 모습을 보인 기업을 군함 입찰에서 탈락시키고 재심사를 벌여 또 한 번 정치적 보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2일 있던 베식타스 JK갈라타사라이 SK 간에 벌어진 유혈 충돌 또한 집권 여당이 조작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고 있다.

9월 30일, 에르도안 총리는 국내외의 논란을 무마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련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주요 골자는
  • 공직자의 '히잡 착용 금지 제도'를 폐지
  • 사립학교에서 쿠르드어 교육 허용
  • 정당득표율, 정당 국고 보조 요건 조정 등의 선거제도 개편
  • 종교와 민족, 국가 등을 기준으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 관련 기구 신설
  • 시위 허용 시간을 일몰에서 자정으로 연장
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쿠르드 저항세력은 당초 공립학교에서도 쿠르드어 교육을 허용하라고 주장했던 바라 당초 요구안에서 후퇴한 이번 안을 수용할지 불투명한 상태이며 또한 국제엠네스티 또한 이번 개혁안에서 과잉진압에 대한 재발 방지책이 빠져 있는 등 전체적으로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EU 집행위는 이를 크게 평가했는지 10월 16일 각 회원국 정부에 대해 EU 가입 협상을 재개할 것을 권고했다.

10월 22일, 앙카라에 위치한 중동기술대학(ODTU)의 학장과 학생들이 교내 도로 건설을 반대 시위를 벌인 것에 대해 앙카라 시청이 기습적으로 공사를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학교측과 경찰간에 물리적 충돌이 격화됐다. '보스포러스 제3대교' 건설과 맞물린 이 공사 또한 튀르키예 환경운동가들과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고 있으나, 앙카라 시청과 에르도안 총리는 강행할 의사를 비치고 있으며 "이번 시위 또한 게지공원 시위와 마찬가지로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슬람주의에 대한 비판을 의식했는지 "우리는 도로를 내야 한다면 모스크라도 허물고 옮겨서 지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11월 6일, 에르도안 총리가 학생 주거시설 부족으로 인한 남녀 대학생의 동거에 대해 경찰 개입을 지시하여 사생활 침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부총리가 "기숙사 증설 취지로 한 발언"이라며 진화를 시도했으나, 이튿날 에르도안 총리가 다시금 같은 발언을 천명해 불만 더 지폈다.

11월 21일, 대학생 동거 부분을 문제삼은 데 이어 이번엔 튀르키예 국회부의장이 남녀공학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발언하여 재차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튀르키예에서 남녀공학 제도는 오스만 시절부터 내려온 관행이라 더욱 뜬금없다는 반응. 한편 튀르키예 교육계에서는 현 정부가 공교육 강화를 이유로 입시학원을 강제로 사립학교로 전환하도록 추진하고 있는데 문제는 튀르키예 내 주요 입시학원들이 평소 정의개발당과 뜻을 같이하던 이슬람 사상가 펫훌라흐 귈렌과 그 지지자들이 세운 것이라서 이로 인해 정의개발당 내에서도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이 날 총리 공관에 가짜 폭발물을 지닌 정신이상자가 공관 난입을 시도하다 검거되었다.

11월 25일, 튀르키예 정보기관이 언론인에 대한 불법 감청을 했다는 주장이 나와 사법부가 수사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감청 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한 영장에서 감청 대상자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올려 이를 이용해 반정부 언론인들에 대한 감청을 시도했다는 것. 튀르키예 정보기관은 이미 작년에도 불법 감청을 한 혐의가 드러나 현재 소송이 진행중인 상태이다. 한편 튀르키예 정부는 같은 날에 시위를 지지한 유명 TV 배우를 체포했다. 튀르키예 정부 측은 해당 배우가 튀르키예 내 좌파 해커조직 '레드핵'과 연관있기 때문에 입건하여 조사중이라고 발표했다.

11월 29일, 에르도안 총리의 부인 에미네 에르도안 여사가 주튀르키예 일본대사관 관저에서 개최한 국경일 리셉션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에 야당의원이 "리셉션에 이을드즈 장관도 있는데 왜 에미네 에르도안이 튀르키예 정부를 대표해서 연설하느냐"고 거세게 비난하여 소란이 벌어졌다. 이에 총리 부인은 해당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상태. 외국 공관에서 소란을 피운 부분 때문에 야당에서도 해당 의원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발표했다.

12월 4일, 반정부 시위 도중 경찰이 과잉진압으로 시위 참가자를 사망케 한 사건과 관련하여 당월 2일에 해당 사건을 심리하던 판사와 검사가 공판 도중 졸아버린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어 파문이 일어났다. 이에 튀르키예 사법부 최고 기관인 판사·검사최고위원회(HSYK)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퍼진 문제의 사진을 조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2월 5일, 유럽의회는 튀르키예의 유럽연합(EU) 가입과 관련한 연례 평가보고서 초안에서 "튀르키예 언론들이 게지공원 시위와 관련해 매우 제한적으로 보도했다"면서 튀르키예의 언론자유 제한에 우려를 표했다. 다만 EU는 튀르키예가 "EU의 전략적 동반자"라며 EU 가입협상 재개 결정을 지지하고 아울러 튀르키예 정부의 민주화 종합개혁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12월 6일, 튀르키예 당국이 비밀문건을 폭로한 신문사 기자를 간첩 등의 혐의로 수사에 착수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문건은 지난 2004년 국가안보위원회가 작성한 '페툴라 귤렌 조직 대응책' 관련 문건으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를 비롯해 대통령과 튀르키예군 총사령관 등이 참석한 국가안보위에서 귤렌 조직에 대한 법적 제재와 행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고 결정한 내용을 비롯하여 귤렌을 지지하는 공무원과 학자, 기업인, 변호사 등에 대한 개인 정보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위에서 전술했듯이 귤렌과 그 지지세력은 이슬람주의에 의거해 집권 여당의 주요 동반자 역할을 했으나 이번 문건 폭로로 인해 양측 세력 간에 대립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12월 17일, 튀르키예 일간지 휴리예트는 경찰이 17일(현지시간) 오전 6시를 전후해 이스탄불과 앙카라에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벌여 37명을 입찰 비리와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이 중에는 현직 장관 아들도 3명이나 끼어 있었으며 총리에게도 보고되지 않은 채 단행되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번 작전이 에르도안 총리 지지층과 귤렌 지지층 간의 다툼과 연관이 있다고 보도했으며, 특히 귤렌 지지층이 경찰 조직에 대거 포진한 것을 그 근거로 들었다.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듯이 에르도안 총리는 성명에서 구체적으로 귤렌 지지층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어둠의 세력과 갱, 미디어, 자본가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비난하고 "그들은 튀르키예의 앞날을 좌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검거 발표 직후 경찰 고위 관계자 5명이 전격 파면처리되었고, 이에 야당은 물론 여당 내 귤렌 지지층도 사건을 무마하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12월 18일, 비리 관련 구속자가 52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에르도안 총리는 비리 스캔들에 대해 외부 세력의 음모라면서 미국에 체류중인 페툴라 귤렌과 그 배후의 미국이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즉각 부인했으며 또한 튀르키예 당국의 사법 절차를 주시중이라고 발표했다. EU 또한 공정한 사법 진행을 요구했다.

12월 23일, 튀르키예 일간지 휴리예트와 자만 등은 정부가 "경찰이 검사의 지휘로 수사에 착수하면 상관에 보고하는 의무"를 부여한 사법경찰관 관련 규칙을 개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수사가 정부에 보고되지 않은 채 진행된 데 따른 영향으로 보이며 튀르키예 검찰은 수사 독립성이 훼손된다며 반발했다. 수사 이후 직위 해제 및 파면된 경찰 간부는 113명으로 늘었으며 이어서 튀르키예 정부는 기자들의 경찰서 출입을 금지하여 야당과 언론인들의 비난을 사고 있다. 시민들의 항의 시위도 잇따랐으며 축구팬들도 경기장에서 "모든 것이 부패했다"는 구호를 외쳤다. 한편 튀르키예항공이 이번 사건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귤렌 소유의 언론사 '자만' 신문의 기내 제공 서비스를 중단했다. 튀르키예항공은 튀르키예 정부가 지분 74%를 보유중이다.

12월 29일, 신원 미상의 남자가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케밥 써는 칼을 휘두르며 시위자 참가자들을 습격하다 체포되었다.

3.2. 2014년

2014년에도 시민들의 시위는 산발적이지만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반대로 총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맞불시위를 벌이는 등 정국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공원 개발 문제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이제 정부와 여당의 부패 및 독재 권력 구축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총리측과 사법부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1월 18일에는 인터넷 검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물대포로 진압하는 경찰측에 맞서 폭죽으로 대응하며 저항했다. 문제가 된 법안은 인터넷 서비스 업체를 통해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인터넷 사용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정부는 국민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중국보다도 더 심한 검열이란 비판까지 받고 있다. 한편, 같은 날 튀르키예 정부는 귤렌 지지자들이 포진한 은행감독기구와 통신당국, 국영방송의 고위직 관계자들을 대거 물갈이하여 귤렌 지지자들에 대한 보복 인사를 확대하고 있으며 또한 사법부 최고 기관을 행정부가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추진하여 이에 압둘라 귤 대통령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국 불안으로 인해 튀르키예 리라화는 1월 말 시점까지 계속해서 환율 불안을 일으켜 이 또한 튀르키예 시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1월 28일에는 무장 괴한 2명이 전날 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의 이스탄불 시장 후보를 대상으로 총격을 가한 사건이 일어나는 등 3월 지방선거가 점점 다가오면서 야당 인사들에 대한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 한편, 이 때까지 유발시킨 악재들로 인해 에르도안 총리의 지지율이 11년만에 39%까지 떨어졌다는 설문조사가 공개됐다.

1월 29일에는 튀르키예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연루된 새로운 뇌물 사건을 폭로했으며 이후로 계속해서 총리가 비리와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2월 3일에는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튀르키예의 언론 탄압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다음날이 4일에는 독일을 방문한 에르도안 총리가 독일 내 튀르키예계 이민자들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벌여 독일 언론으로부터 빈축을 샀다. 한편 메르켈 총리는 에르도안 총리가 튀르키예의 EU 가입에 지지를 요청해온 데 대해 "회의적인 관점에서 변한 것이 없다"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여당은 당규 변경을 통해 총리의 연임 연장을 시도하고 있다. 첨언하면 원래는 대선에서 연임 제한에 걸리는 에르도안 총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현 대통령이 총리가 될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미리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제로 바꾸고 권한을 강화하는 등의 밑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여론 악화로 대선 승리가 어려워질 것으로 본 총리 측이 다시금 정권 연장을 위해 꼼수를 부리는 것.

2월 6일에 문제의 인터넷 통제 강화법이 결국 의회를 통과하고 말았다. 야당은 당연히 반발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거부권을 가진 귤 대통령도 현 집권 여당을 세운 인물 중 하나라서 결국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언론사와 시민들은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인권 및 언론 자유 침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우려를 확인시키기라도 하듯, 다음날 튀르키예 정부를 비판하는 트윗을 올린 외국 기자를 추방하는 일이 벌어졌다.

2월 8일에는 일간지 하베르튀르크의 편집국장과 경영진, 총리의 아들 등 3명이 전화로 신문사 여론 조사를 조작하기로 모의한 통화 녹음 파일이 공개되는 등 친 여당 언론이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내용의 녹음파일이 잇달아 공개됐다. 또한 12일에도 집권당의 주요 인사들과 관련된 비리 자료들이 속속들이 공개되었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유튜브에 공개된 총리 보좌관인 얄츤 아크도안과 미디어 그룹인 지네르의 파티흐 사라치 부회장 간의 언론 탄압과 관련한 통화 내용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사의 폐쇄를 주문하고 야당 대표의 발언에 대해 중계를 중단하라는 지시 등이 담겨 있어 튀르키예 정부가 언론사들에 대해 압력을 넣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월 15일, 튀르키예 의회가 행정부의 사법부 통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이 심한 몸싸움을 벌였으며 야당은 위헌 심판을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악법들의 강행 처리로 힘을 얻은 튀르키예 정부는 21일에는 정보기관의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법안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미국 정치인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튀르키예의 정치상황을 우려하면서 미국이 튀르키예를 향해 제대로 의사 표명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월 25일, 총리가 비리 스캔들이 터진 당일에 아들과 함께 현금 은폐를 시도하는 내용의 녹음 파일이 공개되어 정계에 파문을 던졌다. 이에 그 동안 잦아들었던 총리 퇴진 시위가 다시 격화되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 10여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2월 26일에는 야당 인사들이 시위에 합세했으며, 시위대는 작년의 시위 구호를 변형시켜 "모든 곳이 뇌물, 모든 곳이 부패"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다음날인 27일에는 총리와 아들 간의 비리 관련 감청 자료가 추가 공개되어 파장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3월 11일에는 2013년 6월 빵을 사러 갔다가 길거리에서 최루탄을 맞고 의식을 잃었던 베르킨 엘반이라는 소년이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분노한 추모 인파를 주축으로 다시 시위가 격화되는 양상이다.## 에르도안 총리는 엘반의 사망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3월 21일에는 트위터를 차단했다. 에르도안 총리의 국제여론이 뭐라하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발언을 했다. 총리측은 일부 사생활을 침해하는 불법적 링크를 제거하지 않아서 차단을 하였다고 밝혔다. 현재 트위터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프록시 우회, SMS를 통하는 것 밖에 없다. 이에 대통령은 트위터로 차단을 하면 안된다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인터넷 검열 법안이 통과되고 SNS의 차단을 염려한 튀르키예 국민들이 경악하면서 반정부의사가 더욱 더 강해지고 있다. 더군다가 3월 30일에 치러지는 지방선거 이후에 더욱 더 인터넷의 부정사용을 추가 조치하겠다는 총리의 발언이 더욱 더 이를 심화시키고 있다.

3월 30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온갖 악재에도 불구하고 전국 득표율 45.6%를 기록해 제 1야당의 27.9%를 앞지르고 우세를 보였다. 총리에 대한 공격이 오히려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시킨 한편, 튀르키예의 경제 불안을 해결해 주길 바라는 열망이 집권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평. 한편 선거와 관련하여 일부 지역에서 부정투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이에 고무된 에르도안 총리는 8월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을 시사하였으며 또한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모든 헌법상의 권한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하였다. 당연히 야당은 반발하고 있으나 에르도안 총리의 학위 위조 논란같은 것이나 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야당 측도 상황이 그리 좋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4월 2일, 튀르키예 헌법재판소가 트위터 차단은 권리 침해라는 판결을 내렸다. 집권 여당은 판결에 불만을 나타냈으나, 결국 이튿날 트위터 차단을 해제하여 트위터 차단이 2주만에 풀렸다. 당연히 트위터는 열리자마자 정부에 대한 비난으로 봇물이 터졌다. 4일에는 튀르키예 지방법원이 유튜브 차단을 해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이 시리아 군사개입과 관련한 도청 동영상이 삭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고하여 상급심에서 차단을 유지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이에 유튜브가 튀르키예 헌법재판소에 접속 차단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얼마 후, 이번엔 트위터가 반대로 에르도안 총리의 부패 증거를 게시한 계정 2개를 폐쇄해 양자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4월 5일, 앙카라 지방선관위가 야당의 재검표 요청을 거부해 선거 공정성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다른 도시의 경우 재검표가 이뤄진 얄로바에서는 1차 투표 결과와 달리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아으르에서는 반대로 여당 측의 요구로 재검표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야당 후보의 승리가 재확인되어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다.

4월 17일, 여당이 야당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보당국의 권한과 면책특권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강행 처리시켜 민주주의 후퇴 및 쿠르드족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4월 22일, 다음달 노동절을 앞두고 시위가 다시 격화될 것을 우려한 튀르키예 정부가 노동절 당일 탁심광장을 폐쇄한다고 밝혀 튀르키예 노동계가 반발하였다. 한편, 튀르키예 헌법재판소장은 이 날 열린 헌법재판소 창립 52주년 기념식에서 에르도안 총리의 압력 행사를 비난하였다.

4월 29일, 에르도안 총리는 페튤라 귤렌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코멘트를 붙여가면서 미국에 망명중인 페튤라 귤렌의 국내 송환을 위한 법적 절차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하여 튀르키예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이미 탁심광장을 폐쇄한 정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주변 대로에 모여 집회를 가졌으며 튀르키예 경찰은 4만여 명의 경찰 인원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는 한편 기자들의 사진과 영상 취재를 금지했다.


6월 1일, 튀르키예 시위 1주년을 기념하여 CNN이 생중계를 하던 도중, 현지 사복경찰에게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기자는 30분 후 풀려났다고 했다.

3.3. 2016년

5월 31일, 반정부시위가 일어난지 3주년이 되면서 튀르키예 경찰은 다수의 시민 운동가들을 구금하고 이스탄불 전역에 다수의 병력들을 배치시켰다. 이때 탁심 광장과 게지 공원의 출입을 통제되었다.#

3.4. 2018년

2018년 5월 31일에는 시위 5주년을 기념하면서 에르도안에 반대하는 시위대 수백명이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행진했다.#

4. 기타

에르도안 정부의 강경 진압 원인을 분석한 글 참고.

한편 시리아 정부는 튀르키예 정부의 강경 진압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또한 시위의 여파로 튀르키예 경제가 입은 타격이 막대하다며 시위를 비판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다른 의견으로 이미 튀르키예 경제는 연착륙 시기에 돌입했으며 특히 현 정권의 이슬람주의가 튀르키예의 돈줄인 해외 투자자들을 우려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기사 마지막 줄)

또한 이스탄불에서 벌어지는 시위로 인해 튀르키예 정부는 2013년 9월 7일에 IOC 총회에서 결정될 예정인 2020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 있어 이스탄불 지지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서 여론 불만을 잠재우고 나아가 자신의 공로화 및 경제발전 토대화로 삼으려던 게 이렇게 무산되면서 에르도안 총리는 불안해하는 반응. 그래서 우선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분산 개최하는 유로 2020 결승전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치르며 유로 2024 개최로 목표를 바꾸었다.

한편, 튀르키예는 2014년에 지방선거대선을 앞두고 있다. 이번 시위가 과연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도 관심거리. 2014년 2월 들어서 에르도안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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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0일에 가진 튀르키예 지방선거의 결과는 정의개발당이 47.7%로 압승을 거두었다. 야당인 공화인민당과 민족주의행동당[6], 평화민주당은 선거 당일 수십여 개의 투표소에서 정전이 발생하고 투표 승인도장이 도난당하는 등의 혼선이 벌어진 점을 들어 현 집권여당의 조작이 의심된다며 이의를 제기했으나 정부는 "고양이가 송전기에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해서 그랬을 뿐이다."라며 부인했다. 2014년 지방선거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도를 갖고 있는데, 공화인민당은 세속주의자 비중이 높은 서부와 에게해 지방에서 주로 승리했고 쿠르드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는 평화민주당이 압승하는 등 튀르키예의 지역갈등이 더 심화되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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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놈들의 집에 불이 확 번지게 하소서!"
- 펫훌라흐 귈렌이 사찰 사건 이후 정의개발당을 향한 비난 성명에서 한 저주를 비꼰 짤방이다.
2014년 8월 대선에서도 에르도안이 승리했다.

이처럼 탄탄한 지지세를 기반으로 에르도안 정부는 펫훌라흐 귈렌 지지자로 알려진 언론인들을 대거 구속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으나 유가 하락과 러시아 루블화 폭락의 여파 등으로 튀르키예 리라화도 이전부터 계속되던 환율 불안이 더욱 가중되어 경제적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라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4.1. 튀르키예 정부에 대한 옹호 의견

한편, 위에 상술된 내용과는 다르게 튀르키예 지한통신사의 주한특파원인 알파고 시나씨는 인터뷰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 서방 언론들의 불균형적인 보도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우선 게지 공원 개발은 공원을 보존하면서 그 자리에 숙박시설을 세우는 것이 에르도안 정부의 목표였으며 그 건물의 1층에 기념박물관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쇼핑몰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게지 공원을 막무가내로 밀어버리려 한다'는 소문이 유포되면서 환경주의자들이 모여서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에르게네콘'과 같은 반정부주의자들이 게지 공원에서의 평화적인 시위에 가담하면서 이 시위를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에 맞게 변질시켰고 따라서 시위가 격화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튀르키예 시위 사태는 SNS를 통해 왜곡된 정보를 유포시켜서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는데 5년 전 국내에서의 광우병 파동때 유포되었던 괴소문들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다(시위를 48시간 이상 지속하면 에르도안 정부를 UN에서 인정하지 않게 된다 라던가...). 세 번의 선거에서 오히려 득표율이 올라가면서 당선된 에르도안 총리와 그의 AKP당을 전복하려는 반정부세력의 행동이 이번 '탁심사태'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알파고 시나씨의 인터뷰 내용도 참고하자.

4.2. 반박

정의개발당 홈페이지에 있는 비디오에서 선전하고 있는 탁심 개발 프로젝트를 보면 해당 사업의 목적을 탁심 로터리주변의 교통혼잡을 정리하기 위해 오스만베이, 아타튀르크 다리 방향과 탁심에서 베식타쉬방향으로 가는 차선을 지하화하고 탁심광장에 있던 포병부대 병영(Topçu kışlası)을 복원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서는 복원할 포병부대 병영을 어떤 용도로 쓸 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언론보도된 대로 게지공원 시위의 시작은 게지공원 자리에 포병부대 병영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한 환경 운동가들의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그 건물이 쇼핑몰로 쓰이든 호텔로 쓰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게지공원 주변에는 대형 호텔이 이미 세개나 있고(그중 하나가 코치그룹에서 운영하는 디완 호텔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큰 호텔이다) 바로 옆골목에도 고급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스탄불을 관광하는 관광객들은 주로 구시가지인 술탄아흐멧에서 숙박하며 이 주위의 고급 호텔들은 비즈니스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주로 묵는다. 하지만 이스탄불 비즈니스의 중심지도 탁심이 아니라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레벤트(Levent)와 마슬락(Maslak)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라 탁심지역 호텔들의 경기도 예전만큼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쇼핑몰로 이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탁심 주변에 이미 발달한 부티크, 명품거리, 재래시장들 때문에 별로 의의가 없다. 튀르키예인들은 아직까지는 대형마트나 백화점보다는 동네 근처의 소매점에서 물건을 주로 사는 편이며 대형마트나 백화점은 차로 접근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가려면 자동차가 필요하다. 문제의 병영은 1780년에 세워져서 병영으로 잘 쓰다가 1860-1870년대 오스만 제국 포병부대의 혁신화의 시범부대로 선정됨에 따라 오스만 제국 군대의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다 1913년에 오스만 국민 무역, 상사(Sanayi ve Ticaret Şirket-i Milliye-i Osmaniye)라는 회사에 팔렸고 건물의 중앙 회랑을 철거해 축구장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원래는 날일(日)자 모양의 건물이었던 것이다. 헌데 AKP측의 복원영상을 보면 축구경기장 시절때처럼 가운데 회랑은 복원하지 않는다. 이 축구경기장은 1923년 튀르키예공화국 수립이후 튀르키예 국가대표팀의 홈경기장으로 쓰였고 이곳에서 루마니아 국가대표팀과 첫 경기를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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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경기장 시절 탁심병영의 모습

하지만 탁심병영은 1940년에 건축가 앙리 프로스트(Henri Prost)에 의해 철거된다. 앙리 프로스트는 1935년부터 1951년 사이에 이스탄불의 현대화를 위한 설계를 담당했던 인물로 이 경기장 자리에 공공체육시설을 세로 건설하려 했지만 당국에서 교통혼잡을 우려로 계획을 변경했다. 그 대신 세워진것이 바로 인근에다가 1939년에 첫 삽을 뜨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7년에야 완공된 베식타스 JK의 홈경기장인 이뇌뉘 경기장이었다. 결국 병영자리는 오늘날의 게지공원으로 변경되어 이어져오고 있다. 문제는 탁심병영이 '신오스만주의'(Neo Ottomanism)를 추구하는 이슬람주의자들에게 '혁신'의 아이콘으로서 홍보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고 현 정의개발당이 구태여 공원에다 탁심병영을 세우려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한가지 더 말해야 할 것은 튀르키예는 에르도안 정부 들어 언론자유도가 154위로 추락했고 이는 세계 최하위권 수준이다. 정부의 언론검열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실제로 심심하면 언론인 구속소식이 들려오는게 튀르키예다. 여기서 해당 통신사 기자의 주장은 전형적인 AKP측의 입장이며 지한통신사의 상당한 지분을 AKP와 밀월관계에 있던 페툴라 귈렌회에 있다. AKP측의 페툴라 귈렌화 인사들에 대한 사찰이 폭로된 이후로는 지한통신사도 AKP에 적대적인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4.3. Istanbul Unite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stanbul_United_(A_brochure_about_the_Taksim_Gezi_Park_protests).jpg
위에서 언급한 이스탄불의 훌리건 연합은 이스탄불 시민들에게도 충공깽이었는지 합성 짤방이 만들어지고 있다.(…) 위 짤방의 가상 엠블럼은 갈라타사라이 SK, 페네르바흐체 SK, 베식타쉬 JK 각 팀의 엠블럼을 짜맞춘 것.[7]

물과 기름과도 같은 저 세 팀의 서포터가 연합시위를 벌인 데대해 나름 반향이 있었던지, 2014년 'Istanbul United'라는 동명 영화가 상영되기도 했다.

4.4. 현재의 탁심

결국 에르도안 정부도 반발을 인식해서인지 한 발 물러섰다. 기존의 탁심 프로젝트에서 도로 지하화는 했지만 게지 공원은 남겨두었고 탁심 병영의 복원또한 백지화되었다. 하지만 바로 건너편에다 거대한 모스크를 세워서 2021년에 완공되었다. 과거 탁심지역은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주로 기독교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고, 유럽의 대사관들이 밀집한 곳이었기 때문에 오래된 모스크가 딱히 없는데 특히 탁심광장 주변에는 튀르키예에서 그 흔한 모스크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대신 근처에 정교회성당 하나와 아르메니아교회가 하나, 가톨릭 이스탄불 교구 주교좌성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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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스웨덴과 호주, 캐나다등의 서방 기독교권 혹은 세속주의 선진국이라도 술 판매에 걸맞은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어긋나는 시공간에서 술을 팔면 처벌하고 섭취장소를 제한하는 국가도 있다.[2] 아이란(Ayran)은 요구르트소금을 타서 희석한 음료이다.[3] 하지만 원래 튀르크인들이 마셨던 아이란은 말젖으로 담근 술이다.[4] 샤다라빠의 웹툰에선 팀 관계에 따라서는 형제같은 관계니 뭐니 하는 얘기도 나오고 하는데 본인도 직접 가서는 회의감을 느끼는 게 나오지만 정작 경기 치르면 그런 거 없다. 그냥 전쟁인 거다. 하도 유혈사태가 터지곤 해서 아예 여자들만 경기장에 입장시키거나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썼는데도 안 바뀌는 게 여기 더비다. 여자들만 들여보냈는데도 자기들끼리 머리끄댕이 잡고 남자 못지않게 잘만 싸웠다.[5] 튀르키예는 81개의 도(il)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도에는 정부에서 임명해서 파견하는 도지사(vali)와 민선 선출인 도지사(belediye başkan)가 담당한다. 중앙집권적인 튀르키예 지방정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으로 지방자치단체장의 권한은 정부에서 임명한 도지사가 민선 도지사보다 더 강하다. 각 도 안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시, 군, 읍이 있는데 이 중 민선 도지사는 도청소재지라 할 수 있는 중심 도시(각 도의 이름을 따온 도시, 예를 들어 이즈미르 도의 중심 도시는 이즈미르 시이며, 그 중에서도 코낙 구청장이 민선 도지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하나만을 담당하는 반면에 도지사는 도 전체를 총괄하기 때문. 즉 여기서 휘세인 아브니 무틀루는 관선 도지사이고 앞서 시위대의 말을 듣겠다고 한 카디르 톱바쉬는 민선 도지사이다.[6] 이 정당은 튀르키예 정치 스펙트럼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정당이다.[7] 갈라타사라이의 겹친 S와G + 페네르바흐체의 오크 이파리 + 베식타쉬의 방패 문양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