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Arcaea/스토리
스토리 | |
Act I Creation | Act II Catastrop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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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rcaea 스토리의 Act I: Creation의 두 번째 파트를 기록한 문서.2. Main Story
2.1. 히카리/타이리츠
2.2.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VS-1 | Black-1 | Equilibrium 클리어 | ||
VS-2 | Black-2 | 타이리츠로 Antagonism 클리어 | ||
VS-3 | Black-3 | 히카리로 Equilibrium 클리어 | ||
VS-4 | Black-4 | 히카리로 #1f1e33 클리어 | ||
VS-5 | Black-5 | 타이리츠로 Dantalion 클리어 | ||
VS-6 | Black-6 | 타이리츠로 Lost Desire 클리어 | ||
VS-7 | Black-7 | Black Fate의 Anomaly곡 해금 | ||
VS-8 | Black-8 | Black Fate의 Terminal곡 해금 |
2.2.1. Black Fate
=====# VS-1 #=====히카리.
타이리츠.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빛”과 “대립”... 이 기묘한 세계의 소녀들에게 주어진 숭고한 이름.
그들이 그 의미를 알았더라면, 다른 길을 걸었을까?
아니면,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두 소녀는 결국 반목과 불화로 치달을 운명인걸까?
아직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히카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름을 모르는 타이리츠는, 지식으로 저주받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히카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반목하게 될 운명임을.
무엇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무엇도.
백색의 소녀와 흑색의 소녀는 화합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결국 마지막엔...
“앗!”
히카리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즉시 손을 올려 유리를 불러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유리 칼날을 막아냈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혔다. 히카리의 유리는 빛을 발하며 충격을 버텨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진심 어린 대화가, 어느새 마음을 부딪히는 싸움이 되어있었다.
타이리츠의 힘에 밀린 히카리는 몸을 굽혀 뒤로 한 걸음 후퇴했다.
전신이 차가웠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깊숙이 바라보며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공포의 원천은 갑작스러운 타이리츠의 공격도, 자신의 목덜미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타이리츠의 칼날도 아니었음을.
손에 쥔 땀도, 뱉을 수 없는 숨도, 이 모든 것이 타이리츠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히카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그 타이리츠가 아니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먹잇감을 노리는 듯 날카로운 눈동자, 움직이지 않는 입, 세게 쥐다 못해 붉게 물드는 손.
저것은 검은 옷을 입은 짐승이었다. 악의로 물든 그림자였다.
타이리츠.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빛”과 “대립”... 이 기묘한 세계의 소녀들에게 주어진 숭고한 이름.
그들이 그 의미를 알았더라면, 다른 길을 걸었을까?
아니면,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두 소녀는 결국 반목과 불화로 치달을 운명인걸까?
아직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히카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름을 모르는 타이리츠는, 지식으로 저주받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히카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반목하게 될 운명임을.
무엇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무엇도.
백색의 소녀와 흑색의 소녀는 화합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결국 마지막엔...
“앗!”
히카리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즉시 손을 올려 유리를 불러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유리 칼날을 막아냈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혔다. 히카리의 유리는 빛을 발하며 충격을 버텨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진심 어린 대화가, 어느새 마음을 부딪히는 싸움이 되어있었다.
타이리츠의 힘에 밀린 히카리는 몸을 굽혀 뒤로 한 걸음 후퇴했다.
전신이 차가웠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깊숙이 바라보며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공포의 원천은 갑작스러운 타이리츠의 공격도, 자신의 목덜미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타이리츠의 칼날도 아니었음을.
손에 쥔 땀도, 뱉을 수 없는 숨도, 이 모든 것이 타이리츠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히카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그 타이리츠가 아니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먹잇감을 노리는 듯 날카로운 눈동자, 움직이지 않는 입, 세게 쥐다 못해 붉게 물드는 손.
저것은 검은 옷을 입은 짐승이었다. 악의로 물든 그림자였다.
=====# VS-2 #=====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타협점을 찾아보자.
약해지지 마. 흔들리지 마.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히카리는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모두 싸움과 갈등의 고통이라면 수없이 많은 기억에서 보고 느꼈다. 하지만 기억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급조한 칼날들이 또다시 부딪혔다. 그 모습에 우아함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직선적이고 사나웠다.
히카리의 움직임은 절박했으며, 치명적인 일격을 한 끗 차이로 겨우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방어에만 전념했다. 이 싸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그리하고 싶었다.
무너진 교회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둘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했다. 뚫린 천장 아래에 늘어진 조명과 좌석들, 그 사이로 소녀들은 움직이며 합을 주고받았다.
타이리츠가 히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히카리는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구원했던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곧 다가올 올려베기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었다는 듯, 타이리츠는 자신의 검은 양산을 찔러 넣어 히카리의 방어를 뚫었다.
“으윽...! 하앗...!”
히카리가 고통에 숨을 내뱉었다. 마치 손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구부러진 듯했다.
그녀의 기묘한 유리 조각이 땅으로 떨어져 굴렀다. 무기를 잃은 히카리는 고통을 삼키며 뒤로 도약하여 후퇴했다.
히카리는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 또 한번 도약했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좌석에 착지하자 또다시 공격이 날아왔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정녕 대화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걸까?
말로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히카리는 몰랐다.
뭘 말해야 할지 알고 있더라도, 타이리츠는 히카리에게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만약 히카리가 해야 할 말을 알고, 그 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타이리츠에게서 거리를 만들어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할 시간조차—
또다시 칼날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히카리의 뺨을 재빠르게 스쳤다—
그렇게, 칼날이, 그녀의 얼굴을 베었다.
타협점을 찾아보자.
약해지지 마. 흔들리지 마.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히카리는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모두 싸움과 갈등의 고통이라면 수없이 많은 기억에서 보고 느꼈다. 하지만 기억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급조한 칼날들이 또다시 부딪혔다. 그 모습에 우아함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직선적이고 사나웠다.
히카리의 움직임은 절박했으며, 치명적인 일격을 한 끗 차이로 겨우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방어에만 전념했다. 이 싸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그리하고 싶었다.
무너진 교회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둘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했다. 뚫린 천장 아래에 늘어진 조명과 좌석들, 그 사이로 소녀들은 움직이며 합을 주고받았다.
타이리츠가 히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히카리는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구원했던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곧 다가올 올려베기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었다는 듯, 타이리츠는 자신의 검은 양산을 찔러 넣어 히카리의 방어를 뚫었다.
“으윽...! 하앗...!”
히카리가 고통에 숨을 내뱉었다. 마치 손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구부러진 듯했다.
그녀의 기묘한 유리 조각이 땅으로 떨어져 굴렀다. 무기를 잃은 히카리는 고통을 삼키며 뒤로 도약하여 후퇴했다.
히카리는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 또 한번 도약했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좌석에 착지하자 또다시 공격이 날아왔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정녕 대화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걸까?
말로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히카리는 몰랐다.
뭘 말해야 할지 알고 있더라도, 타이리츠는 히카리에게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만약 히카리가 해야 할 말을 알고, 그 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타이리츠에게서 거리를 만들어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할 시간조차—
또다시 칼날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히카리의 뺨을 재빠르게 스쳤다—
그렇게, 칼날이, 그녀의 얼굴을 베었다.
=====# VS-3 #=====
히카리는 또다시 숨을 쉬기가 힘들어짐을 느꼈다. 왼쪽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익숙한 붉은색이,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또다시...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히카리는 뒷걸음치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떨림을 멈추고 싶었다. 입 안에 차오르는 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만해...”
그리고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제발... 그만해...”
또다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조각을 본래 목표였던 히카리의 팔이 있던 공간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제발 그만해!”
히카리가 마침내 소리쳤다.
“네 목적은 알고 있어.”
히카리가 멈추어 섰다. 그녀로부터 다섯 열 떨어진 좌석에 타이리츠가 착지했다.
“하지만 네 정체는 몰라. 넌 뭐지? 이 세계가 만들어낸 악마인가?” 타이리츠가 물었다.
“뭐!?”
“아니면 또 나를 사냥하러 온, 죽어버린 세계의 흔적인가?”
“아니… 아니야!” 히카리가 외쳤다.
“너도 네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가...” 타이리츠가 말했다.
히카리는 그제야 눈치챘다. 수없이 많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마치 말벌 무리처럼 타이리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히카리는 그 조각들을 바라보며 경계했다.
“뭐든 간에, 날 찾아냈으니… 결코 좋은 존재는 아닐테지.”
타이리츠가 고통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말해준 과거를 떠올리고,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나는... 달라...”
히카리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유리 조각이 총알처럼 날아와 그녀의 귀 옆을 스쳤다.
히카리는 눈을 감았다. 차올라있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눈을 내리뜬 히카리는 새로운 유리 조각을 불러 손에 쥐었다. 유리 조각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그 등 뒤로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또다시, 한때 친구가 되길 바랬던 소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히카리는 뒷걸음치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떨림을 멈추고 싶었다. 입 안에 차오르는 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만해...”
그리고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제발... 그만해...”
또다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조각을 본래 목표였던 히카리의 팔이 있던 공간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제발 그만해!”
히카리가 마침내 소리쳤다.
“네 목적은 알고 있어.”
히카리가 멈추어 섰다. 그녀로부터 다섯 열 떨어진 좌석에 타이리츠가 착지했다.
“하지만 네 정체는 몰라. 넌 뭐지? 이 세계가 만들어낸 악마인가?” 타이리츠가 물었다.
“뭐!?”
“아니면 또 나를 사냥하러 온, 죽어버린 세계의 흔적인가?”
“아니… 아니야!” 히카리가 외쳤다.
“너도 네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가...” 타이리츠가 말했다.
히카리는 그제야 눈치챘다. 수없이 많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마치 말벌 무리처럼 타이리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히카리는 그 조각들을 바라보며 경계했다.
“뭐든 간에, 날 찾아냈으니… 결코 좋은 존재는 아닐테지.”
타이리츠가 고통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말해준 과거를 떠올리고,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나는... 달라...”
히카리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유리 조각이 총알처럼 날아와 그녀의 귀 옆을 스쳤다.
히카리는 눈을 감았다. 차올라있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눈을 내리뜬 히카리는 새로운 유리 조각을 불러 손에 쥐었다. 유리 조각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그 등 뒤로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또다시, 한때 친구가 되길 바랬던 소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 VS-4 #=====
철제 문이 마치 유리처럼 산산조각났다. 흑색의 소녀가 백색의 소녀에게 달려들자 기억의 조각이 마구 회오리쳤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내고선 뒤로 밀려났다. 히카리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 진심으로 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이리츠만큼 유리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할지라도, 그 실력이 아무리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히카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급하게 덧댄 천조각처럼 얽혀 만들어진 방어막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히카리의 눈은 유리 조각보다 날카롭게 흑색의 소녀를 추적했다. 그 눈은 힘을 통해 이 싸움을 평화롭게 끝내겠다는 결심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교회에서 벗어나 아르케아의 뒤틀린 길과 언덕길 사이로 와서야 타이리츠는 마침내 자신의 힘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는 히카리에게 절대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며 유리 조각을 넓게 펼쳐 휘둘렀다.
히카리는 처절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찰나의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투명한 칼로 투명한 단검을 막아냈고, 빛나는 창이 목을 꿰뚫기 전에 재빨리 유리 조각을 부딪쳐 궤도를 비틀었다.
한 합, 두 합, 그렇게 합을 나눌 때마다 확실해졌다. 이것은 더 이상 정제되지 못한 폭력의 소용돌이가 아닌, 강력한 두 적수의 충돌이었다.
히카리의 힘은 타이리츠의 것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히카리는 그 차이를 날카로운 기지와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메꾸었다.
타이리츠라는 이름의, 눈앞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맞서기 위해,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할 것이다. 닳을 지언정 부서지지 않는 바위처럼.
히카리가,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둘은 호각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빛줄기가 매끈한 아르케아의 표면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타이리츠가 전법을 바꾸었을 때였다. 그녀는 히카리의 방어를 그대로 꿰뚫는 대신, 예고 없이 히카리의 오른편에서 유리 조각 무리를 쏟아냈다.
강렬한 충격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빛나는 유리 파편들이 폭발하듯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히카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타이리츠의 눈동자가 음산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양산을 들어 그 끝을 오로지 단 하나의 과녁, 히카리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타이리츠는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나갔다.
히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이리츠의 미간이 희열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타이리츠의 공격은 히카리에게 닿기 전에 멈추었다. 두 소녀의 짓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나타난 무언가의 힘이었다.
히카리와 타이리츠 사이에 떠있는 것은, 아까 히카리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던 기묘한 유리 조각이었다.
양산 끝에 가시를 마치 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히카리는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엣!?”
“이건...”
타이리츠가 반대쪽 손을 들어 유리 조각의 무리를 불러냈다.
히카리 또한 망설임 없이 기묘한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의, 누구의 통제 하에도 있지 않던 유리 조각들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내고선 뒤로 밀려났다. 히카리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 진심으로 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이리츠만큼 유리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할지라도, 그 실력이 아무리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히카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급하게 덧댄 천조각처럼 얽혀 만들어진 방어막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히카리의 눈은 유리 조각보다 날카롭게 흑색의 소녀를 추적했다. 그 눈은 힘을 통해 이 싸움을 평화롭게 끝내겠다는 결심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교회에서 벗어나 아르케아의 뒤틀린 길과 언덕길 사이로 와서야 타이리츠는 마침내 자신의 힘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는 히카리에게 절대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며 유리 조각을 넓게 펼쳐 휘둘렀다.
히카리는 처절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찰나의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투명한 칼로 투명한 단검을 막아냈고, 빛나는 창이 목을 꿰뚫기 전에 재빨리 유리 조각을 부딪쳐 궤도를 비틀었다.
한 합, 두 합, 그렇게 합을 나눌 때마다 확실해졌다. 이것은 더 이상 정제되지 못한 폭력의 소용돌이가 아닌, 강력한 두 적수의 충돌이었다.
히카리의 힘은 타이리츠의 것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히카리는 그 차이를 날카로운 기지와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메꾸었다.
타이리츠라는 이름의, 눈앞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맞서기 위해,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할 것이다. 닳을 지언정 부서지지 않는 바위처럼.
히카리가,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둘은 호각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빛줄기가 매끈한 아르케아의 표면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타이리츠가 전법을 바꾸었을 때였다. 그녀는 히카리의 방어를 그대로 꿰뚫는 대신, 예고 없이 히카리의 오른편에서 유리 조각 무리를 쏟아냈다.
강렬한 충격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빛나는 유리 파편들이 폭발하듯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히카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타이리츠의 눈동자가 음산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양산을 들어 그 끝을 오로지 단 하나의 과녁, 히카리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타이리츠는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나갔다.
히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이리츠의 미간이 희열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타이리츠의 공격은 히카리에게 닿기 전에 멈추었다. 두 소녀의 짓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나타난 무언가의 힘이었다.
히카리와 타이리츠 사이에 떠있는 것은, 아까 히카리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던 기묘한 유리 조각이었다.
양산 끝에 가시를 마치 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히카리는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엣!?”
“이건...”
타이리츠가 반대쪽 손을 들어 유리 조각의 무리를 불러냈다.
히카리 또한 망설임 없이 기묘한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의, 누구의 통제 하에도 있지 않던 유리 조각들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 VS-5 #=====
마치 폭풍과 같았다.
히카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유리 조각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히카리는 이 폭풍을 다루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전세에, 타이리츠는 동요하는 표정을 한 채 뒤로 물러섰다. 히카리의 모습은 유리의 폭풍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히카리는 새로 얻은 이 힘을 제어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타이리츠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히카리의 폭풍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선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폭풍에 맞서려면, 홍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도시와 새하얀 산맥으로부터, 수 천 개의 유리 조각이 타이리츠의 부름에 응답해 날아왔다.
무질서한 히카리의 폭풍과는 다르게, 타이리츠의 유리 조각 무리는 정돈되어, 무기질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오와 열을 이루고 있었다.
흑색의 소녀 등 뒤로 유리 조각들이 거대한 장미의 형상을 이루어, 그 꽃잎이 휘날리듯 하나씩 떨어져 나와 백색의 소녀를 지키고 있는 돌풍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히카리는 두려움을 삼키고서 일어나, 타이리츠의 공격과 똑같이, 정돈된 공격으로 맞받아쳤다.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고, 일격을 또 다른 일격을 불렀다. 싸움 속에서 두 장대한 힘이 미친 듯이 뒤엉켰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은 타이리츠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비에 맞서는 비, 번쩍이는 ‘번개’, 일렁이는 ‘구름’이 터져 나오고 소용돌이치며 폭발적인 광경을 이루었다.
대자연의 힘으로 빚어낸 빛의 전쟁이었다.
그렇게 휘몰아치는 은빛 홍수 아래에, 불꽃의 심장을 지닌 두 소녀가 서 있었다.
수 밀리미터 차이로 공격이 빗나갔다. 둘은 더 이상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달리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아르케아의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유리 조각의 대포를 만들어 서로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두 소녀 사이로 '포탄'의 파편이 반짝이며 부서졌다. 두 소녀는 유리 조각으로 서로를 직접 공격하거나, 길을 막거나, 발목을 노려 움직임을 방해했다.
광란, 끝없이 계속되는 혼돈.
어느새 두 소녀의 움직임이 점점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규칙성을 띠기 시작했다.
피하고, 쏘고, 피하고, 쏘고.
이 압도적인 폭력과 아름다움 안에서, 둘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타이리츠가 다시 우위에 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 VS-6 #=====
이 세계에서 타이리츠가 걸어온 길은 지옥도였다.
첫걸음을 뗐을 때부터 지옥이었다. 아니, 타이리츠는 그 첫걸음조차 부정당했다.
처음으로 눈을 뜨고 시작했던 여정은, 이윽고 쏟아지는 비탄과 비극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때 이래로, 비탄과 비극은 타이리츠를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이 모든게 마치 잔인한 농담같아.
나는 악인이 아니야.
이 검은 옷도, 날 괴롭히는 끔찍한 기억들도, 내가 아니야.
나는 “악한” 사람이 아니야. 악한 세계에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이야.
이성도, 법칙도 없어.
마치 깨어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아.
너무나도 잔인하고 차가운 세계.
나의 끝은, 한심하고 의미 없는 죽음이겠지.
...
이러한 생각 때문에, 타이리츠는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끝이다.
타이리츠는 다시 결심하며, 히카리가 날려보낸 유리 조각들을 스치듯이 피했다.
그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몇 분 전에 느꼈던 익숙하지만 기괴한 기척.
현실 그 자체가 정합성을 잃어버리는 듯한, 불가능의 현현.
그 기이한 느낌이 뺨을 스쳤다.
타이리츠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보랏빛 유리 조각이었다.
한 순간, 찰나였다.
그 사이에 조각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 기이한 조각은 기억을 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예상을 뛰어넘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 표면에서 발하는 빛이 타이리츠의 눈에 닿자 마자,
머릿속이 빛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 세계의 모든 지식,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타이리츠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름.
과거.
세계.
목적.
“히카리”
“타이리츠”
“에토”와 “코우”... “사야”와 “레테”... “루나”와... 이름. 수없이 많은 이름.
다른 세계의 지식. 다른 여행자들과 그 목적지에 대한 지식. 끝, 시작, 그리고 이유와 목적. 그 모든 것들.
그리고, 진실,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은...
히카리가 잠시 멈춰 섰다. 타이리츠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공포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타이리츠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한 새장의 진실을 알아냈다. 그 지식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지식과 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
감정이 마구 뒤틀린다. 타이리츠의 가슴 속에 꽈리를 틀었던 끝없는 독기가 전신에 퍼져, 혀로, 이로 옮겨간다.
그 입술이 쓰디쓴 미소로 뒤틀린다. 쓰디쓰지만, 이상하게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로.
웃어라, 소녀야. 폭풍우를 일으켜라.
인류 최악의 기억으로 타올라 빚어진 이 길. 그 끝에 있는 것은 종말일 것이니.
그때가 찾아오면, 너희 둘 중 하나는, 목숨을 잃으리라.
첫걸음을 뗐을 때부터 지옥이었다. 아니, 타이리츠는 그 첫걸음조차 부정당했다.
처음으로 눈을 뜨고 시작했던 여정은, 이윽고 쏟아지는 비탄과 비극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때 이래로, 비탄과 비극은 타이리츠를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이 모든게 마치 잔인한 농담같아.
나는 악인이 아니야.
이 검은 옷도, 날 괴롭히는 끔찍한 기억들도, 내가 아니야.
나는 “악한” 사람이 아니야. 악한 세계에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이야.
이성도, 법칙도 없어.
마치 깨어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아.
너무나도 잔인하고 차가운 세계.
나의 끝은, 한심하고 의미 없는 죽음이겠지.
...
이러한 생각 때문에, 타이리츠는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끝이다.
타이리츠는 다시 결심하며, 히카리가 날려보낸 유리 조각들을 스치듯이 피했다.
그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몇 분 전에 느꼈던 익숙하지만 기괴한 기척.
현실 그 자체가 정합성을 잃어버리는 듯한, 불가능의 현현.
그 기이한 느낌이 뺨을 스쳤다.
타이리츠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보랏빛 유리 조각이었다.
한 순간, 찰나였다.
그 사이에 조각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 기이한 조각은 기억을 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예상을 뛰어넘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 표면에서 발하는 빛이 타이리츠의 눈에 닿자 마자,
머릿속이 빛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 세계의 모든 지식,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타이리츠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름.
과거.
세계.
목적.
“히카리”
“타이리츠”
“에토”와 “코우”... “사야”와 “레테”... “루나”와... 이름. 수없이 많은 이름.
다른 세계의 지식. 다른 여행자들과 그 목적지에 대한 지식. 끝, 시작, 그리고 이유와 목적. 그 모든 것들.
그리고, 진실,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은...
히카리가 잠시 멈춰 섰다. 타이리츠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공포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타이리츠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한 새장의 진실을 알아냈다. 그 지식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지식과 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
감정이 마구 뒤틀린다. 타이리츠의 가슴 속에 꽈리를 틀었던 끝없는 독기가 전신에 퍼져, 혀로, 이로 옮겨간다.
그 입술이 쓰디쓴 미소로 뒤틀린다. 쓰디쓰지만, 이상하게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로.
웃어라, 소녀야. 폭풍우를 일으켜라.
인류 최악의 기억으로 타올라 빚어진 이 길. 그 끝에 있는 것은 종말일 것이니.
그때가 찾아오면, 너희 둘 중 하나는, 목숨을 잃으리라.
=====# VS-7 #=====
호각의 싸움이라는 환상이 깨지고, 히카리의 희망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히카리의 폭풍이 타이리츠의 곁으로 옮겨가 그녀를 어둠과 빛으로 가렸다.
폭풍에 둘러싸인 타이리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자, 무수한 기억으로 이루어졌던 폭풍은 여섯 개의 거대한 날개가 되어 타이리츠의 등 뒤로 펼쳐졌다.
자연법칙을 농락하듯 하늘로 부유한 타이리츠는,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히카리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짐승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월적인,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유리 조각이 그녀의 등 뒤로 마치 거대한 천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천공의 빛처럼 투명하게 일렁였다.
지상의 히카리에겐 더 이상 타이리츠와 싸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 타이리츠라고 해서 만물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분명히!
히카리는 스무 개의 유리 조각을 불러 모아 하늘의 초월자에게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타이리츠의 유리 조각 몇 개가 천천히 날아왔다. 히카리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할 수 있겠어.’ 히카리가 생각했다.
저 화려한 유리의 장막도, 그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히카리는 전과 같이 방어막을 펼친 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재빠르게 떨어지는 유리 조각들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를 좇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자신감이 마음속으로부터 차올랐다. 아직까지 한 조각도 놓치지 않았다. 미소가 히카리의 입가에 걸렸다.
최악의 경우, 도주하여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히카리의 가슴으로, 유리 조각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치 히카리의 환상을 깨부수듯이. 그 어떤 아르케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 조각에서 타이리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난은 끝이야. 이제 그만 죽어.”
조각이 히카리의 드레스를 파고들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흑색의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만연하던 비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히카리가 여태껏 보아왔던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조각은 히카리의 살에 닿는 일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부서진 조각이 회오리가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회오리는 지나가며 히카리의 옷과 살을 베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메세지였다. 흑색의 소녀는, 히카리를 죽이기 전에,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유리의 급류가, 마치 거센 돌풍이 몰아치듯 예리하게 히카리의 주변을 휘돌았다.
두려움이 히카리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타이리츠가 하는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히카리는 그렇게 서서, 추악한 세계의 기억을 보았다.
고통, 배신, 질투,
죽음, 고난, 퇴락의 기억.
순수할 정도의 어둠. 이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에는... 빛이 없다.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
타이리츠가 묘사한 바와 같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해서 타이리츠를 괴롭게 한 혐오스러운 기억들.
그녀는 이제 그 기억들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할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히카리의 소매를 갈고리처럼 붙잡고, 치맛자락에 박혔다.
히카리는 유리 조각들에게 끌려 하늘 위로 올라갔다. 더 이상 두 발로 설 수 없는 곳으로.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죽음을 앞에 두고 느끼는 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다.
이 감정을 표현하기에 “두려움”은 무른 단어다.
절박함인가? 희망인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끔찍한 광경.
주마등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과거의 기억에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만한 방법을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검은 폭풍이 다가와 히카리의 몸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고통을 안겨주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폭풍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의도만으로 살이 베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기억이든 타인의 기억이든, 히카리가 겪고 들은 그 모든 경험을 뛰어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지를 마주했다는 공포와, 이 끝에 다다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
그 두 감정과 인식이 역겹게 뒤섞인 결과물은...
끔찍한 공포.
“두려움” 따위가 아닌,
끔찍한 이해.
이 곳에서 자신의 명에 따르는 유리 조각은 없다.
기적이든, 이상현상Anomaly이든, 뭐든 일어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히카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미래는 없다.
지면이 울리더니 솟아올랐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둘 사이에 끼어드려는 듯이.
지금이다.
바로 지금! 자신을 구원할 유리 조각이 나타날 것이다!
히카리는 온 힘을 다해 세계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어떤 운명의 장난이, 어떤 인과율의 결과가,
히카리에게 승리할 힘을 쥐어줄 ‘신’을 만들어내리라!
빌어라. 기도해라.
너를 구원했던 그 조각을, 또다시 그 피 흐르는 가슴 가까이에 간직하라.
구원의 표상인 그 조각을. 그리하면 분명히...!
또 다른 유리 조각이 소녀의 몸을 찔렀다. 마치 심장을 관통하는 말뚝과도 같았다.
조각은 심장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메세지는, 그 최후의 메세지는, 히카리의 마음을, 의지를 꿰뚫었다.
흑색의 소녀로부터 온 마지막 메세지였다. 아주 단순하고, 무자비한 메세지.
“그런 일은 없어.”
히카리의 가슴에 박혀 거의 목숨을 빼앗아갈 뻔한 그 조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화재의 기억을 비추고 있었다.
죽음에 이렇게나 가까운 순간에도, 히카리의 심장은 뛰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이.
히카리의 동공이 수축했다.
화재의 기억처럼,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
고통. 격렬한 고통. 그리고 피...
히카리가 가슴팍의 상처를 움켜잡으려 손을 펴자 그녀를 구원했던 조각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폭풍우로부터 조각이 하나 빠져나와 손등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마저 쉴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 눈은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해서는 안 될, 하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끔찍한 현실이.
히카리는, 이윽고, 자아마저 잃기 시작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히카리의 폭풍이 타이리츠의 곁으로 옮겨가 그녀를 어둠과 빛으로 가렸다.
폭풍에 둘러싸인 타이리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자, 무수한 기억으로 이루어졌던 폭풍은 여섯 개의 거대한 날개가 되어 타이리츠의 등 뒤로 펼쳐졌다.
자연법칙을 농락하듯 하늘로 부유한 타이리츠는,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히카리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짐승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월적인,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유리 조각이 그녀의 등 뒤로 마치 거대한 천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천공의 빛처럼 투명하게 일렁였다.
지상의 히카리에겐 더 이상 타이리츠와 싸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 타이리츠라고 해서 만물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분명히!
히카리는 스무 개의 유리 조각을 불러 모아 하늘의 초월자에게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타이리츠의 유리 조각 몇 개가 천천히 날아왔다. 히카리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할 수 있겠어.’ 히카리가 생각했다.
저 화려한 유리의 장막도, 그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히카리는 전과 같이 방어막을 펼친 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재빠르게 떨어지는 유리 조각들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유리 조각의 무리를 좇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자신감이 마음속으로부터 차올랐다. 아직까지 한 조각도 놓치지 않았다. 미소가 히카리의 입가에 걸렸다.
최악의 경우, 도주하여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히카리의 가슴으로, 유리 조각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치 히카리의 환상을 깨부수듯이. 그 어떤 아르케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 조각에서 타이리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난은 끝이야. 이제 그만 죽어.”
조각이 히카리의 드레스를 파고들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흑색의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만연하던 비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히카리가 여태껏 보아왔던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조각은 히카리의 살에 닿는 일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부서진 조각이 회오리가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회오리는 지나가며 히카리의 옷과 살을 베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메세지였다. 흑색의 소녀는, 히카리를 죽이기 전에,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유리의 급류가, 마치 거센 돌풍이 몰아치듯 예리하게 히카리의 주변을 휘돌았다.
두려움이 히카리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타이리츠가 하는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히카리는 그렇게 서서, 추악한 세계의 기억을 보았다.
고통, 배신, 질투,
죽음, 고난, 퇴락의 기억.
순수할 정도의 어둠. 이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에는... 빛이 없다.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
타이리츠가 묘사한 바와 같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해서 타이리츠를 괴롭게 한 혐오스러운 기억들.
그녀는 이제 그 기억들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할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히카리의 소매를 갈고리처럼 붙잡고, 치맛자락에 박혔다.
히카리는 유리 조각들에게 끌려 하늘 위로 올라갔다. 더 이상 두 발로 설 수 없는 곳으로.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죽음을 앞에 두고 느끼는 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다.
이 감정을 표현하기에 “두려움”은 무른 단어다.
절박함인가? 희망인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끔찍한 광경.
주마등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과거의 기억에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만한 방법을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검은 폭풍이 다가와 히카리의 몸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고통을 안겨주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폭풍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의도만으로 살이 베어 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기억이든 타인의 기억이든, 히카리가 겪고 들은 그 모든 경험을 뛰어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지를 마주했다는 공포와, 이 끝에 다다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
그 두 감정과 인식이 역겹게 뒤섞인 결과물은...
끔찍한 공포.
“두려움” 따위가 아닌,
끔찍한 이해.
이 곳에서 자신의 명에 따르는 유리 조각은 없다.
기적이든, 이상현상Anomaly이든, 뭐든 일어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히카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미래는 없다.
지면이 울리더니 솟아올랐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둘 사이에 끼어드려는 듯이.
지금이다.
바로 지금! 자신을 구원할 유리 조각이 나타날 것이다!
히카리는 온 힘을 다해 세계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어떤 운명의 장난이, 어떤 인과율의 결과가,
히카리에게 승리할 힘을 쥐어줄 ‘신’을 만들어내리라!
빌어라. 기도해라.
너를 구원했던 그 조각을, 또다시 그 피 흐르는 가슴 가까이에 간직하라.
구원의 표상인 그 조각을. 그리하면 분명히...!
또 다른 유리 조각이 소녀의 몸을 찔렀다. 마치 심장을 관통하는 말뚝과도 같았다.
조각은 심장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메세지는, 그 최후의 메세지는, 히카리의 마음을, 의지를 꿰뚫었다.
흑색의 소녀로부터 온 마지막 메세지였다. 아주 단순하고, 무자비한 메세지.
“그런 일은 없어.”
히카리의 가슴에 박혀 거의 목숨을 빼앗아갈 뻔한 그 조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화재의 기억을 비추고 있었다.
죽음에 이렇게나 가까운 순간에도, 히카리의 심장은 뛰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이.
히카리의 동공이 수축했다.
화재의 기억처럼, 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
고통. 격렬한 고통. 그리고 피...
히카리가 가슴팍의 상처를 움켜잡으려 손을 펴자 그녀를 구원했던 조각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폭풍우로부터 조각이 하나 빠져나와 손등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마저 쉴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 눈은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해서는 안 될, 하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끔찍한 현실이.
히카리는, 이윽고, 자아마저 잃기 시작했다.
=====# VS-8[1] #=====
자신에게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깨달은 히카리의 안에서 오래전에 잊혀진 본능이 꿈틀거렸다.
현실적으로 유용하지만 버려졌던 그 본능. 아직 움찔대고 있을 뿐,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포가 히카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카리는 여린 손으로 그 희망에 매달렸다.
어느샌가 히카리는 열 개의 조각을 불러내,
자신을 하늘에 붙잡고 있던 조각들을 깨부수었다.
일그러진 땅 위로, 히카리가 볼품없이 낙하했다.
10개의 조각이 괴로워하는 소녀의 웅크린 몸 주변을 맴돌았다.
기이하게도, 히카리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주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 번도 가하지 못했다.
히카리의 가슴에 박힌 조각조차,
비록 심장에 가까이 다가가 불타는 듯한 격통을 그녀에게 안겨주었으나,
결국 목숨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히카리는 아직 살아있다.
히카리의 공격이 허약하게 날아가다 타이리츠의 반격에 치여 사라졌다.
타이리츠의 모습은 이제, 히카리가 옛 기억에서 들었던 그 어떤 악마보다 더욱 사악해 보였다.
밤과 낮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둠의 여왕.
황홀한 듯한, 하지만 텅 비어있는 저 미소..
그 모습을 보며, 히카리는 자신의 감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빈자리를, 냉혹한 현실이 주입한 이성이 채웠다.
몇 분, 아니 몇 초 전까지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히카리는,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하키라는 타이리츠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넘기며, 천천히... 타이리츠를 향해 다가갔다.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그녀는 조각 몇 개를 곁에 남겨 자신의 약점을 지켰다.
그리고 전장을 살폈다.
지면이 완전히 갈라져, 그 어느때보다 황폐해보였다.
마치 포화를 받은 마을처럼 찢어져 망가져버린 광경.
두 소녀 주변의 유리 조각은 셀 수없이 많았고, 타이리츠의 힘은 가늠할 수 없이 강했다.
반면, 히카리는 약했다.
유리를 다루는 힘은 물론이고, 몸이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조각과 같은, 변칙적인 현상을 찾아내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찾아내지 못했으니 이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면?
완전히 막혀버린 길을 어떻게 나아갈까?
애초에, 나아가긴 해야 할까?
빛으로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 그녀의 어깨에 직격했다.
히카리는 그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젠 타이리츠도 빛을 다룰 수 있는 건가.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재고해 보았다.
여기서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그 둘이다. 이를 깨닫고, 히카리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걸.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끝나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생각, 희망, 감정이 모두 소녀에게서 사라진 후에,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은, 의지였다.
이건,
이건...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다.
아니...
히카리는 손등에 박혀있던 조각을 빼냈다.
새하얀 불길이 일어 상처를 지졌다. 그 빛에 눈이 잠깐 멀었다.
하지만 그 조각을 목에 가져다 대지는 않았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 없었다.
살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적었기에, 죽어도 상관없었다.
칼날의 폭풍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섰다. 조각 하나도 대동하지 않은 채.
이젠 타이리츠의 표정이 어떤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녀의 영역은 완전한 혼돈이었다. 물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유리 조각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가다, 히카리는 무언가를 눈치챘다.
소용돌이의 일부분이 다른 조각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타이리츠가 일부러 저렇게 움직이는 걸까?
마치 중간을 건너뛰는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조각들 덕에 이 유리의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히카리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진이라고? 아르케아에서?
또다시 지면이 찢어지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히카리는 얼굴과 가슴을 팔로 막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현상이었던 건지, 히카리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타이리츠가 한 짓이 아니라면, 공중에 떠있으니 눈치채지 못했겠지.
칼날의 폭풍에서 유리 조각이 몇개 떨어져나와 거칠고 딱딱한 움직임으로 공중에서 춤추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향해 유리 조각을 몇 개 더 던졌다.
그녀의 공격은 춤추는 유리 조각들을 쉽게 지나쳤지만, 곧 밝게 빛나더니 부서지고 말았다.
유리 조각은 멋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사라질 뿐.
그리고 아르케아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공간 그 자체에 금이 간 듯한 흔적이 남는다.
히카리가 그걸 보자,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자,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멤돌던 흑요석 조각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워...” 히카리가 키득대며 속삭였다.
자신의 무덤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니.
그 사실이 기묘해서... 웃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웃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슬프고 메마른 웃음을.
세상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 위의 소녀도...
하늘 위의...
하늘...?
하늘에 금이 갔다.[2]
하늘을 조각하듯, 금은 점점 넓어지더니, 거대한 조각이 땅으로 떨어졌다.[3]
더욱 기묘한 것은, 그 조각에는 수없이 많은 형상이 재빠르게 바뀌며 비춰지고 있던 것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기이한 폐허로 변해갔다.
히카리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만족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잠해진 폭풍 뒤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이, 만들어진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이 무너지다가, 멈췄다가, 다시 무너졌다.
마치 변덕쟁이 신이 하늘로 퍼즐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카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눈동자에 차가움이 깃들고, 호흡이 느려졌다.
종말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느껴졌던 조금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객관적 사고가 채웠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대재앙의 앞에서, 소녀가 내뱉을 말은 단 한가지였다.
텅 비어버린 단어로, 그녀는 말했다. “아름다워라.”
마치 그 단어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종말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세계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현실적으로 유용하지만 버려졌던 그 본능. 아직 움찔대고 있을 뿐,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포가 히카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카리는 여린 손으로 그 희망에 매달렸다.
어느샌가 히카리는 열 개의 조각을 불러내,
자신을 하늘에 붙잡고 있던 조각들을 깨부수었다.
일그러진 땅 위로, 히카리가 볼품없이 낙하했다.
10개의 조각이 괴로워하는 소녀의 웅크린 몸 주변을 맴돌았다.
기이하게도, 히카리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주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 번도 가하지 못했다.
히카리의 가슴에 박힌 조각조차,
비록 심장에 가까이 다가가 불타는 듯한 격통을 그녀에게 안겨주었으나,
결국 목숨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히카리는 아직 살아있다.
히카리의 공격이 허약하게 날아가다 타이리츠의 반격에 치여 사라졌다.
타이리츠의 모습은 이제, 히카리가 옛 기억에서 들었던 그 어떤 악마보다 더욱 사악해 보였다.
밤과 낮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둠의 여왕.
황홀한 듯한, 하지만 텅 비어있는 저 미소..
그 모습을 보며, 히카리는 자신의 감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빈자리를, 냉혹한 현실이 주입한 이성이 채웠다.
몇 분, 아니 몇 초 전까지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히카리는,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하키라는 타이리츠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넘기며, 천천히... 타이리츠를 향해 다가갔다.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그녀는 조각 몇 개를 곁에 남겨 자신의 약점을 지켰다.
그리고 전장을 살폈다.
지면이 완전히 갈라져, 그 어느때보다 황폐해보였다.
마치 포화를 받은 마을처럼 찢어져 망가져버린 광경.
두 소녀 주변의 유리 조각은 셀 수없이 많았고, 타이리츠의 힘은 가늠할 수 없이 강했다.
반면, 히카리는 약했다.
유리를 다루는 힘은 물론이고, 몸이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조각과 같은, 변칙적인 현상을 찾아내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찾아내지 못했으니 이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면?
완전히 막혀버린 길을 어떻게 나아갈까?
애초에, 나아가긴 해야 할까?
빛으로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 그녀의 어깨에 직격했다.
히카리는 그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젠 타이리츠도 빛을 다룰 수 있는 건가.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재고해 보았다.
여기서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그 둘이다. 이를 깨닫고, 히카리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걸.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끝나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생각, 희망, 감정이 모두 소녀에게서 사라진 후에,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은, 의지였다.
이건,
이건...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다.
아니...
히카리는 손등에 박혀있던 조각을 빼냈다.
새하얀 불길이 일어 상처를 지졌다. 그 빛에 눈이 잠깐 멀었다.
하지만 그 조각을 목에 가져다 대지는 않았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 없었다.
살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적었기에, 죽어도 상관없었다.
칼날의 폭풍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섰다. 조각 하나도 대동하지 않은 채.
이젠 타이리츠의 표정이 어떤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녀의 영역은 완전한 혼돈이었다. 물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유리 조각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가다, 히카리는 무언가를 눈치챘다.
소용돌이의 일부분이 다른 조각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타이리츠가 일부러 저렇게 움직이는 걸까?
마치 중간을 건너뛰는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조각들 덕에 이 유리의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히카리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진이라고? 아르케아에서?
또다시 지면이 찢어지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히카리는 얼굴과 가슴을 팔로 막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현상이었던 건지, 히카리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타이리츠가 한 짓이 아니라면, 공중에 떠있으니 눈치채지 못했겠지.
칼날의 폭풍에서 유리 조각이 몇개 떨어져나와 거칠고 딱딱한 움직임으로 공중에서 춤추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향해 유리 조각을 몇 개 더 던졌다.
그녀의 공격은 춤추는 유리 조각들을 쉽게 지나쳤지만, 곧 밝게 빛나더니 부서지고 말았다.
유리 조각은 멋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사라질 뿐.
그리고 아르케아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공간 그 자체에 금이 간 듯한 흔적이 남는다.
히카리가 그걸 보자,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자,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멤돌던 흑요석 조각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워...” 히카리가 키득대며 속삭였다.
자신의 무덤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니.
그 사실이 기묘해서... 웃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웃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슬프고 메마른 웃음을.
세상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 위의 소녀도...
하늘 위의...
하늘...?
하늘에 금이 갔다.[2]
하늘을 조각하듯, 금은 점점 넓어지더니, 거대한 조각이 땅으로 떨어졌다.[3]
더욱 기묘한 것은, 그 조각에는 수없이 많은 형상이 재빠르게 바뀌며 비춰지고 있던 것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기이한 폐허로 변해갔다.
히카리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만족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잠해진 폭풍 뒤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이, 만들어진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이 무너지다가, 멈췄다가, 다시 무너졌다.
마치 변덕쟁이 신이 하늘로 퍼즐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카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눈동자에 차가움이 깃들고, 호흡이 느려졌다.
종말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느껴졌던 조금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객관적 사고가 채웠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대재앙의 앞에서, 소녀가 내뱉을 말은 단 한가지였다.
텅 비어버린 단어로, 그녀는 말했다. “아름다워라.”
마치 그 단어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종말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세계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3. Side Story
3.1. 앨리스 & 테니얼
3.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7-1 | Ephemeral-1 | Alice à la mode 클리어 | ||
7-2 | Ephemeral-2 | 앨리스 & 테니얼로 Eccentric Tale 클리어 | ||
7-3 | Ephemeral-3 | 앨리스 & 테니얼로 Alice à la mode 클리어 | ||
7-4 | Ephemeral-4 | 앨리스 & 테니얼로 Alice's Suitcase 클리어 | ||
7-5 | Ephemeral-5 | 앨리스 & 테니얼로 Jump 클리어 | ||
7-6 | Ephemeral-6 | 앨리스 & 테니얼로 Felis 클리어 |
3.1.2. Ephemeral Page
=====# 7-1 #=====숲과 꽃밭 사이에 숨어있는 어두운 정원.
유리 조각의 모퉁이에서 은색 거미줄이 반짝였다. 유리보다는 돌에 가깝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기묘한 세계. 유리 조각이 떠다니며 다른 현실을, 형형색색의 기억을 폐허와 백색의 세계에 흘려 넣는 곳. 자수정 기둥이 바닥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소녀는 조그마한 옅은 녹색 테이블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옅은 녹색 의자에 앉아, 옆에 세워둔 여행 가방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가죽 가방을 괜히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제 가야 합니다, 앨리스.”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남자가 있었다. 항상 그랬듯, 앨리스가 안 보는 사이에 준비한 찻잔을 든 남자가.
앨리스는 손을 가방 위에 다시 올렸다.
“뭐 소리 들려?”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라 대답했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고서 다른 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래, 이 기억도, 다른 기억들도… 전부 너무 조용해.”
“그러면 안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소리를 들은게 언젠진 기억해?!”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조금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래, 테니얼, 조용하고 평온한 정원 좋지… 이 풍경이 참 아름답긴 해.”
그녀는 가방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자신들의 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어두운 숲과,
그림자 아래에 성기게 피어있는 하늘색 꽃을 가리켰다.
“그렇죠, 아름답습니다.” 테니얼이 찻잔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저처럼.”
그 뻔뻔함에 앨리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 좀… 닥쳐, 제발.” 앨리스가 질렸다는 듯 테니얼 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무례하군요. 아주 무례해요.”
앨리스는 머리를 한 번 털고는 투덜거리며 다시 의자로 몸을 묻었다.
이 세계에 갇혀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게 된지 얼마나 되었나?
거의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테니얼은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면서 앨리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앨리스에게 있어선 고통이었다. 그녀는 다시 테니얼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과 검은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그의 눈 앞을 지나갔다.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테니얼은 들고있던 찻잔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그대로 땅에 쏟아부었다. 기묘한 행동이지만, 테니얼이 매번 하는 짓이었다. 그가 입을 벌렸다. 찻잔에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말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가야 한다고...” 테니얼이 말하기도 전에 앨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
“알고 계시면, 어서 갑시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테니얼의 말이 항상 헛소리는 아니었기에, 앨리스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일어서 새하얀 지평선을 향해 테니얼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지나치는 기억이 사라져갔다. 녹아 흘러내려, 소멸했다. 단 하나, 앨리스를 따라오는 나비를 제외하고서. 테니얼은 그 나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나비도 사라지리라.
모든 기억이 그렇듯이.
유리 조각의 모퉁이에서 은색 거미줄이 반짝였다. 유리보다는 돌에 가깝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기묘한 세계. 유리 조각이 떠다니며 다른 현실을, 형형색색의 기억을 폐허와 백색의 세계에 흘려 넣는 곳. 자수정 기둥이 바닥의 빛을 반사하며 반짝인다.
소녀는 조그마한 옅은 녹색 테이블 앞에 놓인 고급스러운 옅은 녹색 의자에 앉아, 옆에 세워둔 여행 가방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가죽 가방을 괜히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제 가야 합니다, 앨리스.”
다른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남자가 있었다. 항상 그랬듯, 앨리스가 안 보는 사이에 준비한 찻잔을 든 남자가.
앨리스는 손을 가방 위에 다시 올렸다.
“뭐 소리 들려?”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귀에 신경을 집중하고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라 대답했다.
소녀는 허리를 숙이고서 다른 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래, 이 기억도, 다른 기억들도… 전부 너무 조용해.”
“그러면 안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소리를 들은게 언젠진 기억해?!”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조금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래, 테니얼, 조용하고 평온한 정원 좋지… 이 풍경이 참 아름답긴 해.”
그녀는 가방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어 자신들의 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어두운 숲과,
그림자 아래에 성기게 피어있는 하늘색 꽃을 가리켰다.
“그렇죠, 아름답습니다.” 테니얼이 찻잔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저처럼.”
그 뻔뻔함에 앨리스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아, 좀… 닥쳐, 제발.” 앨리스가 질렸다는 듯 테니얼 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무례하군요. 아주 무례해요.”
앨리스는 머리를 한 번 털고는 투덜거리며 다시 의자로 몸을 묻었다.
이 세계에 갇혀 다른 세계로 가지 못하게 된지 얼마나 되었나?
거의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테니얼은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면서 앨리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앨리스에게 있어선 고통이었다. 그녀는 다시 테니얼을 바라보았다. 오렌지색과 검은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가 그의 눈 앞을 지나갔다. 나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테니얼은 들고있던 찻잔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차를 그대로 땅에 쏟아부었다. 기묘한 행동이지만, 테니얼이 매번 하는 짓이었다. 그가 입을 벌렸다. 찻잔에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말하기 위함이었다.
“정말 가야 한다고...” 테니얼이 말하기도 전에 앨리스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
“알고 계시면, 어서 갑시다.” 그가 말했다.
그래도 테니얼의 말이 항상 헛소리는 아니었기에, 앨리스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일어서 새하얀 지평선을 향해 테니얼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지나치는 기억이 사라져갔다. 녹아 흘러내려, 소멸했다. 단 하나, 앨리스를 따라오는 나비를 제외하고서. 테니얼은 그 나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저 나비도 사라지리라.
모든 기억이 그렇듯이.
=====# 7-2 #=====
그래서, 여긴 어디고, 무엇이 “현실”인가?
앨리스에겐 세계 사이를 오가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 능력은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는 것 만큼이나 평범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음식도 물도 필요없어졌지만. 아르케아에 오기 전까지 소녀는 수도 없이 새로운 세계를 찾았고, 기괴한 식물을 발견했으며,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동화 속의 괴물이나 마법,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소녀는 보고 기록해왔다.
“다차원 백과사전”... 그녀는 그 기록물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잃어버렸다).
매일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엔 특별한 성질이 있었다.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소녀는 그 기억들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맛, 감촉까지 마치 현실로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아르케아만큼이나 이상한 세계에 있을 때엔, 그 질문이 아주 중요했다.
잠깐 뿐일지라도, 기억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환각인가 현실인가?
온갖 세계를 여행한 앨리스조차도, 아르케아와 같은 세계는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인가?
“현실이라는 게 뭘까, 테니얼?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앨리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물었다.
“이 곳은 현실입니다.”
테니얼이 찻잔에서 차를 부어내며 말했다.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고민을 하시나요?
두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며 알 수 있는 것을, 왜 궁금해하십니까?”
“됐어.”
앨리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이런 테니얼은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저걸 보아주십시오.”
그가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캠프파이어의 기억으로 걸어들어온 모양이다. 테니얼이 부은 차 때문에 불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걸까요?”
“나한테 묻는거야?”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저 캠프의 분위기를 망쳐버렸습니다.”
“이 기억도 곧 사라질건데, 뭘 그렇게 풀 죽어있어?”
“앨리스, 저희들이 보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물건이 사라지나요? 아니지요. 저 불은 제 손으로 사라지게 했지만요.”
“그러면 아무데나 차를 쏟지 말든가.”
“사죄의 쪽지를 두어야겠군요.”
“아무도 안 볼텐데?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테니얼은 히죽대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앨리스도 투덜대면서도 웃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순간이 바로 앨리스가 테니얼의 동행을 그닥 싫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최근엔 그 빈도가 줄었지만… 최근엔...
처음엔… 달랐었나?
소녀는 잠시 그 생각에 잠겨있다가, 새롭게 등장한 풍경에 기가 쏠려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러갔다.
앨리스에겐 세계 사이를 오가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 능력은 식사를 하거나 물을 마시는 것 만큼이나 평범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 도착한 이후부터는 음식도 물도 필요없어졌지만. 아르케아에 오기 전까지 소녀는 수도 없이 새로운 세계를 찾았고, 기괴한 식물을 발견했으며,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
동화 속의 괴물이나 마법, 상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소녀는 보고 기록해왔다.
“다차원 백과사전”... 그녀는 그 기록물을 그렇게 불렀다 (지금은 잃어버렸다).
매일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엔 특별한 성질이 있었다. 다른 세계의 기억들이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다. 소녀는 그 기억들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소리, 냄새, 맛, 감촉까지 마치 현실로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현실”인가? 아르케아만큼이나 이상한 세계에 있을 때엔, 그 질문이 아주 중요했다.
잠깐 뿐일지라도, 기억을 완전하게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환각인가 현실인가?
온갖 세계를 여행한 앨리스조차도, 아르케아와 같은 세계는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인가?
“현실이라는 게 뭘까, 테니얼?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앨리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물었다.
“이 곳은 현실입니다.”
테니얼이 찻잔에서 차를 부어내며 말했다.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고민을 하시나요?
두 손으로 직접 만지고 느끼며 알 수 있는 것을, 왜 궁금해하십니까?”
“됐어.”
앨리스가 단호하게 답했다. 이런 테니얼은 도움이 안된다.
“그렇다면, 저걸 보아주십시오.”
그가 땅을 가리키며 말했다. 캠프파이어의 기억으로 걸어들어온 모양이다. 테니얼이 부은 차 때문에 불은 사그라들어 있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걸까요?”
“나한테 묻는거야?” 앨리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제가 저 캠프의 분위기를 망쳐버렸습니다.”
“이 기억도 곧 사라질건데, 뭘 그렇게 풀 죽어있어?”
“앨리스, 저희들이 보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물건이 사라지나요? 아니지요. 저 불은 제 손으로 사라지게 했지만요.”
“그러면 아무데나 차를 쏟지 말든가.”
“사죄의 쪽지를 두어야겠군요.”
“아무도 안 볼텐데? 여기엔 아무도 없다고!”
테니얼은 히죽대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앨리스도 투덜대면서도 웃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순간이 바로 앨리스가 테니얼의 동행을 그닥 싫어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최근엔 그 빈도가 줄었지만… 최근엔...
처음엔… 달랐었나?
소녀는 잠시 그 생각에 잠겨있다가, 새롭게 등장한 풍경에 기가 쏠려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가 또 흘러갔다.
=====# 7-3 #=====
테니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 숨 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듯이, 테니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확신했다.
하지만 그에겐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아니면,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방법을 알듯, 하지만 그는 먹고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면, 앨리스의 옆에서 그녀를 지키는 방법을 알듯…
흔들 수 없는, 생생한 편안함이, 현실에는 있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안다는 것은 그 명제가 진실이라는 뜻이다.
진실을 알면 마음이 편해진다. 진실이 없다면 미지가 그 자리를 채우고, 곧 공포가 엄습한다. 최악의 경우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 덮쳐온다.
상처를 입히는 진실.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아는 것. 피할 수 없는 끝이 있음을 아는 것.
그러한 진실을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다.
하지만, 테니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지켜보아 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자유로이 두어, 가장 신나고, 새롭고… 다른 곳들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조차도.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이 그에겐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앨리스가 그보다 더 많은 걸 원한다는 것을. 지금 보이는 풍경 너머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그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걸 숨기고 있었습니까?” 정원의 기억에서 꺾어온 꽃을 내미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색이 마음에 들거든. 창백해서…”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다른 세계에서 본 하늘같아. 무슨 꽃인지 알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릅니다. 다른 것들과 같이 그 꽃도 사라질 겁니다. 갖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앨리스.”
“...그럴지도, 그래도 마음에 드는걸. 왠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할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또다시 차를 쏟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앨리스가 옳다. 저 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앨리스…”
“그럴 거야!” 앨리스가 활기차게 대답하고선 그 꽃을 귀에 꽂았다.
“네가 안 시켜도 내 맘대로 할 수 있거든!” 괜히 젠체하며 그녀가 말했다.
테니얼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치고서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행하게도…
앨리스의 그 말 또한, 옳았다.
보통 사람이 숨 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듯이, 테니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확신했다.
하지만 그에겐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아니면,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는 방법을 알듯, 하지만 그는 먹고 마시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니면, 앨리스의 옆에서 그녀를 지키는 방법을 알듯…
흔들 수 없는, 생생한 편안함이, 현실에는 있었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안다는 것은 그 명제가 진실이라는 뜻이다.
진실을 알면 마음이 편해진다. 진실이 없다면 미지가 그 자리를 채우고, 곧 공포가 엄습한다. 최악의 경우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 덮쳐온다.
상처를 입히는 진실. 되고 싶은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아는 것. 피할 수 없는 끝이 있음을 아는 것.
그러한 진실을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게 한다.
하지만, 테니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지켜보아 왔다.
“그”는 항상 앨리스를 자유로이 두어, 가장 신나고, 새롭고… 다른 곳들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것은 진실이었다. 지금조차도.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이 그에겐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앨리스가 그보다 더 많은 걸 원한다는 것을. 지금 보이는 풍경 너머에 있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그것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걸 숨기고 있었습니까?” 정원의 기억에서 꺾어온 꽃을 내미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색이 마음에 들거든. 창백해서…”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다른 세계에서 본 하늘같아. 무슨 꽃인지 알아?”
그는 알고 있었다.
“모릅니다. 다른 것들과 같이 그 꽃도 사라질 겁니다. 갖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앨리스.”
“...그럴지도, 그래도 마음에 드는걸. 왠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앨리스가 말했다.
그렇게 말할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또다시 차를 쏟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앨리스가 옳다. 저 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문제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앨리스…”
“그럴 거야!” 앨리스가 활기차게 대답하고선 그 꽃을 귀에 꽂았다.
“네가 안 시켜도 내 맘대로 할 수 있거든!” 괜히 젠체하며 그녀가 말했다.
테니얼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치고서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불행하게도…
앨리스의 그 말 또한, 옳았다.
=====# 7-4 #=====
앨리스는 언제나 세계가 일렁이며 뒤섞이는 모습에 감탄했다. 그러나 테니얼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테니얼, 넌 감성이라는 게 없니?”
공중을 나는 기계들이 일으킨 대화재의 기억에서 빠져나오며, 앨리스는 테니얼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도.” 테니얼이 비웃듯 대답했다.
이에 앨리스는 그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저 꾹 닫은 마음속에 뭔가 숨어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선, 테니얼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마다 앨리스는 그가 눈을 반짝이거나 숨을 삼키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어느 날 (비록 이 세계엔 밤이 오지 않아 “하루”의 구분이 없지만), 두 사람은 오래된 공방의 기억을 발견했다.
앨리스는 그곳에서 장난기가 들었다. 웬일로 테니얼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조심스레 문 뒤에 숨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테니얼은 주변을 둘러보다
“앨리스…? 음… 어차피 주변에 있겠지.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라며 중얼거렸다.
앨리스는 그대로 숨어 테니얼을 관찰했다. 그는 먼지 쌓인 탁자와 의자 옆을 걸어가, 캔버스가 놓인 이젤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선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탄 연필 하나를 찾아,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선 스케치를 시작했다.
테니얼을 “골려먹는다”는 장난스러운 즐거움은 이미 앨리스에게서 사라져, 그녀는 어느새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앨리스가 처음 이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테니얼은 곧잘 앨리스와 모자를 바꾸는 장난을 치곤 했다. 그렇게 앨리스를 놀리면서도, 그녀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언제나 물어보곤 했다. 시나 산문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감옥 같은 세계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울 때 그는 언제나 앨리스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더 아이같고, 더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앨리스가 한때 알았던 테니얼은 가면을 쓰고 말았다. 그 가면이 새로운 얼굴이 되어, 앨리스는 그의 옛 모습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래, 테니얼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기억에서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지금, 그는 주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실제 풍경과 달리 의자가 있는 자리에 찻잔을 그려 넣긴 했지만.
“잘 그린다.” 앨리스가 문 뒤에서 말했다.
스케치를 그리던 테니얼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목탄 연필을 내려놓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모작일 뿐입니다.”
이라 말했다.
“그래도 저거, 찻잔은 상상한 거잖아.” 앨리스가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죠, 제 상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앨리스.”
그가 또다시 미소지었다.
“오빠, 괜찮아. 그 솜씨를 내 완벽한 두뇌에 비교하는 건…”
갑자기 앨리스는 말을 멈추고서, 테니얼의 눈을 바라보았다. 앨리스가 지금 한 말이 무엇인지,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테니얼, 넌 감성이라는 게 없니?”
공중을 나는 기계들이 일으킨 대화재의 기억에서 빠져나오며, 앨리스는 테니얼에게 물었다.
“네, 다행히도.” 테니얼이 비웃듯 대답했다.
이에 앨리스는 그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분명 저 꾹 닫은 마음속에 뭔가 숨어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선, 테니얼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마다 앨리스는 그가 눈을 반짝이거나 숨을 삼키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어느 날 (비록 이 세계엔 밤이 오지 않아 “하루”의 구분이 없지만), 두 사람은 오래된 공방의 기억을 발견했다.
앨리스는 그곳에서 장난기가 들었다. 웬일로 테니얼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는 사이에, 조심스레 문 뒤에 숨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테니얼은 주변을 둘러보다
“앨리스…? 음… 어차피 주변에 있겠지.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라며 중얼거렸다.
앨리스는 그대로 숨어 테니얼을 관찰했다. 그는 먼지 쌓인 탁자와 의자 옆을 걸어가, 캔버스가 놓인 이젤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선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탄 연필 하나를 찾아, 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선 스케치를 시작했다.
테니얼을 “골려먹는다”는 장난스러운 즐거움은 이미 앨리스에게서 사라져, 그녀는 어느새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앨리스가 처음 이 세계에서 깨어났을 때…
테니얼은 곧잘 앨리스와 모자를 바꾸는 장난을 치곤 했다. 그렇게 앨리스를 놀리면서도, 그녀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언제나 물어보곤 했다. 시나 산문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감옥 같은 세계에서 깨어나 혼란스러울 때 그는 언제나 앨리스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더 아이같고, 더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앨리스가 한때 알았던 테니얼은 가면을 쓰고 말았다. 그 가면이 새로운 얼굴이 되어, 앨리스는 그의 옛 모습을 잊어버릴 뻔했다.
그래, 테니얼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기억에서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지금, 그는 주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실제 풍경과 달리 의자가 있는 자리에 찻잔을 그려 넣긴 했지만.
“잘 그린다.” 앨리스가 문 뒤에서 말했다.
스케치를 그리던 테니얼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목탄 연필을 내려놓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모작일 뿐입니다.”
이라 말했다.
“그래도 저거, 찻잔은 상상한 거잖아.” 앨리스가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죠, 제 상상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 상상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앨리스.”
그가 또다시 미소지었다.
“오빠, 괜찮아. 그 솜씨를 내 완벽한 두뇌에 비교하는 건…”
갑자기 앨리스는 말을 멈추고서, 테니얼의 눈을 바라보았다. 앨리스가 지금 한 말이 무엇인지,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 7-5 #=====
“완벽한 두뇌에 비교하는건… 무엇이죠?”
“...테니얼…”
“제 이름은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비유하려고 했던 거죠?” 테니얼이 놀리듯 말했다.
“테니얼!” 앨리스가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제 이름…”
“‘오빠’라고?!”
“테니얼, 입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 앨리스가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 남매야?!”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
테니얼이 의자 위에서 빙글 돌았다. 짜증날 정도로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더니, 또다시 생각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 말도 안할거야?” 앨리스가 물었다. “그랬어… 역시 그랬어… 네가 이렇게 된건 최근인걸.”
“잘생겨진거요? 전 항상…”
“테니얼, 나 지금 진지해.” 그녀가 차갑게 테니얼의 농담을 끊었다.
“저도 진지하게, 지금 이 대화를 끝내고 싶군요.”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화를 머금은 어투로 그를 쏘아붙였다.
“내가 널 ‘오빠’라고 불렀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체 뭐 때문일까? 너 알고 있잖아, 테니얼.
나한텐 다 보여. 어서, 뭐라도 말해보라고!”
“싫습니다.” 거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테니얼이 대답했다.
“테니얼!”
“그만하세요!”
“나도 다 큰 어른이야. 불편한 진실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 부모도 아닌 주제에!”
“부모나 다름없었을지 누가 압니까!”
표정을 찡그린 앨리스는 한 발을 내디딘 채로 멈추어 섰다. 그 눈은 의자에서 일어선 테니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한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한 듯.
“...뭐?”
“아… 이런… 말해버렸군요.”
테니얼이 속삭였다. 그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테니얼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모자의 챙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닙니다, 앨리스… 저는, 당신의 오빠가 아닙니다. 다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 말해.”
테니얼은 조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였다.
“기억이야?”
“당신의 기억입니다.”
앨리스는 말없이 테니얼의 손 위에 놓인 아르케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도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다만 기억이 이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건 당신 때문입니다.
비록 제 기억이 완벽하지 못하고는 하나… 잠자는 당신 주변을 맴돌던 유리 조각들은 아직 기억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그”의 기억이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가 된 듯한… 당시 제 정신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테니얼은 말을 잇기 전에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을 보고 나서는… 전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말해. 테니얼.”
반짝이는 구슬이 테니얼의 뺨을 타고 흘러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니얼은 유리 조각을 쥔 손을 앨리스에게 뻗었다.
그녀는 조각을 받아서 들었다.
그 조각 안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텐과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앨리스의 모자 위로 테니얼이 손을 얹었다. 소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을 바라보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앨리스…”
대답하기 전 앨리스는 조각을 꽉 쥐었다.
“응.”
“저는 모조품입니다. 그래도…”
테니얼은 말을 흐렸다.
“그래도…”
“응.”
“부디, 조심하세요. 앨리스.”
“말이 안 이어지는데… 네가 모조품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테니얼은 질문을 무시하듯 가볍게 숨소리를 내고선 앨리스의 모자를 벗긴 후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등을 돌렸다.
“저는 모조품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듣고, 부디 조심하세요. 제가 할 말은 이게 다입니다.”
거짓말이다.
앨리스는 굳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서, 작동시켰다.
색채가 주변을 휘감는 와중, 테니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모조품은 소원을 이룰 수 없는 법이죠.”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앨리스는 전에 와본 적 있는 장소에 서 있었다.
“...테니얼…”
“제 이름은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에 비유하려고 했던 거죠?” 테니얼이 놀리듯 말했다.
“테니얼!” 앨리스가 소리치며 발을 굴렀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지?”
“제 이름…”
“‘오빠’라고?!”
“테니얼, 입니다.” 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니!” 앨리스가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었다. “우리… 남매야?!”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
테니얼이 의자 위에서 빙글 돌았다. 짜증날 정도로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더니, 또다시 생각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 말도 안할거야?” 앨리스가 물었다. “그랬어… 역시 그랬어… 네가 이렇게 된건 최근인걸.”
“잘생겨진거요? 전 항상…”
“테니얼, 나 지금 진지해.” 그녀가 차갑게 테니얼의 농담을 끊었다.
“저도 진지하게, 지금 이 대화를 끝내고 싶군요.”
“왜?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화를 머금은 어투로 그를 쏘아붙였다.
“내가 널 ‘오빠’라고 불렀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체 뭐 때문일까? 너 알고 있잖아, 테니얼.
나한텐 다 보여. 어서, 뭐라도 말해보라고!”
“싫습니다.” 거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테니얼이 대답했다.
“테니얼!”
“그만하세요!”
“나도 다 큰 어른이야. 불편한 진실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내 부모도 아닌 주제에!”
“부모나 다름없었을지 누가 압니까!”
표정을 찡그린 앨리스는 한 발을 내디딘 채로 멈추어 섰다. 그 눈은 의자에서 일어선 테니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한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라도 한 듯.
“...뭐?”
“아… 이런… 말해버렸군요.”
테니얼이 속삭였다. 그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테니얼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모자의 챙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닙니다, 앨리스… 저는, 당신의 오빠가 아닙니다. 다만 그를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계속 말해.”
테니얼은 조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였다.
“기억이야?”
“당신의 기억입니다.”
앨리스는 말없이 테니얼의 손 위에 놓인 아르케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도 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다만 기억이 이 세계로 흘러들어오는 건 당신 때문입니다.
비록 제 기억이 완벽하지 못하고는 하나… 잠자는 당신 주변을 맴돌던 유리 조각들은 아직 기억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그”의 기억이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가 된 듯한… 당시 제 정신은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테니얼은 말을 잇기 전에 미소를 지었다.
“그 기억을 보고 나서는… 전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있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말해. 테니얼.”
반짝이는 구슬이 테니얼의 뺨을 타고 흘러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니얼은 유리 조각을 쥔 손을 앨리스에게 뻗었다.
그녀는 조각을 받아서 들었다.
그 조각 안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텐과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앨리스의 모자 위로 테니얼이 손을 얹었다. 소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을 바라보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앨리스…”
대답하기 전 앨리스는 조각을 꽉 쥐었다.
“응.”
“저는 모조품입니다. 그래도…”
테니얼은 말을 흐렸다.
“그래도…”
“응.”
“부디, 조심하세요. 앨리스.”
“말이 안 이어지는데… 네가 모조품인 거랑 무슨 상관이야?”
테니얼은 질문을 무시하듯 가볍게 숨소리를 내고선 앨리스의 모자를 벗긴 후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등을 돌렸다.
“저는 모조품입니다. 하지만 제 말을 듣고, 부디 조심하세요. 제가 할 말은 이게 다입니다.”
거짓말이다.
앨리스는 굳이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유리 조각을 바라보고서, 작동시켰다.
색채가 주변을 휘감는 와중, 테니얼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모조품은 소원을 이룰 수 없는 법이죠.”
그 말의 뜻을 묻기도 전에, 앨리스는 전에 와본 적 있는 장소에 서 있었다.
=====# 7-6 #=====
그 풍경은 평범하다 못해 칙칙하기까지 한 하얀 벽과 천장이 감싼 병실이었다. 창문 밖으로 주황색 나비가 나풀거리는, 조용한 병실. 그리고, 앨리스가 이 장소를 알아봄과 동시에,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밖에 공원이 하나 있었다.
간호사들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날씨는 언제나 맑고 완벽했다.
자신은 거의 평생을 이 곳에서 살았다.
갑작스러운 기억의 범람에 앨리스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뒤 쪽에서 나는 발소리에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지퍼가 열린 후드티를 입고 수국을 든 사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후드티 밑에는 티셔츠를 입고, 하의는 슬랙스, 신발은 단순한 디자인의 편한 운동화… 그리고, 얼굴. 앨리스는 저 얼굴을 알고 있었다. 테니얼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 하지만 그의 이름은…
“...세드릭.”
창문 옆의 침대에서, 나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년은 앨리스의 옆을 지나가며 예의 바르게 묵례를 한 뒤, 그 환자 옆으로 걸어갔다. 반짝이는 금발, 가느다란 체격.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앨리스는 알 수 있었다. 환자는 앨리스 자신이다. 이건 본인의 기억이었다.
저 환자의 이름은 앨리스다.
세드릭은 꽃을 화분에 꽂았다. 그 화분은 다양한 꽃들로 화려한 부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그는 찻잔을 들고 있지도, 차를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다.
“세드릭…”
소녀가 다시 그 이름을 부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화실에 있는 줄 알았어.”
“나 일하는 시간 자유로운 거 알잖아, 앨리스.”
테니…세드릭이 말했다. 목소리조차 비슷했다.
“좀 어때? 몸은 괜찮니?”
두 사람이 앨리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뱉었다. 생각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이 모르던 진실이 담긴 세계.
그리고 자신은 이 기억의 관찰자로서, 당시 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말을 반복하고 있는 듯했다.
“글은 쓰고 있니?” 세드릭이 물었다.
“오빠는 그림 그리고 있어?” 병든 소녀가 살짝 놀리듯 웃으며 되물었다.
“당연하지.” 청년이 천장을 바라보고 눈을 굴렸다.
“그러면서 여길 왔어?” 소녀가 웃었다. “난 오빠 엄청 바쁜 줄 알았는데!”
“세 페이지 그렸어.” 청년이 자랑스레 웃으며 답했다.
“잘됐네!”
“넌 한 페이지도 못 썼어?
“썼어! 엄청 썼지!”
“그럼 한 번 읽어보자. 여기 다른 책도 가져왔으니까…”
“그래!”
소녀는 침대 옆의 선반으로 손을 뻗었다. 공책과 문방구, 그리고 타블렛을 두는 곳이었다.
청년은 가방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그래… 우린 세계 사이를 여행하던 게 아니야.
전부 지어낸 이야기였어… 지어낸… 몽상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4일이다.
4일 후에, 이 모든 것이 끝난다. 두 사람 모두, 비록 영원한 시간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1년 정도는 더 남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소녀는 청년을 보지 못했다. 아주 이른 아침에 소녀는 엄습하는 고통에 시달리다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어서 가족에게 전화하라며 소리를 지르는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게 다다.
테니얼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 기억은 길었다. 앨리스의 마지막 며칠을 모두 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강인한 마음을 지닌 앨리스라도, 마지막을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나 두려웠다. 기억을 바꿀 수는 없었다. 자신의 건강은 악화일로였고, 자신과 오빠에겐 서로밖에 없었으며, 오빠는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어 줄 수 없었다. 이야기와 몽상은… 아무리 강하게 염원해도 현실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아직 웃고 있을 때, 앨리스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저 순간이 둘이서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난 죽을 것이다. 난 이미 죽었다.
공방의 기억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앨리스는 그걸 떠올렸다.
“테니…”
앨리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공방의 기억도 사라져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테니얼이 말했듯, 그는 모조품이다.
진실이 밝혀지면 사라지는 모조품.
아르케아가 없는 공허에서, 앨리스는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을 바라보았다.
세상만물이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이 “차원”은 허구다. 이 “몸”은 껍데기다. 이 “기억”은 왜곡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네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삶은 굴곡 없이, 절정 없이, 곁에 있어줄 오빠 없이, 끝났다.
넌 혼자야, 앨리스.
넌 외롭게 죽었어.
앨리스는 무릎을 꿇었다. 장갑을 낀 손이 흙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추웠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감각이 있었다…
감정이 있었다.
‘이곳은 현실입니다. 당신의 모든 감각이 이곳이 현실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테니얼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이 보였다.
장갑을 벗었다. 감촉이 느껴졌다.
귀 뒤에 꽂아둔 꽃을 빼자 줄기가 피부에 쓸리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꽃의 향기를 맡았다.
입을 벌려 꽃잎의 향기를 만끽했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현실인가? 맛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인가? 만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인가?
그렇다면…
“앨리스”는 죽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살아있다.
테니얼이 기억일 뿐이라면, 그도 앨리스처럼 살아있어야만 한다.
현실에서, 그녀는 세계를 방랑하는 자였다.
실제로 이 세계에 오지 않았나. “진실”이 어떻건 간에.
그렇다면… 분명 여기서 나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찾아낼 것이다.
자신과 다른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돌아가는 길을.
설령 여정 도중에 그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언제나 그가 살아있음을 명심할 것이다.
어쩌면 차를 끓이고 버리는 기행을 따라 해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앨리스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앨리스는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두 발을 단단히 땅을 디디고 “진실”의 조각을 손에 쥔 채, 언제나 앞을 보고,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지평선을 향해 나아갈지라도…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게 무엇인지, 절대 잊지 않겠노라고.
3.2. 시라히메
3.2.1. 해금조건
{{{#fff 스토리 #}}} | 진행 순서 | ''' 해금 조건 ''' | ||
S-1 | Divided-1 | Blue Rose 클리어 | ||
S-2 | Divided-2 | 시라히메로 First Snow 클리어 | ||
S-3 | Divided-3 | 시라히메로 Blue Rose 클리어 | ||
S-4 | Divided-4 | 시라히메로 Blocked Library 클리어 | ||
S-5[4] | Divided-5 | 시라히메로 nέο κόsmo 클리어 | ||
S-6 | Divided-6 | 시라히메로 Lightning Screw 클리어 |
3.2.2. Divided Heart
=====# S-1 #=====본인조차 모르는 소녀의 이름은 “시라히메”였다.
시라히메는 깨어났을 때 지니고 있던 왕관과 홀이 어떤 물건인지 단박에 눈치채고, 자신이 분명 고귀한 핏줄의 출생이리라 생각했다.
“머리를 조아려라!”
“...뭐?”
“...이 녀석도 아닌가.”
자신이 공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시라히메가 팔짱을 끼고 눈을 홱 돌리고선 ‘옥좌’(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그런 시라히메를 “친구”가 당혹해하며 바라보았다.
시라히메 본인의 친구가 아니라, 유리 조각에 새겨진 기억의 주인 되는 사람의 친구였지만.
오늘은 네 개다.
시라히메가 출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뒤져본 유리 조각이 오늘은 네 개째다. 분명 어딘가에 그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왕관과 홀의 의미, 자신의 말투와 세계관... 시라히메는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 의혹을 제쳐두고서라도, 시라히메는 백색의 세계에 가득 찬 혼돈이 아닌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바랐다. 조각이 비치어주는 기억의 세계처럼.
“잘 들으라, 하무...”
“내 이름은 하루야.”
“하토.” 시라히메가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짐은 짐의 성이 있는 기억을 찾고 있노라. ‘성’이니라. 알겠느냐?”
“성? 뭐야, 지금 여왕님 놀이라도 해?”
시라히메는 손을 입술 위에 올리고 잠시 생각했다.
“여왕보다는 공주에 가깝지.” 그리고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어디 머리라도 부딪혔니, 안리?” 하루가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시라히메는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나타나는 성격이었다.
안리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안리가 아닌 것은 알았다.
곧 이 기억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재빨리 무너지는 편이 시간도 절약되니까.
하지만, 이번 기억에서도 아무 단서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거슬렸다.
“기억이 뭐 어쨌다고?” 하루가 말했다. 기억의 침입자인 시라히메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네 개.
여태까지 총 쉰세 개.
시라히메는 조금이라도 느낌이 오는 기억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가 보았다.
그녀는 하루의 멍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은 수없이 보아왔다.
4초가 지나자, 세상이 멈추었다.
금이 가는 소리가 나고, 곧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시라히메는 앉아있던 연석 앞에 높인 홀을 집어 들고 일어서서 잠시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걸어갔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하지만 시라히메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진실을 찾는 것은 자신이 아닐 것이란 걸...
시라히메는 깨어났을 때 지니고 있던 왕관과 홀이 어떤 물건인지 단박에 눈치채고, 자신이 분명 고귀한 핏줄의 출생이리라 생각했다.
“머리를 조아려라!”
“...뭐?”
“...이 녀석도 아닌가.”
자신이 공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시라히메가 팔짱을 끼고 눈을 홱 돌리고선 ‘옥좌’(식탁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그런 시라히메를 “친구”가 당혹해하며 바라보았다.
시라히메 본인의 친구가 아니라, 유리 조각에 새겨진 기억의 주인 되는 사람의 친구였지만.
오늘은 네 개다.
시라히메가 출생의 비밀을 찾기 위해 뒤져본 유리 조각이 오늘은 네 개째다. 분명 어딘가에 그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깨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왕관과 홀의 의미, 자신의 말투와 세계관... 시라히메는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 의혹을 제쳐두고서라도, 시라히메는 백색의 세계에 가득 찬 혼돈이 아닌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바랐다. 조각이 비치어주는 기억의 세계처럼.
“잘 들으라, 하무...”
“내 이름은 하루야.”
“하토.” 시라히메가 팔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짐은 짐의 성이 있는 기억을 찾고 있노라. ‘성’이니라. 알겠느냐?”
“성? 뭐야, 지금 여왕님 놀이라도 해?”
시라히메는 손을 입술 위에 올리고 잠시 생각했다.
“여왕보다는 공주에 가깝지.” 그리고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어디 머리라도 부딪혔니, 안리?” 하루가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시라히메는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기분이 그대로 나타나는 성격이었다.
안리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안리가 아닌 것은 알았다.
곧 이 기억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딱히 나쁜 일은 아니었다. 재빨리 무너지는 편이 시간도 절약되니까.
하지만, 이번 기억에서도 아무 단서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거슬렸다.
“기억이 뭐 어쨌다고?” 하루가 말했다. 기억의 침입자인 시라히메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네 개.
여태까지 총 쉰세 개.
시라히메는 조금이라도 느낌이 오는 기억이 있다면 반드시 들어가 보았다.
그녀는 하루의 멍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은 수없이 보아왔다.
4초가 지나자, 세상이 멈추었다.
금이 가는 소리가 나고, 곧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시라히메는 앉아있던 연석 앞에 높인 홀을 집어 들고 일어서서 잠시 휘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걸어갔다.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하지만 시라히메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진실을 찾는 것은 자신이 아닐 것이란 걸...
=====# S-2 #=====
어떤 가설이든, 일단 세워보면 맞을 가능성도 있다.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깨어난 수많은 소녀들이 결국 자신들의 과거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시라히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소녀들이 그랬듯, 그녀 또한 이 유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기뿐이라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뭔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시라히메는 자신이 처한 이 곤경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이 세계에 나 혼자뿐이라면, 나는 추방당한 왕족인 걸까?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훌륭한 지도자였겠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난 거야! (안 일어났다) 백성들이 여왕, 공주, 그리고 국가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내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거야! (스케일이 너무 크다) 마법으로!
왕관과 홀을 지닌 소녀는, 마법을 믿었다.
하지만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 백색의 세계가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인가?
소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기묘했지만, 이 세계 그 자체는 더욱 기묘한 것이었다. 그 어떤 기억에서도, 아르케아의 세계처럼 유리 조각이 날아다니는 세계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유리 조각에 비치는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이게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시라히메는, 자신이 마법의 세계에서 왔음을 확신했다.
‘마법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왕족’... 틀린 가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라히메가 현재 가장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특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멋진’ 장소에 ‘멋진’ 기억이 모여있는게 아닐까?” 무채색의 세계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탑을 찾아보자!”
그렇게 시라히메는 전진했다.
그렇다.
그녀는 돌머리였다.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깨어난 수많은 소녀들이 결국 자신들의 과거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시라히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소녀들이 그랬듯, 그녀 또한 이 유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은 자기뿐이라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뭔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졌다. 시라히메는 자신이 처한 이 곤경을 다시 되돌아보았다.
이 세계에 나 혼자뿐이라면, 나는 추방당한 왕족인 걸까?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훌륭한 지도자였겠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반란이 일어난 거야! (안 일어났다) 백성들이 여왕, 공주, 그리고 국가에 반기를 들고일어나 내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거야! (스케일이 너무 크다) 마법으로!
왕관과 홀을 지닌 소녀는, 마법을 믿었다.
하지만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이 백색의 세계가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인가?
소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기묘했지만, 이 세계 그 자체는 더욱 기묘한 것이었다. 그 어떤 기억에서도, 아르케아의 세계처럼 유리 조각이 날아다니는 세계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유리 조각에 비치는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이게 마법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시라히메는, 자신이 마법의 세계에서 왔음을 확신했다.
‘마법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왕족’... 틀린 가설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라히메가 현재 가장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 가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특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존경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멋진’ 장소에 ‘멋진’ 기억이 모여있는게 아닐까?” 무채색의 세계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탑을 찾아보자!”
그렇게 시라히메는 전진했다.
그렇다.
그녀는 돌머리였다.
=====# S-3 #=====
시라히메는 또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매번 하듯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선언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시라히메는 아주 격렬한 수치심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온 사방으로 기억의 세계가 무너지는 와중, 그녀의 볼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유리의 세계로 돌아온 시라히메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손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으으... 뭐냐고, 이 기분은...”
...시라히메가 말했다.
“내 성은 어디 있는 건데!?”
계속해서 말했다.
“내 백성들은!? 동포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고 이를 깨물었다.
“한 번 더!”
시라히메는 그렇게 소리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억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기억인지는 몰랐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 식당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표정을 잊고 싶었다.
세계가 소용돌이치며 형태를 갖추었다. 밤하늘이 나무에 가려져 달이 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숲속의 빈터에 그녀는 앉아있었다. 등 뒤로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여?” 어린아이가 말했다.
이 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시라히메의 “동생”이었다. 꼬마 소녀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생각했다.
이 기억의 주인인 꼬마의 언니는 어떤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아니, 안 보이네.” 백발의 소녀가 말했다.
“계속 찾아보자.” 동생이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시라히메는 가까이 다가가 그 물건을 자세히 살폈다.
옆면에 버튼이 달린 화면이었다. 화면에서는 영화, 아니, 애니메이션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라히메는 동생의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르케아에서 보았던, 여느 창작물들과 비슷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괴물과 싸우는 내용의, 특출난 것 없는 만화였다.
“...이거 충전한 거 맞지?” 시라히메가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물어봤잖아.” 동생이 대답했다.
“...그래서 충전했다고?”
“했어!”
“다행이네…”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정말로 진심을 담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왕족은 만화 같은 걸 보면 안 된다. 왕족은 정치가이자 지배자이며, 백성을 지도하는 존재이다.
시라히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없이 앉아 집중하며 만화를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시라히메는 동생의 어깨에 자기 어깨를 기댔다.
동생도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아까 전까지 몸을 지배하던 수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올라오는 분노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때때로 아주 끔찍한 것이라고.
유리 조각 안에서 목격한 끔찍한 일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인생은 끔찍한 것이었다.
좌절감, 탈력감,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
그게 인생이었다.
이 유리 감옥에 갇히기 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옥좌에 앉은 고독한 지배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이 기억이, 그녀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인생도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시라히메의 “동생”이 조그만 담요를 들고 와 자신과 “언니”의 어깨에 둘렀다.
그녀는 동생을 바라보고서 조그맣게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기억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시라히메는 말없이 만화를 보았다.
그녀는 매번 하듯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선언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시라히메는 아주 격렬한 수치심이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온 사방으로 기억의 세계가 무너지는 와중, 그녀의 볼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 유리의 세계로 돌아온 시라히메는 손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질끈 감았다.
손 사이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으으... 뭐냐고, 이 기분은...”
...시라히메가 말했다.
“내 성은 어디 있는 건데!?”
계속해서 말했다.
“내 백성들은!? 동포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고 이를 깨물었다.
“한 번 더!”
시라히메는 그렇게 소리 지르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억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기억인지는 몰랐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그 식당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짓던 표정을 잊고 싶었다.
세계가 소용돌이치며 형태를 갖추었다. 밤하늘이 나무에 가려져 달이 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숲속의 빈터에 그녀는 앉아있었다. 등 뒤로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여?” 어린아이가 말했다.
이 기억 속에서, 이 아이는 시라히메의 “동생”이었다. 꼬마 소녀를 바라보며 시라히메는 생각했다.
이 기억의 주인인 꼬마의 언니는 어떤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아니, 안 보이네.” 백발의 소녀가 말했다.
“계속 찾아보자.” 동생이 말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시라히메는 가까이 다가가 그 물건을 자세히 살폈다.
옆면에 버튼이 달린 화면이었다. 화면에서는 영화, 아니, 애니메이션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시라히메는 동생의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르케아에서 보았던, 여느 창작물들과 비슷했다.
특별한 힘을 지닌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괴물과 싸우는 내용의, 특출난 것 없는 만화였다.
“...이거 충전한 거 맞지?” 시라히메가 기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까 물어봤잖아.” 동생이 대답했다.
“...그래서 충전했다고?”
“했어!”
“다행이네…”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정말로 진심을 담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왕족은 만화 같은 걸 보면 안 된다. 왕족은 정치가이자 지배자이며, 백성을 지도하는 존재이다.
시라히메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없이 앉아 집중하며 만화를 보는 것이, 그 무엇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시라히메는 동생의 어깨에 자기 어깨를 기댔다.
동생도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편안한 기분이었다.
아까 전까지 몸을 지배하던 수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올라오는 분노 속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인생이란 때때로 아주 끔찍한 것이라고.
유리 조각 안에서 목격한 끔찍한 일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인생은 끔찍한 것이었다.
좌절감, 탈력감,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
그게 인생이었다.
이 유리 감옥에 갇히기 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독한 옥좌에 앉은 고독한 지배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이 기억이, 그녀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랬다면, 인생도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시라히메의 “동생”이 조그만 담요를 들고 와 자신과 “언니”의 어깨에 둘렀다.
그녀는 동생을 바라보고서 조그맣게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기억이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시라히메는 말없이 만화를 보았다.
=====# S-4 #=====
그때부터, 시라히메의 목적의식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숲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만화를 보며 몇 시간이고 녹였던 기억이... 그녀의 열정도 완전히 녹여버린 것이다.
그녀에겐 성은 고사하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었다. 성이나 집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억에 불과할 것이다.
버려지고, 잊히고, 단명할 기억, 그것이 진실이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결말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이 없는, 합리적이지 못한 여정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가 걸어갈 길이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파...” 시라히메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영원히 계속되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눈은 촉촉했다.
설령 그녀가 머나먼 왕국의 공주, 추방당해버린 위대한 지배자, 왕족이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완벽한 인간은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을 곱씹었다.
보이지 않는 태양 아래에서, 눈을 감은 시라히메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소녀는 훌쩍였다.
햇빛을 머금은 눈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방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라히메의 얼굴을 비추던 아르케아의 햇빛이 마치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그녀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림자와 밤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엑...?”
시라히메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찢어져 있었고, 붉은 혜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응...!?”
혜성은 1분 정도 낙하하더니, 시라히메의 앞에 착지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모래와 함께 시라히메의 양갈래 머리가 휘날렸다.
어안이 벙벙한 시라히메는 입을 벌리고, 자신의 앞에 떨어진 “혜성”을 바라보았다.
그 “혜성”은 망가진 의자 더미 위에 앉아 머리를 흔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머리를...?
“혜성”은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아주 크게 눈을 떴다. 곧, 크게 뜬 눈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그 얼굴에 번졌다.
하늘로 날아올랐던 적색의 소녀.
그녀의 이름은 코우였다.
숲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만화를 보며 몇 시간이고 녹였던 기억이... 그녀의 열정도 완전히 녹여버린 것이다.
그녀에겐 성은 고사하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었다. 성이나 집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억에 불과할 것이다.
버려지고, 잊히고, 단명할 기억, 그것이 진실이었다.
앞으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결말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이 없는, 합리적이지 못한 여정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녀가 걸어갈 길이 텅 비어버렸다는 것이다.
“가슴이 아파...” 시라히메가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는 영원히 계속되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눈은 촉촉했다.
설령 그녀가 머나먼 왕국의 공주, 추방당해버린 위대한 지배자, 왕족이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며, 완벽한 인간은 없었다.
소녀는 조용히,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을 곱씹었다.
보이지 않는 태양 아래에서, 눈을 감은 시라히메는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꼈다.
소녀는 훌쩍였다.
햇빛을 머금은 눈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방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머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하늘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라히메의 얼굴을 비추던 아르케아의 햇빛이 마치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그녀가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림자와 밤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엑...?”
시라히메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찢어져 있었고, 붉은 혜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응...!?”
혜성은 1분 정도 낙하하더니, 시라히메의 앞에 착지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모래와 함께 시라히메의 양갈래 머리가 휘날렸다.
어안이 벙벙한 시라히메는 입을 벌리고, 자신의 앞에 떨어진 “혜성”을 바라보았다.
그 “혜성”은 망가진 의자 더미 위에 앉아 머리를 흔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머리를...?
“혜성”은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아주 크게 눈을 떴다. 곧, 크게 뜬 눈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그 얼굴에 번졌다.
하늘로 날아올랐던 적색의 소녀.
그녀의 이름은 코우였다.
=====# S-5 #=====
“만나서 반가워!”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코우가 인사했다. 시라히메는 그 자리에 굳어서 얼굴에 핏기가 빠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우는 의자 더미에서 내려와 거의 넘어질 정도로 강하게 시라히메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에 자칭 왕족의 입에서 전혀 왕족답지 못한 “우와악?!”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진짜 사람 맞지?! 그렇지?” 코우는 시라히메를 껴안은 팔을 풀고서 그녀의 얼굴, 귀, 머리카락, 옆구리를 마구 만졌다.
시라히메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코우는 시라히메의 새빨간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웃었다.
“이거 기억 아니지?” 코우가 물었다.
“나 사람 맞아!”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공주”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너 자기 이름은 알고 있니?” 코우가 물었다.
“나는 내 이름 모르거든. 아, 이제는 기억났을지도?!”
코우는 그렇게 말하며 희망에 찬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가,
“으응... 아니네... 아직 모르겠네...”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자, 잠깐만...! 좀 천천히...” 시라히메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 그... 너, 그 뭐냐... 너, 다, 다친 덴 없는 거냐?”
더듬거리며 질문을 하는 시라히메를 보며 코우는 웃었다. 질문보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명령에 가까운 억양이었다.
“없어, 괜찮아.” 코우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시라히메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 코우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을 흐렸다.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서, 시라히메를 보며 소리쳤다.
“밤이네!”
“그걸 이제야 눈치챘어?!”
“떨어지면서 뒤는 안 돌아봤거든.” 코우가 두 손을 모두 허리에 얹고서 말했다.
“하늘에서 뭘 하고 있던 거야?”
“기억들을 보고 있었어.”
“너도 기억을 볼 수 있어?” 시라히메가 묻자, 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늘도 날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이번엔 고개를 저으며 코우가 대답했다. “물건을 공중에 띄울 수는 있어.”
그렇게 말하며 코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찬장을 향해 손가락을 휘두르자, 찬장이 그녀의 방향으로 날아왔다.
“넌 못 해?”
시라히메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양갈래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에 코우는 크게 웃었다.
시라히메는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인간’이니까.”
아르케아의 세계에서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나의 운명, 또는 두 운명의 결합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이 두 소녀의 만남은 순수한 우연이었다.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리 조각, 목적, 그리고 하늘에 대해서. 그 뒤로는 실험이 뒤따랐다.
코우는 마법으로 시라히메를 들어 올릴 수 있는가? 시라히메는 코우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가?
전자는 성공이었고, 후자는 실패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둘은 자신들 외에도 이 세계에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햇빛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들 외에도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운명에 묶이지 않은 두 소녀는, 함께 걸어 나갔다.
생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코우가 인사했다. 시라히메는 그 자리에 굳어서 얼굴에 핏기가 빠졌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코우는 의자 더미에서 내려와 거의 넘어질 정도로 강하게 시라히메의 품에 뛰어들었다.
이에 자칭 왕족의 입에서 전혀 왕족답지 못한 “우와악?!”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진짜 사람 맞지?! 그렇지?” 코우는 시라히메를 껴안은 팔을 풀고서 그녀의 얼굴, 귀, 머리카락, 옆구리를 마구 만졌다.
시라히메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코우는 시라히메의 새빨간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웃었다.
“이거 기억 아니지?” 코우가 물었다.
“나 사람 맞아!”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공주”가 대답했다.
“그렇구나! 너 자기 이름은 알고 있니?” 코우가 물었다.
“나는 내 이름 모르거든. 아, 이제는 기억났을지도?!”
코우는 그렇게 말하며 희망에 찬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가,
“으응... 아니네... 아직 모르겠네...” 고개를 떨구고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자, 잠깐만...! 좀 천천히...” 시라히메가 애원하듯 말했다.
“그, 그... 너, 그 뭐냐... 너, 다, 다친 덴 없는 거냐?”
더듬거리며 질문을 하는 시라히메를 보며 코우는 웃었다. 질문보다는 대답을 요구하는 명령에 가까운 억양이었다.
“없어, 괜찮아.” 코우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시라히메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 코우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을 흐렸다. 허리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서, 시라히메를 보며 소리쳤다.
“밤이네!”
“그걸 이제야 눈치챘어?!”
“떨어지면서 뒤는 안 돌아봤거든.” 코우가 두 손을 모두 허리에 얹고서 말했다.
“하늘에서 뭘 하고 있던 거야?”
“기억들을 보고 있었어.”
“너도 기억을 볼 수 있어?” 시라히메가 묻자, 코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늘도 날 수 있는 거야?”
“그건 아니고…” 이번엔 고개를 저으며 코우가 대답했다. “물건을 공중에 띄울 수는 있어.”
그렇게 말하며 코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찬장을 향해 손가락을 휘두르자, 찬장이 그녀의 방향으로 날아왔다.
“넌 못 해?”
시라히메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양갈래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에 코우는 크게 웃었다.
시라히메는 가슴에 손을 얹고,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인간’이니까.”
아르케아의 세계에서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나의 운명, 또는 두 운명의 결합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뒤틀리곤 했다.
하지만, 이 두 소녀의 만남은 순수한 우연이었다.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유리 조각, 목적, 그리고 하늘에 대해서. 그 뒤로는 실험이 뒤따랐다.
코우는 마법으로 시라히메를 들어 올릴 수 있는가? 시라히메는 코우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가?
전자는 성공이었고, 후자는 실패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둘은 자신들 외에도 이 세계에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소녀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햇빛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어쩌면, 자신들 외에도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운명에 묶이지 않은 두 소녀는, 함께 걸어 나갔다.
=====# S-6 #=====
시라히메를 만난 지 몇 주, 아니면 몇 개월이 지났는지, 코우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밤하늘 아래에서, 두 소녀는 어둠의 장막에 덮인 폐허를 헤쳐왔다. 코우가 앞장서면, 시라히메는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시라히메는 화사하게 웃는 코우의 등에 손을 얹고 따라갔다. 쉽사리 부끄러워하는 “공주님”의 성격은 기억 바깥의 현실 세계에서도 발현되었다.
넘어지거나 말을 더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코우는 이 자칭 왕족이 덜덜 떠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시라히메는 말을 할 때나 행동할 때나, 떨림이 확실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 기나긴 여정이 두 사람을 묶어주었다.
하지만, 이 인연도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얼마쯤 지났을까. 두 소녀는 낮과 밤의 경계선에 도달했다.
구름은 조각나있고 아직 별들이 떠 있었지만, 아침의 햇빛이 하늘에 분명히 스며들어있었다.
소녀들은 말없이 감동에 가득 찬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감탄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곳은, 낮과 밤이 나누어지는 곳이니까.
“예쁘다...” 시라히메가 속삭였다.
“그러게.” 코우가 동의했다.
밤의 별들은 연보랏빛으로 반짝였다. 낮의 하늘은 새하얀 금빛이었다.
그 두 하늘이 만나는 곳에서는 기억의 조각들이 프리즘으로 만들어진 뱀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치 서툴게 넣은 봉제선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광경을 보고 있자, 마치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세계의 정체를, 이 세계가 생겨난 이유를.
코우는 먼저 시선을 내렸다. 시라히메는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떡할까? 결국 사람은 한 명도 못 찾았네.” 코우가 물었다.
“그러게...” 시라히메가 대답했다.
“계속 찾아볼까?”
시라히메도 시선을 내렸다. 소녀들의 앞에는 밤과 빛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아르케아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시라히메는 코우를 바라보고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저 경계선을 따라가 사람을 찾아보겠어. 너는 하늘로 다시 돌아가서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찾아봐.
코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코우는 시라히메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고압적이고 우아하지만, 그건 모두 유약한 마음을 숨기기 위한 연기에 불과한, 서투른 사람.
“...명령하는 거야?” 놀란 코우가 물었다.
“물론.” 시라히메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왕관이 보이지 않느냐? 짐은 왕족이니라!”
“잘 보입니다, 전하.” 코우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시라히메는 다시 시선을 낮추어, 앞에 펼쳐진 유리의 산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건 장난이었고... 갈라지자는 말은 진심이야.”
시라히메는 그렇게 말하며 코우와 눈을 맞추었다.
“하늘로 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줘.”
잠시 침묵의 순간이 지난 후, 코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발밑의 콘크리트를 커다란 원판 모양으로 떼어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럼, 나는 밤하늘로 올라갈게.” 코우가 말했다.
“만날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자!”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응, 반드시.”
시라히메도 웃음을 지어주며 대답했다. 곧 코우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저 백발의 소녀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느꼈다.
코우는 분명 다시 만나자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 그 믿음에, 코우의 얼굴은 이윽고 다시 빛을 되찾았다.
코우는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빛을 향해 날아갔다. 시라히메는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왕국을 되찾겠다는 야망은 잊어버렸다.
이 세계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계가 얼마나 광활할지라도, 언젠가 다른 사람을 찾아내고 말 것이다.
왕관과 홀은 왕족의 상징이다. 그리고 왕족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안식처와 같은 존재이다.
어쩌면 시라히메의 혈통은 전혀 고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자주 불평하고, 곧잘 흔들리고, 유약한 마음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시라히메의 영혼은, 고귀했다.
4. Archive Story
4.1. 아유
4.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1-1 | Colorful-1 | Oblivia 클리어 | ||
11-2 | Colorful-2 | Rugie 클리어 | ||
11-3 | Colorful-3 | init() 클리어 |
4.1.2. Colorful Dream
=====# 11-1 #=====이 사이로 느껴지는 평평하고 단단한 감촉. 딱 원하던 느낌이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상실의 기억. 절박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고통의 기억.
하지만 소녀는 이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고 단 한마디, “슬픈 기억”으로 정리해버릴 것이다.
어찌나 기대되는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아주 고소한 맛이 날 거라는 걸.
소녀는 유리 조각을 깨물었다.
“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생물의 이름은 팬즈다.
“배고팠어?”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왼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배고플 땐 언제든지 말해.”
이 생물의 이름은 드렘이다.
“음~!”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차 뺨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이 사이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와 그 가루가 혀를 덮었다. 따뜻한 느낌. 멋진 저녁식사...
이를테면 소금기를 머금은 진한 육즙으로 가득 찬 고기와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의 어휘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그녀가 내뱉은 감상은... “맛있어” 뿐이었다.
“잘됐네!” 신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팬즈가 말했다.
“마시쪙!” 유리 조각을 삼키며 아유가 말했다.
“맛있어, 라... 정확히 어떻게 맛있니?”
아유의 등 뒤에서 드렘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스테이크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유는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박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크는 어떤 맛이니?”
“에휴, 드렘아…”
길 잃은 아이를 대하는 듯한 억양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아는 게 없구나!”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 모를 뿐인걸.”
드렘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정말 어떤 맛인데?”
“고기 맛이지!” 아유가 그렇게 말하고선, 무언가 특이한 걸 발견했는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럼... 짠 맛인가?” 드렘이 물었다.
“짜고 맛있는 맛!”
맛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아유는 방금 전에 움켜쥔 유리 조각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웃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과 성취와 축하의 기억이다.
아유의 언어로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래! 짠거 다음엔 단 걸 먹어야지!” 팬즈가 소리쳤다.
“봐, 팬즈가 드렘 너보다 똑똑하네!” 코로 웃음 소리를 내며 아유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드렘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고...”
새로 찾은 유리 조각을 쪽쪽 빨며, 드렘의 말을 흘려듣듯 아유는 “응 그래”라고 대답한 후 콧노래를 부르면서 팔을 흔들었다. 유리 조각에선 설탕과 같은 맛과 감촉이 느껴졌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색의 세계가, 등 뒤로는 폐허로 가득 찬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 두 풍경은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는,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있다.
온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유가 어금니로 기억을 깨물어 부쉈다. 그 기억에 담긴 역사가 사라졌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끊임없이 배고픈 소녀가 있다.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모서리 때문에 혀가 간지럽다.
상실의 기억. 절박함과 실패로 이루어진 고통의 기억.
하지만 소녀는 이 기억을 그렇게 묘사하지 않고 단 한마디, “슬픈 기억”으로 정리해버릴 것이다.
어찌나 기대되는지,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안 먹어봐도 알 수 있다. 이건 아주 고소한 맛이 날 거라는 걸.
소녀는 유리 조각을 깨물었다.
“오...”
하얀색과 검은색, 그리고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오른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 생물의 이름은 팬즈다.
“배고팠어?”
검은색과 하얀색, 그리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이루어진 박쥐같은 생물이 소녀의 왼쪽 어깨 위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배고플 땐 언제든지 말해.”
이 생물의 이름은 드렘이다.
“음~!”
그녀는 행복에 가득 차 뺨에 손을 올리고 감탄했다. 이 사이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산산조각 난 유리와 그 가루가 혀를 덮었다. 따뜻한 느낌. 멋진 저녁식사...
이를테면 소금기를 머금은 진한 육즙으로 가득 찬 고기와 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의 어휘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그녀가 내뱉은 감상은... “맛있어” 뿐이었다.
“잘됐네!” 신난 듯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팬즈가 말했다.
“마시쪙!” 유리 조각을 삼키며 아유가 말했다.
“맛있어, 라... 정확히 어떻게 맛있니?”
아유의 등 뒤에서 드렘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응... 스테이크 같아!”
그렇게 말하며 아유는 앞으로 힘차게 걸어나갔다. ‘박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테이크는 어떤 맛이니?”
“에휴, 드렘아…”
길 잃은 아이를 대하는 듯한 억양으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넌 아는 게 없구나!”
“스테이크가 무슨 맛인지 모를 뿐인걸.”
드렘은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정말 어떤 맛인데?”
“고기 맛이지!” 아유가 그렇게 말하고선, 무언가 특이한 걸 발견했는지 공기 중에 떠다니던 유리 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럼... 짠 맛인가?” 드렘이 물었다.
“짜고 맛있는 맛!”
맛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아유는 방금 전에 움켜쥔 유리 조각을 입으로 털어넣었다. 웃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과 성취와 축하의 기억이다.
아유의 언어로는 “행복한 기억”이다.
“그래! 짠거 다음엔 단 걸 먹어야지!” 팬즈가 소리쳤다.
“봐, 팬즈가 드렘 너보다 똑똑하네!” 코로 웃음 소리를 내며 아유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드렘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다고...”
새로 찾은 유리 조각을 쪽쪽 빨며, 드렘의 말을 흘려듣듯 아유는 “응 그래”라고 대답한 후 콧노래를 부르면서 팔을 흔들었다. 유리 조각에선 설탕과 같은 맛과 감촉이 느껴졌다.
그들의 앞으로는 백색의 세계가, 등 뒤로는 폐허로 가득 찬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 두 풍경은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온 세상에는, 유리 조각이 흩뿌려져있다.
온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이 소녀를 기다리고 있다.
아유가 어금니로 기억을 깨물어 부쉈다. 그 기억에 담긴 역사가 사라졌다.
먹을 것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끊임없이 배고픈 소녀가 있다.
=====# 11-2 #=====
아유도 박쥐들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드렘은 아유의 머리 위에 앉아있었다.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탓에 날개가 아유의 얼굴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팬즈가 소리쳤다.
“어... 하얀색이네! 하얀색 유리 조각이 잔뜩 보여, 아유!”
“단 거야?” 얼굴을 두드리는 날개 사이로 아유의 말이 새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 오! 른! 쪽!” 계속해서 아유의 코와 입을 두드리며, 드렘이 대답했다.
“그래, 오른쪽이야!” 팬즈가 동의했다.
“또 단 거야?” 아유가 불평했다.
“단 거...”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드렘은 아직도 날개로 아유의 이마를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 있잖아... 좀... 그 뭐야... 다양하게 먹고 싶은데... 너희도 알잖아... 난 다양하게 먹는 게 좋다구…”
“그렇게는 안 돼.” 팬즈가 말했다.
“뭐가 안 되는데?” 아유가 물었다.
드렘이 드디어 아유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아유...” 드렘이 아유의 얼굴 앞에서 날갯짓하며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배고프잖아?”
“항상 배고프지.”
아유가 대답했다. 그리고 부탁하듯 눈을 한 번 굴리고선 말했다.
“그래도 좀... 드렘...”
“배가 고프면 배부르게 잔뜩 먹어야겠지!”
드렘이 날개를 퍼덕이며 소리쳤다. 눈앞에 박쥐의 날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쭉 빠진 아유는 눈을 굴렸다.
“세상에 유리가 이렇게 많으니까... 그럼 좀 더... 있잖아...”
아유는 드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저 멀리 자리 잡은 두 가지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두 집과, 그 사이에 난 길 위로 떠다니는 유리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한눈에 행복과 고통의 기억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드렘과 한 번 눈을 마주치고는 길을 향해 걸어갔다.
“으으응?” 등 뒤에서 날아온 박쥐의 질문에, 올라간 말꼬리만이 귀에 들어온 아유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드렘이 소리쳤다.
아랑곳 않고 아유는 계속 걸어가 이상한 유리 조각의 무리가 떠다니는 길에 다다랐다.
유리 조각에는 옛 시절의 풍경이 비치고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유는 한 쌍의 유리 조각을 집어들었다.
한 손에는 빛, 다른 손에는 대립, 아유는 두 조각을 동시에 입으로 가져가 깨물었다.
두 맛의 조합은 황홀했다.
“이런… 또 시작됐군.” 마침내 아유가 전혀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드렘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게 아니잖아!” 팬즈가 말했다.
“우리가 계속 말했잖아, 네가 먹어야 하는 건 여기 있는 유리가 아니라… 저 쪽에 아주 난리가 났다니깐... 하아...”
팬즈는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뭐... 행복해보이긴 하네...”
“음.”
드렘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그래. 행복해보이긴 하지.”
아유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 두 유리 조각을 동시에 먹으면 훨씬 맛있어진다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기억이 같이 있는 경우는 드물기에, 아유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유리 조각의 무리는 보물더미다.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한순간. 박쥐들이 다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음에는 말을 들어야지.
유리를 깨물어 먹을 때처럼, 아유는 때때로 박쥐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라고 느껴졌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기분이 좋다. 기분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었다.
아유의 모든 행동은 기분 좋은 일을 위함이었다.
존재의 의미 치고는 아주 단순했지만, 여기서 더 복잡해져야 할 필요가 있긴 할까?
박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만족으로 이어진다면, 아유가 조용히 있는 것이 때때로 만족을 안겨 준다면...
그렇다면 소녀는 잠시나마 귀를 열고 입을 닫아줄 것이다.
=====# 11-3 #=====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서 달달한 유리 조각의 무리는 사라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랗고 어두우며, 아주 맛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유와 박쥐들은 검은 유리로 가득 찬 구덩이의 모서리에 서서 밑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유리의 무리에 아주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닿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를 긁어대며 내는 소리는 통곡과도 같았다. 끝과 상실의 기억들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유는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아유.” 드렘이 눈짓으로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들어봐.”
“엉.” 아유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뛰어내렸다.
아유가 팔을 쭉 뻗자 추락하는 속도가 즉시 느려졌다. 아유의 주변을 마구잡이로 쏘다니는 유리 조각들.
아유가 손을 뻗자 기억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유는 그곳에서 조각을 몇 개 불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조각들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잘했어, 아유!”
“좋았어! 아유!”
아유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허기는 진실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 조각과 파편과 가루. 그 모든 것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무(無)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느낌.
그렇기에 아유는 맛을 중요시한다. 우리 조각을 일부러 깨물어 부수는 이유도 오로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자신의 배 속에는 위장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이를 주어야 하는 공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물론, 맛을 느끼기 위해. 아유는 유리 조각을 깨물어 먹는다.
그럴 때만은, 아주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에.
그녀를 채우던 호기심과 함께 여태껏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도 사라졌다. 머지않아 검은 유리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혀로 입술을 닦는 아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유가 밝게 미소지었다.
“엄청 맛있었어!” 소녀가 외쳤다.
“그래!” 팬즈가 동의했다.
“맛있어 보이더라.” 드렘도 따라서 긍정했다.
아유는 박쥐들이 싫지 않았다. 박쥐들은 아유가 웃으며 지내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박쥐들은 아유의 배가 항상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유는 땅에 발을 디딘 후 즐겁게 뛰쳐나가며 박쥐들과 색과 하늘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이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저게 뭐지?” 드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뭐가?” 팬즈가 드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가 홀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먹어 봐, 아유.” 팬즈가 말했다.
“어서.” 드렘이 말했다.
아유는 힘차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과 함께 소녀가 날아올랐다. 얼굴에 번진 미소와 함께 소녀는 그 기묘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조각으로 다가가며 아유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배가 채워질지.”
아유와 박쥐들은 검은 유리로 가득 찬 구덩이의 모서리에 서서 밑을 바라보았다. 요동치는 검은 유리의 무리에 아주 조그마한 빛줄기라도 닿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를 긁어대며 내는 소리는 통곡과도 같았다. 끝과 상실의 기억들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아유는 그 모습을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아유.” 드렘이 눈짓으로 구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뛰어들어봐.”
“엉.” 아유는 대답하고서는 바로 뛰어내렸다.
아유가 팔을 쭉 뻗자 추락하는 속도가 즉시 느려졌다. 아유의 주변을 마구잡이로 쏘다니는 유리 조각들.
아유가 손을 뻗자 기억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아유는 그곳에서 조각을 몇 개 불러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조각들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잘했어, 아유!”
“좋았어! 아유!”
아유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 표정을 찡그렸다.
이 허기는 진실로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유리 조각과 파편과 가루. 그 모든 것이 목으로 넘기는 순간 무(無)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느낌.
그렇기에 아유는 맛을 중요시한다. 우리 조각을 일부러 깨물어 부수는 이유도 오로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자신의 배 속에는 위장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이를 주어야 하는 공허가 들어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 위해. 그리고 물론, 맛을 느끼기 위해. 아유는 유리 조각을 깨물어 먹는다.
그럴 때만은, 아주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에.
그녀를 채우던 호기심과 함께 여태껏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도 사라졌다. 머지않아 검은 유리의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혀로 입술을 닦는 아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유가 밝게 미소지었다.
“엄청 맛있었어!” 소녀가 외쳤다.
“그래!” 팬즈가 동의했다.
“맛있어 보이더라.” 드렘도 따라서 긍정했다.
아유는 박쥐들이 싫지 않았다. 박쥐들은 아유가 웃으며 지내길 바랄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박쥐들은 아유의 배가 항상 비어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유는 땅에 발을 디딘 후 즐겁게 뛰쳐나가며 박쥐들과 색과 하늘과 음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것이 그들의 세상이다. 이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저게 뭐지?” 드렘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뭐가?” 팬즈가 드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눈을 돌리며 덧붙였다.
아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조각 하나가 홀로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먹어 봐, 아유.” 팬즈가 말했다.
“어서.” 드렘이 말했다.
아유는 힘차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쥐들과 함께 소녀가 날아올랐다. 얼굴에 번진 미소와 함께 소녀는 그 기묘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잖아.” 조각으로 다가가며 아유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배가 채워질지.”
4.2. 시라베
4.2.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6-1 | Scarlet-1 | Purgatorium 클리어 | ||
6-2 | Scarlet-2 | Scarlet Cage 클리어 | ||
6-3 | Scarlet-3 | VECTOЯ 클리어 |
4.2.2. Scarlet Cage
=====# 6-1 #=====어딘가에 사람이 있으리라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건물만이 가득 찬 새하얀 황무지일 뿐이었다.
생명이라고는 본인밖에 없었다.
소녀는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세상에서 며칠 전에 깨어났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탐험했으나, 저 황량한 건물들에 해답은 없었다. 비어있을 뿐이었다.
건물들이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녀는 저것들의 이름, 형태, 목적 따위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소녀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이나 본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계는 기묘하고 신기한 곳이라는 것이다.
소녀가 어깨에 두른 기타의 스트랩을 꽉 쥐자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 기타는 어디서 난 걸까? 대체 왜 내가 이걸 갖고 있는 걸까?
소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 기타와 함께였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곤 줄을 튕기고 프렛을 잡아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법.
리듬과 멜로디, 코드, 화음을 내는 법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왜 모르는 걸까?
그녀가 밟은 모래는 억겁의 시간동안 바위가 물에 풍화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물은 없다. 그 어떤 액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모래가 있는 걸까? 소녀는 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답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답을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지식들이 “기억”이긴 한 걸까? 정말로 나는 이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것인가? 기억상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사라지는 게 기억상실이던가?
지식을 갖고 있으나, 어째서 그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소녀는 굉장히 불편했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빼내어 다른 몸에 넣어두고 중요한 장기는 빼먹은 듯한, 텅 비고, 잊힌 느낌.
소녀는 무지(無知)가 너무나 싫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만화경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 풍경에 힘껏 집중을 해보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맨발로 여행하던 소녀는 (힐을 신고 걷는 것은 힘들었기에 벗어 목에 두르고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가 싫었다. 소녀는 많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껏 보아온 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선,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 유리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시간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마음에 울렸다. 그 광경은, 틀림없이 소녀에게 친숙했다.
하지만 그 친숙함은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소녀 자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아르케아들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그 무엇도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그러면서 온몸으로 우려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외된 느낌, 혼란, 희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없다는 감각.
소녀는 이 감각이 싫었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
걸으면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녀의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오래되어 무너져가는 건물만이 가득 찬 새하얀 황무지일 뿐이었다.
생명이라고는 본인밖에 없었다.
소녀는 아무런 기억 없이 이 세상에서 며칠 전에 깨어났다. 그 사이에 꽤 먼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를 탐험했으나, 저 황량한 건물들에 해답은 없었다. 비어있을 뿐이었다.
건물들이 어째선지 익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녀는 저것들의 이름, 형태, 목적 따위를 배운 기억은 없었다.
소녀에게 지식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상이나 본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아는 것으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도피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세계는 기묘하고 신기한 곳이라는 것이다.
소녀가 어깨에 두른 기타의 스트랩을 꽉 쥐자 의문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 기타는 어디서 난 걸까? 대체 왜 내가 이걸 갖고 있는 걸까?
소녀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이 기타와 함께였지만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아는 것이라곤 줄을 튕기고 프렛을 잡아 다양한 소리를 내는 법.
리듬과 멜로디, 코드, 화음을 내는 법이었다.
그렇게 기타를 손에 쥐고 있을 때면 소녀는... 아득함을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왜 모르는 걸까?
그녀가 밟은 모래는 억겁의 시간동안 바위가 물에 풍화된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곳에 물은 없다. 그 어떤 액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 모래가 있는 걸까? 소녀는 걸을 수 있었다. 어째서? 답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답을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이 지식들이 “기억”이긴 한 걸까? 정말로 나는 이 지식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다른 것들은 “잊어버린” 것인가? 기억상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기억만 골라서 사라지는 게 기억상실이던가?
지식을 갖고 있으나, 어째서 그 지식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소녀는 굉장히 불편했다.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피부와 근육과 뼈를 빼내어 다른 몸에 넣어두고 중요한 장기는 빼먹은 듯한, 텅 비고, 잊힌 느낌.
소녀는 무지(無知)가 너무나 싫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 질문들이 만화경의 풍경처럼 지나갔다. 그 풍경에 힘껏 집중을 해보지만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맨발로 여행하던 소녀는 (힐을 신고 걷는 것은 힘들었기에 벗어 목에 두르고 있기로 했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것을 볼수록, 오히려 아는 것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가 싫었다. 소녀는 많은 것을 알았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여태껏 보아온 것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선,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유리 조각이 있었다. 그 유리 조각들은 다른 사람들, 다른 시간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소녀의 마음에 울렸다. 그 광경은, 틀림없이 소녀에게 친숙했다.
하지만 그 친숙함은 말 그대로 느낌에 불과했다. 그 광경에 소녀 자신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다... 적어도 이 아르케아들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다.
그 무엇도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그러면서 온몸으로 우려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외된 느낌, 혼란, 희미한 외로움, 그리고 자신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없다는 감각.
소녀는 이 감각이 싫었다.
소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 잡념을 떨쳐낼 수 있다.
걸으면 자신의 내면보다 바깥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6-2 #=====
하지만 얼마 못가 그 감각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비교적 부드러운 바위에 앉아 불안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뒤로 돌아보자, 색이 바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평선까지 긴 대열을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래가 이렇게 많은 걸까?
모래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한 후, 소녀는 또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그 아늑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기타는 마치... 위로해 주는 부모님이나 친구와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으로는 기타줄을 튕겼다. 조용하게 울리는 코드의 음이 콧노래와 멋진 화음을 이루었다. 소녀는 걷는 방법도,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두 행동만큼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 얼굴에 잠시 미소가 찾아왔다.
얼마 못가 그 미소는 사라졌다. 소녀의 혀가, 이가, 입술이, 가사를 이 노래에 붙이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어떤 풍경을 그리려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노래했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무색의, 무한한 감옥에서.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갔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점점 거세졌다.
본능이 내뱉는 그 단어들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에 잊힌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항상 함께해왔던 것들이다.
이제 그것들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기어 나와 소리높이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포효와 같은 소리로 이 죽은 세계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외쳐야 했다.
소녀는 최대한 크게, 그 단어들을 외쳤다.
그렇게 해야 할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 무지, 황량한 풍경, 조그만 유리 조각들이 찰나의 순간 동안 비추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공포에 대해 외쳤다.
연주하던 도중 그 한순간,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텅 빈 세계와, 텅 빈 자신의 기억...
그것들이 두려웠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는 이미 그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목소리가 음을 찾지 못하고 갈라졌지만, 억지로 폐에 있던 공기를 쥐어짜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6개의 현 사이로 미친 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강력하고 우렁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진동이.
그 가사 밑으로 흐르는 세찬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공포가 강력한 열을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서 빛났다.
영혼과 음악이 자아낸 폭풍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덜 혼란스러웠고, 조금 덜 두려웠다.
잠시 후, 그 외침의 메아리조차 잦아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현을 몇 번 뜯은 뒤 소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노래는 밝은 하늘을 향해 잦아들어, 그 존재의 흔적은 이제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손은 덜덜 떨며, 자신의 노래를 가져간 하늘을 보길 거부했다.
그리고 웃었다. 소녀 자신도 놀라웠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바탕 해내고 난 후의 후련한 미소.
손을 옷에 닦듯이 비비고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 세상이 싫었다.
소녀는 비교적 부드러운 바위에 앉아 불안한 듯 머리를 매만졌다. 뒤로 돌아보자, 색이 바랜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평선까지 긴 대열을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모래가 이렇게 많은 걸까?
모래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한 후, 소녀는 또다시 기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또다시 밀려오는 그 아늑한 감각을 느꼈다.
그 기타는 마치... 위로해 주는 부모님이나 친구와 같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숨을 내뱉었다. 이거면 됐다.
이거면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소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손가락으로는 기타줄을 튕겼다. 조용하게 울리는 코드의 음이 콧노래와 멋진 화음을 이루었다. 소녀는 걷는 방법도, 기타를 연주하는 방법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 두 행동만큼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그 얼굴에 잠시 미소가 찾아왔다.
얼마 못가 그 미소는 사라졌다. 소녀의 혀가, 이가, 입술이, 가사를 이 노래에 붙이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내뱉은 그 단어들이 공기 중으로 퍼지며 어떤 풍경을 그리려는 듯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노래했다. 이 새하얀 세계에서, 무색의, 무한한 감옥에서.
점점, 노랫소리가 커져갔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점점 거세졌다.
본능이 내뱉는 그 단어들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으며, 과거에 잊힌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 항상 함께해왔던 것들이다.
이제 그것들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기어 나와 소리높이 울리고 있었다. 단순히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포효와 같은 소리로 이 죽은 세계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외쳐야 했다.
소녀는 최대한 크게, 그 단어들을 외쳤다.
그렇게 해야 할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운 감정, 무지, 황량한 풍경, 조그만 유리 조각들이 찰나의 순간 동안 비추다 사라지는 수많은 기억들,
그리고...
공포에 대해 외쳤다.
연주하던 도중 그 한순간,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텅 빈 세계와, 텅 빈 자신의 기억...
그것들이 두려웠다.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소녀는 이미 그 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는.
목소리가 음을 찾지 못하고 갈라졌지만, 억지로 폐에 있던 공기를 쥐어짜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6개의 현 사이로 미친 듯이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 소리가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들렸다. 강력하고 우렁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그 진동이.
그 가사 밑으로 흐르는 세찬 파도와 함께, 일렁이는 공포가 강력한 열을 내뿜으며 그녀의 눈에서 빛났다.
영혼과 음악이 자아낸 폭풍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녀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조금 덜 혼란스러웠고, 조금 덜 두려웠다.
잠시 후, 그 외침의 메아리조차 잦아들고 난 후, 마지막으로 현을 몇 번 뜯은 뒤 소녀는 팔을 늘어뜨렸다.
노래는 밝은 하늘을 향해 잦아들어, 그 존재의 흔적은 이제 그녀의 텅 빈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았다.
소녀는 왼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 손은 덜덜 떨며, 자신의 노래를 가져간 하늘을 보길 거부했다.
그리고 웃었다. 소녀 자신도 놀라웠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한바탕 해내고 난 후의 후련한 미소.
손을 옷에 닦듯이 비비고 숨을 내뱉었다.
정말, 이 세상이 싫었다.
=====# 6-3 #=====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무섭고, 여전히 비어있고, 여전히 무자비했지만,
소녀는 이제 맞설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소녀는 분명 공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은 오금이 저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제어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포, 실패의 공포란 그런 것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도 불러본 적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이, 공포를 이겨내고 노래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틀린 감정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으려면, 공포를 마주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숨을 뱉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레 짤랑, 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따리가 떨어져 모래 위에 튀어나온 돌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바늘, 가위, 골무, 실타래, 그리고 줄자가 들어있었다. 바느질 도구다.
소녀가 깨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어, 자신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물건이다.
이 보따리를 처음 찾았을 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기가 이걸 갖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보따리 속에 든 각 물건의 용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타처럼... 도대체 이 보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주우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옷의 소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알고 있었다... 이 소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바늘땀과 재봉선을, 그것이 어떤 색의 실인지.
그 실은 저 바느질 도구 보따리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옷과 저 보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답답한 기분은 걷히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소녀의 경험과 지식은 단절되어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소녀는 그 단절이 일으키는 공포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공포를 제대로 알고, 이용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소녀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목표를 찾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보따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여정 도중에 옷이 망가지면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은 꽤 편리했다.
그녀의 옷은 절대로 편하거나 실용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것이었다.
옷, 기타, 바느질 도구, 이 기억의 황무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나아졌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이 났다.
몇 걸음을 걷자, 땅에 있는 무언가가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간 그 발자국은 분명, 크기가 달랐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새겨졌다.
흠...
어쩌면, 누군가 내 음악을 들은 걸지도...
소녀는 이제 맞설 준비가 되었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소녀는 분명 공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공포에 질리면 사람은 오금이 저리고, 도망가고 싶어지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제어를 잃게 된다.
미지의 공포, 실패의 공포란 그런 것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은 본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도 불러본 적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지금과 같이, 공포를 이겨내고 노래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틀린 감정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제정신으로 있으려면, 공포를 마주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다.
하지만 공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녀는 숨을 뱉고 앉은 자세를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기타를 옆에 내려놓았다.
갑작스레 짤랑, 하고 조그마한 소리가 울렸다.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보따리가 떨어져 모래 위에 튀어나온 돌 위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바늘, 가위, 골무, 실타래, 그리고 줄자가 들어있었다. 바느질 도구다.
소녀가 깨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어, 자신의 것이라고 짐작했던 물건이다.
이 보따리를 처음 찾았을 땐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왜 자기가 이걸 갖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보따리 속에 든 각 물건의 용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기타처럼... 도대체 이 보따리가 어디서 온 물건인지에 대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는 손을 뻗어 주머니를 주우려고 했다. 그렇게 자기 옷의 소매를 보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알고 있었다... 이 소매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바늘땀과 재봉선을, 그것이 어떤 색의 실인지.
그 실은 저 바느질 도구 보따리 안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연결점은 찾을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자신의 옷과 저 보따리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답답한 기분은 걷히지 않았다.
잔인하게도 소녀의 경험과 지식은 단절되어 있었다.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지만 더 이상, 소녀는 그 단절이 일으키는 공포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 공포를 제대로 알고, 이용할 것이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소녀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목표를 찾을지도 모른다.
다시 걸어가는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보따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여정 도중에 옷이 망가지면 고칠 방도가 있다는 것은 꽤 편리했다.
그녀의 옷은 절대로 편하거나 실용적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자신의 것이었다.
옷, 기타, 바느질 도구, 이 기억의 황무지에서, 그것들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더 나아졌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힘이 났다.
몇 걸음을 걷자, 땅에 있는 무언가가 소녀의 눈에 띄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을 가로질러 왼쪽으로 나아간 그 발자국은 분명, 크기가 달랐다.
그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작은 언덕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새겨졌다.
흠...
어쩌면, 누군가 내 음악을 들은 걸지도...
4.3. 미르
4.3.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8-1 | Obsidian-1 | GIMME DA BLOOD 클리어 | ||
8-2 | Obsidian-2 | Bookmaker (2D Version) 클리어 | ||
8-3 | Obsidian-3 | Illegal Paradise 클리어 | ||
8-4 | Vermillion-1 | 선행 조건Dies irae 혹은 Spirit of the Dauntless 보유 ReviXy 클리어 | ||
8-5 | Vermillion-2 | 8-4 스토리 열람[5] | ||
8-6 | Vermillion-3 | |||
8-7 | Vermillion-4 | |||
8-8 | Vermillion-5 | LunarOrbit -believe in the Espebranch road- 클리어 | ||
8-9 | Vermillion-6 | 8-8 스토리 열람 |
4.3.2. Obsidian Blade
=====# 8-1 #=====달도 비추지 않는 밤이 숲에 내려앉았다.
푸른 숲과 그 안의 마을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덮으려는 듯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끔찍한 형체가 내지르는 끔찍한 소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죽을힘을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소녀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의 순수한 황홀감.
흑요석과 같은 검은 광택을 두른 미르의 검이 그림자를 가를 때마다 반짝였다.
그림자는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싸울 때는 교묘하게 뒷다리로 서서 움직였다.
그녀가 쥔 검의 날이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의 어깨를 베어내자 떨어진 신체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 몸은 소멸하여 연기가 되듯 흩날렸다.
그녀는, 그 짐승들이 숲에 번진 불길에서 일어난 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했다.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그 정수가 다시 연기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의 날을 그림자 짐승에게 찔러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을 거의 빠져나가, 전진하는 군대의 전열 속으로 피난했다.
미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황홀감이 끝을 보도록.
그녀가 몸을 날리자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거의 들판에 가까운 길이를 긴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넘었고, 도망치는 농부에게 연기로 된 발톱을 세운 또 다른 짐승의 목을 날려버렸다.
키가 작은 근육질의 여성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미르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떠한 손짓을 보인 후 다시 바삐 달아났다. 감사의 표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계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고, 도륙하고, 끝내 버리는 것. 모든 적이 사라졌으리라 짐작될 때까지.
마침내 마을의 마지막 난민이 창을 든 군인들의 열에 도달했다. 미르는 군인들의 눈썹에 맺힌 땀과 눈에 어린 공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결연한 의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검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보다 더욱 일찍.
그리고, 마치 유리로 만들어져 투영된 이미지처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엷은 빛이 그녀를 완전히 에워싸게 두었고...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푸른 숲과 그 안의 마을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불길을 덮으려는 듯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 끔찍한 형체가 내지르는 끔찍한 소리,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화염.
사람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죽을힘을 향해 달아났다.
하지만 소녀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여 있었다.
전투의 순수한 황홀감.
흑요석과 같은 검은 광택을 두른 미르의 검이 그림자를 가를 때마다 반짝였다.
그림자는 네 발로 걸어 다니는 일그러진 짐승의 형상을 했지만, 싸울 때는 교묘하게 뒷다리로 서서 움직였다.
그녀가 쥔 검의 날이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의 어깨를 베어내자 떨어진 신체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 몸은 소멸하여 연기가 되듯 흩날렸다.
그녀는, 그 짐승들이 숲에 번진 불길에서 일어난 연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알지 못했다.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점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그 정수가 다시 연기 속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돌아온다는 것뿐이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의 날을 그림자 짐승에게 찔러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숲속을 거의 빠져나가, 전진하는 군대의 전열 속으로 피난했다.
미르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이 황홀감이 끝을 보도록.
그녀가 몸을 날리자 한 번의 도약만으로도 거의 들판에 가까운 길이를 긴 머리를 흩날리며 뛰어넘었고, 도망치는 농부에게 연기로 된 발톱을 세운 또 다른 짐승의 목을 날려버렸다.
키가 작은 근육질의 여성이 도망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미르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어떠한 손짓을 보인 후 다시 바삐 달아났다. 감사의 표시였을까.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이 세계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했는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언제나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죽이고, 도륙하고, 끝내 버리는 것. 모든 적이 사라졌으리라 짐작될 때까지.
마침내 마을의 마지막 난민이 창을 든 군인들의 열에 도달했다. 미르는 군인들의 눈썹에 맺힌 땀과 눈에 어린 공포를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자세에서 보이는 결연한 의지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검을 내려놓고 숨을 내쉰 그녀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지난번보다 더욱 일찍.
그리고, 마치 유리로 만들어져 투영된 이미지처럼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엷은 빛이 그녀를 완전히 에워싸게 두었고...
그녀는 다시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 8-2 #=====
미르는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죽어버린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지니고 있던 기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에 미르를 불러낸 유리 조각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잠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잇따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다시는 그 조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의 이름은 아르케아. 깨어났을 때부터 어째선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상황’에 놓인 다른 세계의 모습을 미르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조각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조각은 미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없이도 조각은 미르를 불러내어,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하지만 미르의 목적은 언제나 같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 철저하게 부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
언제나 필연적으로 미르의 뒤에는 스스로는 싸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피를 끓게 하는 전투의 황홀감 앞에서는 무색해졌지만.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나, 미르는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 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게. 미르는 여러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마주하면 그러한 걱정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맹렬한 폭력의 기쁨이 온몸에 흐르도록 하며 전투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이 사라지는 순간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공허함과 피로감만이 미르를 채웠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까지는 몇 시간,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차분해졌을 때엔, 미르는 그 세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세계들이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여태껏 굳게 믿어왔던 ‘사실’조차 이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소들은 마치 세계가 아니라… 어째선지 안에 들어가 행동할 수 있는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답이 뻔한 의문이다. 미르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해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미르는 검을 어깨에 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온통 흰모래뿐. 색이 쭉 빠진 사막은 마치 탈진한 미르의 모습과 같았다.
미르가 조각에게 ‘잡혀가기’ 전 모래 위에 새겼던 발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람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다른 부름. 사방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타올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들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급조한 울타리와 참호.
미르는 갑작스레 피곤해졌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부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거기에, 미르가 지켜야 할 약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각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르의 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르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번에 미르를 불러낸 유리 조각은 멀리 날아가기 전에 잠시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잇따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다시는 그 조각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조각의 이름은 아르케아. 깨어났을 때부터 어째선지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상황’에 놓인 다른 세계의 모습을 미르에게 보여주었다.
미르는 조각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조각은 미르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수없이도 조각은 미르를 불러내어, 다양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세계로 데려가 주었다.
하지만 미르의 목적은 언제나 같았다.
적을 쓰러뜨리는 것. 철저하게 부수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하는 것.
언제나 필연적으로 미르의 뒤에는 스스로는 싸울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피를 끓게 하는 전투의 황홀감 앞에서는 무색해졌지만.
언제부터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나, 미르는 눈을 떴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 검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어쩌면, 너무 지나칠 정도로 능숙하게. 미르는 여러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었다.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조차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마주하면 그러한 걱정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맹렬한 폭력의 기쁨이 온몸에 흐르도록 하며 전투를 즐겼다.
그러나 그런 황홀감이 사라지는 순간은 점점 더 빨리 찾아왔다. 공허함과 피로감만이 미르를 채웠고, 그로부터 회복하기 까지는 몇 시간,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되기까지는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차분해졌을 때엔, 미르는 그 세계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세계들이 이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여태껏 굳게 믿어왔던 ‘사실’조차 이제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장소들은 마치 세계가 아니라… 어째선지 안에 들어가 행동할 수 있는 ‘동영상’처럼 느껴졌다.
답이 뻔한 의문이다. 미르는 그렇게 느끼면서도 도저히 해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쳐버린 미르는 검을 어깨에 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풍경은 온통 흰모래뿐. 색이 쭉 빠진 사막은 마치 탈진한 미르의 모습과 같았다.
미르가 조각에게 ‘잡혀가기’ 전 모래 위에 새겼던 발자국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바람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시간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또 다른 부름. 사방이 또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타올라 갈색으로 변해버린 들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 급조한 울타리와 참호.
미르는 갑작스레 피곤해졌다. 이렇게 짧은 주기로 ‘부름’을 받은 적은 없었다. 거기에, 미르가 지켜야 할 약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각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는 그들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르의 적은 어디에 있는 걸까?
미르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 8-3 #=====
전쟁.
미르는 전투는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전쟁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고,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달아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지독하게 불명예스러운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보든 미르보다 약한 자들만이 존재했다.
공포에 질린 순박한 얼굴,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르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환영인 것처럼, 빛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에도 미르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덕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를 돌아보든, 적들만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적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가공할 만한 무기, 인간성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미르는 그 무기들을 파괴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적이 다른 편에서 몰려왔다.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르는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미르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지켜낸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머리 위로 치솟은 전함이 대지에 순수한 파괴의 비를 뿌렸다. 푸른 군복에 달린 것과 같은 휘장이 그려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일격은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저들이 진정한 적인 걸까?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미르는 팔을 뒤로 빼고서,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춘 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허공에 던졌다.
칼날은 함대를 향해 위로 날아올랐고, 전함을 갈가리 찢으며 창공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전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르의 눈에 비쳤다. 새하얀 천이 그들의 위로 솟아올랐다. 낙하산인가?
붉은 군인들이 노리기 아주 좋은 속도로, 그들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황홀감은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허탈함이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절망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망설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의 망설임과, 쓰러뜨릴 적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망설임.
공포, 자신의 결정이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공포.
황홀감은 사라졌다.
믿고 있던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듯한 느낌. 미르는 손을 뻗어 없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다시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 황홀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는, 마치 저기 부상입은 군인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쟁의 공포만이 대지를 잠식했다.
미르는 손으로 귀를 막아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꼭 감아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고,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이 모든 건 미르의 탓이었다.
뭔가 방법이,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경 그 자체가 닳아빠져 공황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
마침내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하얗게 변하며, 미르는 언제나 그랬듯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즉시, 미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몇 시간 전 하늘로 날렸던 검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미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저 망할 하늘의 지독한 하얀 빛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뭘까?
이 세계에서 깨어난 이후로, 미르에게는 ‘소환’에 대해 생각하거나 잠을 자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마치 유령처럼 미르의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미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길게 뻗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는 길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르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쳐있었다.
미르는 기도할 뿐.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언젠가 이 공허한 모래 구덩이에서,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빌며.
미르는 전투는 몇 번이고 경험했지만, 전쟁은 경험해 본 바가 없다.
그녀는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효율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고, 공포에 질려 살기 위해 달아나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뤄내고, 지독하게 불명예스러운 추태를 보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디를 돌아보든 미르보다 약한 자들만이 존재했다.
공포에 질린 순박한 얼굴,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르를 볼 수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마치 환영인 것처럼, 빛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처럼. 그럼에도 미르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 그 덕에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어디를 돌아보든, 적들만이 존재했다. 군인들은 무장을 해제한 적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가공할 만한 무기, 인간성이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미르는 그 무기들을 파괴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적이 다른 편에서 몰려왔다.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싸우고 있었다. 미르는 재빨리 결단을 내리고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붉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미르의 등 뒤에서, 방금 전 지켜낸 사람들이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마치 연기처럼.
머리 위로 치솟은 전함이 대지에 순수한 파괴의 비를 뿌렸다. 푸른 군복에 달린 것과 같은 휘장이 그려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일격은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저들이 진정한 적인 걸까?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미르는 팔을 뒤로 빼고서, 조준을 위해 잠시 멈춘 후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허공에 던졌다.
칼날은 함대를 향해 위로 날아올랐고, 전함을 갈가리 찢으며 창공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전함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미르의 눈에 비쳤다. 새하얀 천이 그들의 위로 솟아올랐다. 낙하산인가?
붉은 군인들이 노리기 아주 좋은 속도로, 그들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황홀감은 사라졌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허탈함이 다시 몰려왔다.
이번에는 절망도 함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망설임. 잘못된 판단을 내린 후의 망설임과, 쓰러뜨릴 적을 확실히 정하지 못한 망설임.
공포, 자신의 결정이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공포.
황홀감은 사라졌다.
믿고 있던 동료가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자신을 남겨두고 간 듯한 느낌. 미르는 손을 뻗어 없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데. 다시 한 걸음 내디딜 힘조차 없는데.
그래도 그 황홀감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미르는, 마치 저기 부상입은 군인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격렬했던 전투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쟁의 공포만이 대지를 잠식했다.
미르는 손으로 귀를 막아 사람들의 신음과 비명을 듣지 않으려 애썼다. 눈을 꼭 감아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고, 냄새조차 맡지 않으려 했다.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야.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이 모든 건 미르의 탓이었다.
뭔가 방법이,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를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일련의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신경 그 자체가 닳아빠져 공황이 몸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
마침내 주변의 광경이 다시 하얗게 변하며, 미르는 언제나 그랬듯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왔다.
즉시, 미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몇 시간 전 하늘로 날렸던 검이 건조한 소리를 내며 모래 위로 떨어졌다.
미르는 가만히 제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저 망할 하늘의 지독한 하얀 빛이 자신을 잠식하지 않도록.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 세계가 나에게서 원하는 게 뭘까?
이 세계에서 깨어난 이후로, 미르에게는 ‘소환’에 대해 생각하거나 잠을 자는 데에만 시간을 썼다. 하지만 자신에게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마치 유령처럼 미르의 머리를 맴돌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뭐지?
미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길게 뻗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가는 길에 목적지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미르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떨어진 곳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은 다른 사람의 발자국과 겹쳐있었다.
미르는 기도할 뿐.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기도했다.
언젠가 이 공허한 모래 구덩이에서, 조금이라도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빌며.
4.3.3. Vermillion Shield
Vermillion은 Scarlet과 동일한 '주홍빛'으로, 시라베를 의미하고 Shield는 '방패'로 미르를 의미한다.=====# 8-4 #=====
이 애, 죽고 말거야.
기억 속이든...
아르케아에서든...
...
이 텅 빈 지옥에서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미르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 곳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르는 언제나 혼자였으며, 오로지 검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소녀가 죽는다.
미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를 지켜야 할 지,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마지막 숨을 내뱉을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미르는 확신했다.
이 소녀는 죽을 운명이라고.
=====# 8-5 #=====기억 속이든...
아르케아에서든...
...
이 텅 빈 지옥에서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어버리는 걸까?
미르는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만으로 족했다.
이 곳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미르는 언제나 혼자였으며, 오로지 검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지금, 그녀의 곁에 있는 소녀가 죽는다.
미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를 지켜야 할 지,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마지막 숨을 내뱉을지.
전부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미르는 확신했다.
이 소녀는 죽을 운명이라고.
새하얀 모래를 파고드는 두 맨발.
누운 등 뒤로 전해지는 사막의 온기를 느끼던 미르가,
지금 보이는 풍경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빛나는 하늘을 등지고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녀의 실루엣.
이상하게 생긴 드레스를 입고, 미르 자신과 비슷한 길이의 은빛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올린 소녀.
...미르도, 본인조차도 모르는 그 소녀의 이름은 시라베였다.
미르의 시선이 저 소녀가 들고 있는 물건으로 옮겨갔다.
악기인가?
소녀의 말로 침묵이 깨졌다.
"괜찮냐?"
미르는 침묵을 지켰다. 아래를 내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채색의 모래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자기를 맞이해주던 새하얀 하늘. 마지막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다..." 미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르의 머릿속에서 한 기억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들었던 노랫소리.
...이 소녀가 부렀던 것이겠지.
"놀랐어? 나는 어떻겠냐." 소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냐? 일어설 수는 있겠어?"
일어선다니. 정말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르는 지쳤다. 너무나도 지쳤다.
"...어디 안 좋냐?"
어디 안 좋냐고? 모든 게 안 좋았다. 안 좋다는 것 만이 미르의 삶에 있어 유일한 상수였다.
소녀가 미르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보다 더욱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음... 아니다,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해보자. 넌 어떤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냐고? 미르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만이 잔뜩 떠올랐다. 방랑자. 용사. 광전사. 참살자. 발키리...
무능력하고, 무식한, 실패자.
...미르는 고개를 한 번 털었다.
"모르겠어? 나도 똑같아." 소녀가 말했다. "여기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안 떠올라. 내 이름조차도."
"나는 꼭두각시야."
미르가 마침내 대답했다.
"이 망할 세계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태어난 꼭두각시..."
소녀가 놀란 얼굴로 미르를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미르가 말을 흐렸다. "이 세계의 장단에 맞춰 춤출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소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할 수 밖에 없다'니... 너무 무거운 거 아냐? 우리 모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나는."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정확히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미르는 마침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소녀는 만났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가 또 둘이.
텅 빈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소녀.
새하얀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끈질기게 미르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했다.
밋밋한 회색 모래에 대해, 창백한 하늘에 대해,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혼자 말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 8-6 #=====누운 등 뒤로 전해지는 사막의 온기를 느끼던 미르가,
지금 보이는 풍경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빛나는 하늘을 등지고 몸을 기울여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소녀의 실루엣.
이상하게 생긴 드레스를 입고, 미르 자신과 비슷한 길이의 은빛 머리칼을 두 갈래로 묶어올린 소녀.
...미르도, 본인조차도 모르는 그 소녀의 이름은 시라베였다.
미르의 시선이 저 소녀가 들고 있는 물건으로 옮겨갔다.
악기인가?
소녀의 말로 침묵이 깨졌다.
"괜찮냐?"
미르는 침묵을 지켰다. 아래를 내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채색의 모래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자기를 맞이해주던 새하얀 하늘. 마지막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다..." 미르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미르의 머릿속에서 한 기억이 불꽃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들었던 노랫소리.
...이 소녀가 부렀던 것이겠지.
"놀랐어? 나는 어떻겠냐." 소녀가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냐? 일어설 수는 있겠어?"
일어선다니. 정말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르는 지쳤다. 너무나도 지쳤다.
"...어디 안 좋냐?"
어디 안 좋냐고? 모든 게 안 좋았다. 안 좋다는 것 만이 미르의 삶에 있어 유일한 상수였다.
소녀가 미르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까보다 더욱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음... 아니다, 일단은... 자기소개부터 해보자. 넌 어떤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냐고? 미르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만이 잔뜩 떠올랐다. 방랑자. 용사. 광전사. 참살자. 발키리...
무능력하고, 무식한, 실패자.
...미르는 고개를 한 번 털었다.
"모르겠어? 나도 똑같아." 소녀가 말했다. "여기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은 아무것도 안 떠올라. 내 이름조차도."
"나는 꼭두각시야."
미르가 마침내 대답했다.
"이 망할 세계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기 위해 태어난 꼭두각시..."
소녀가 놀란 얼굴로 미르를 바라보았다. "어... 뭐라고?"
"나도 모르겠어..." 미르가 말을 흐렸다. "이 세계의 장단에 맞춰 춤출 수 밖에 없다는 것 외에는..."
소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할 수 밖에 없다'니... 너무 무거운 거 아냐? 우리 모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나는."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는데, 정확히 뭐가 잘못된 건지 말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미르는 마침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소녀는 만났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소녀가 또 둘이.
텅 빈 세상에 홀로 남은 외로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소녀.
새하얀 양갈래 머리의 소녀는 끈질기게 미르의 곁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했다.
밋밋한 회색 모래에 대해, 창백한 하늘에 대해, 자기 자신의 경험에 대해,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렇게 혼자 말하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의 말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몇 시간, 어쩌면 며칠. 모래 구덩이들을 헤쳐나가며,
이따금씩 미르의 말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고통, 피, 혼돈, 잃어버린 황홀감,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탈력감.
미르는 그것들을 이야기했다.
아르케아, 유리 조각 속에서 마주한 세계들에 대해.
자신의 실패들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실패자인지 대해...
소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미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히, 가만히.
미르는 말을 이어갔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소녀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알려주었다.
저 유리조각들, '아르케아'는 사실 기억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 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냥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이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항상 행복하냐? 나라도 무리지 그건..."
백발의 소녀가 언젠가 미르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도... 아직도 무서워. 모든 게. 계속해서 질문이 떠올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 '왜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그도 그럴게, 여긴 이해할 수가 없는 말도 안되는 세계니까."
미르는 말 없이 고개를 내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를 만나고 나서는 이제 그 때만큼 걱정은 안하게 됐어." 소녀가 덧붙였다.
미르가 움찔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찔리는 감각이 들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게 있지... 응? 왜 그래?"
미르의 눈이 소녀를 스쳐지나가는 물체에 꽃혔다.
또다.
또 그 세계다.
안돼.
지금은... 안돼...
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 몸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소녀의 말이 또다시 귀에 닿았다.
"괜찮아? 잠깐, 저거... 저게 그 '소환'인가 하는 그거냐?" 시라베가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팔을 잡는 손이 느껴졌다.
미르가 눈을 뜨자, 백발의 소녀가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엔 당혹스러움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소환'이 시작되었다.
미르 뿐만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와 함께 기억의 세계로 소환되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겨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 애, 죽고 말거야.
=====# 8-7 #=====이따금씩 미르의 말소리만이 적막을 깨는 의미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고통, 피, 혼돈, 잃어버린 황홀감,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탈력감.
미르는 그것들을 이야기했다.
아르케아, 유리 조각 속에서 마주한 세계들에 대해.
자신의 실패들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실패자인지 대해...
소녀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미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조용히, 가만히.
미르는 말을 이어갔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소녀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알려주었다.
저 유리조각들, '아르케아'는 사실 기억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 지는 본인도 알 수 없다.
그냥 알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날 뿐이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항상 행복하냐? 나라도 무리지 그건..."
백발의 소녀가 언젠가 미르에게 말했다.
"사실 아직도... 아직도 무서워. 모든 게. 계속해서 질문이 떠올라.
'왜 내가 여기에 있는거지?' '왜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는 거지?'
그도 그럴게, 여긴 이해할 수가 없는 말도 안되는 세계니까."
미르는 말 없이 고개를 내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을, 너를 만나고 나서는 이제 그 때만큼 걱정은 안하게 됐어." 소녀가 덧붙였다.
미르가 움찔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그녀의 마음 속에 무언가 찔리는 감각이 들었다.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미르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침내 소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게 있지... 응? 왜 그래?"
미르의 눈이 소녀를 스쳐지나가는 물체에 꽃혔다.
또다.
또 그 세계다.
안돼.
지금은... 안돼...
미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온 몸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소녀의 말이 또다시 귀에 닿았다.
"괜찮아? 잠깐, 저거... 저게 그 '소환'인가 하는 그거냐?" 시라베가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했다.
팔을 잡는 손이 느껴졌다.
미르가 눈을 뜨자, 백발의 소녀가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눈엔 당혹스러움이 서려있었다.
그렇게, '소환'이 시작되었다.
미르 뿐만이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소녀와 함께 기억의 세계로 소환되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거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겨대한 불안감이 미르를 덮쳤다.
이 소녀는...
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미르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이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단이 없다. 불가능하다.
이 애, 죽고 말거야.
아직 자신의 팔에 꼭 달라붙어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미르가 판단하기를 시라베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렇다. 몸을 지킬 수단이 있든 없든, 이 소녀는 이 기억에서 죽는다.
그 과정이나 이유는 미르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분명히 여기서 죽을 운명이다.
이전이었다면 이 소녀는 그저 이 세계의 또다른 이름 없는 행인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랐다.
미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의 날짐승 무리가 두 소녀를 향해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낙하했다.
그 뒤로 보이는 만월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에서 마주한 적들과 같이, 괴물들의 몸은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나는 것은 세 개의 붉은 눈동자 뿐이었다.
미르는 싸울 줄은 알아도 나는 법은 몰랐다.
이 기억의 '주인'도 아마 나는 법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미르는 팔을 흔들어 소녀를 뿌리쳤다.
"놔."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들어 날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이, 이길 수 있어?"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르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수없이 많은 핏빛 전장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그 감각을.
...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피로와 절망으로 절여진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러 적들을 베어냈다.
괴물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한 무리의 괴물이 방향을 틀어 소녀를 향해 날아가 머리 위를 둥글게 선회하고 있었다.
직감이,
직감이 말햇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갑작스레 나타난 전장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패배가 확정된 전투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소녀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 굳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시라베의 인생조차도...
...지금 끝나든, 앞으로 이어져가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기억은 미르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밀어붙였다.
스무 마리를 베어내면 곧 백마리가 또 나타났다.
앞으로는 벽. 뒤로는 한 사람의 죽음.
'지킨다'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가치가 있냐는 말이야.
...아니, 가치는 있어. 이미 알아차렸잖아, 안 그래?
이 이상한 기억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의 주인과, 미르 자신과, 소녀가 남길 유품이 될 것이라는 걸.
그 순간, 놀랍게도...
그 체념과 비관을 깨부수는 황금빛 포효가 울려퍼졌다.
신념의 목소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근엄하게 명했다.
"야 이 멍청아! 뭘 가만히 있어! 빨리 칼 안 휘두르고!"
=====# 8-8 #=====미르가 판단하기를 시라베는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렇다. 몸을 지킬 수단이 있든 없든, 이 소녀는 이 기억에서 죽는다.
그 과정이나 이유는 미르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분명히 여기서 죽을 운명이다.
이전이었다면 이 소녀는 그저 이 세계의 또다른 이름 없는 행인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달랐다.
미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끔찍하게 뒤틀린 형상의 날짐승 무리가 두 소녀를 향해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낙하했다.
그 뒤로 보이는 만월이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이전의 기억에서 마주한 적들과 같이, 괴물들의 몸은 칠흑같은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빛나는 것은 세 개의 붉은 눈동자 뿐이었다.
미르는 싸울 줄은 알아도 나는 법은 몰랐다.
이 기억의 '주인'도 아마 나는 법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미르는 팔을 흔들어 소녀를 뿌리쳤다.
"놔."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들어 날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에게 겨누었다.
온 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이, 이길 수 있어?"
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르는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황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수없이 많은 핏빛 전장을 헤쳐나올 수 있게 해준 그 감각을.
...
...느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피로와 절망으로 절여진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둘러 적들을 베어냈다.
괴물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소녀의 비명이 들렸다.
한 무리의 괴물이 방향을 틀어 소녀를 향해 날아가 머리 위를 둥글게 선회하고 있었다.
직감이,
직감이 말햇다.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갑작스레 나타난 전장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패배가 확정된 전투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소녀의 죽음은 결정된 일이다. 그러니 굳이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시라베의 인생조차도...
...지금 끝나든, 앞으로 이어져가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기억은 미르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밀어붙였다.
스무 마리를 베어내면 곧 백마리가 또 나타났다.
앞으로는 벽. 뒤로는 한 사람의 죽음.
'지킨다'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무슨 가치가 있냐는 말이야.
...아니, 가치는 있어. 이미 알아차렸잖아, 안 그래?
이 이상한 기억은...
...이미 죽어버린 기억의 주인과, 미르 자신과, 소녀가 남길 유품이 될 것이라는 걸.
그 순간, 놀랍게도...
그 체념과 비관을 깨부수는 황금빛 포효가 울려퍼졌다.
신념의 목소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름다운 목소리가 근엄하게 명했다.
"야 이 멍청아! 뭘 가만히 있어! 빨리 칼 안 휘두르고!"
소녀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미르의 앞에 나타났다.
미르의 눈 앞으로 도끼가 번쩍이며 괴수를 갈랐다.
...소녀의 연약한 팔이 도끼 자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건 '도끼'가 아니었다.
기타였다.
시라베가 기타의 헤드로 괴물들의 머리통을 깨부수었다.
괴물의 무리가 새로 나타나자 힘차게 기타를 땅에 내리쳤다.
무릎, 팔, 다리,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쓰러질 것만 같이 보였음에도, 시라베는 그 의지력만으로... 단단하게 체간을 고정시켜 똑바로 섰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아름다운 황금빛 목소리로.
"야! 앞에 똑바로 봐!"
"그 칼 들고 있음 뭐하냐!! 휘두르라고!!"
목소리에 담긴 결의와 의지.
분명 진작 포기했을 터이다. 그런데도... 검을 쥔 미르의 손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소녀가 미르를 노려다보았다.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찬 눈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소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회를 줄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앞을 봐!"
시라베는 진실로 그리 하였다.
"자유는 네가 스스로 쟁취해! 너 자신을 위한게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그 칼을 쓰란 말이야 이 멍청아!"
미르의 이가 갈렸다. 괴물이 하나 그녀에게 날아들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곧 굳게 닫은 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앞에 놓인 길을 나아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괴물들이 또다시 강하해왔다...
"그래, 알았어." 미르가 조그맣게 말했다. "휘두를 테니까, 머리 숙여...!"
자세를 바로잡고, 발을 한 번 구르고 지면에 고정시켰다.
칼을 뒤로 빼고 숨을 길게 내뱉았다.
...증기처럼, 타오르는 불길처럼.
근육이 수축하며, 미르의 흑요석 검이...
기이한 에너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미르의 힘인 걸까?
...집중하고, 더욱 큰 힘을 검으로 흘려보냈다.
칼을 천천히 치켜들고서...
태풍을 부르듯, 두 팔로, 두 손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칼을 내려치고, 길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차게 부는 강력한 돌풍에 시라베의 은빛 머리칼이 마구 춤췄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림자들이 찢겨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르는 관성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미르가 검을 땅에 내리친 후 앞으로 죽 그었다.
또다시 폭풍이 일어나 이번엔 그녀의 왼쪽의 하늘로 칼날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찰나의 시간동안 멈춘 후, 똑같은 바람을 오른쪽 하늘에도 일으켰다.
우아함과 분노가 자아내는 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미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중요한 건... 싸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야.
아니, 나의 목적은...
검이자, 방패가 되는 것.
미르는 마지막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림자 괴물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미르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 짜증나는 사실을.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팔을 꼭 껴안은 소녀를 보며,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미르가 칼날을 찌르듯 앞으로 내밀자 강력한 힘이 그림자들을 뚫고 솟구쳐올랐다.
구름과 하늘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태양을 향해...
그리고 기억의 경계선 너머로.
'운명'? '필연'? 그런게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기억이 멈추었다. '이 장소'의 현실 그 자체가 뒤틀리고 풀어헤쳐지고 찢겨나갔다.
이미 결말이 난 비극에 행복한 끝이 찾아오다니, 용납할 수 없다. 운명의 계획이 어긋나가고 말았다.
깨진 유리 조각과 공기와 함께, 이 조그마한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미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직감과 지식, 그 보든 것과는 상충되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적의 군세를 섬멸한 후 돌아온 익숙한 아르케아의 황량한 땅.
멎은 기억의 잔향이 미르 주변의 '공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르는 아르케아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웃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백색의 세계를, 미르가 웃음과 울음으로 덧칠했다.
=====# 8-9 #=====미르의 눈 앞으로 도끼가 번쩍이며 괴수를 갈랐다.
...소녀의 연약한 팔이 도끼 자루를 꼭 붙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건 '도끼'가 아니었다.
기타였다.
시라베가 기타의 헤드로 괴물들의 머리통을 깨부수었다.
괴물의 무리가 새로 나타나자 힘차게 기타를 땅에 내리쳤다.
무릎, 팔, 다리,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쓰러질 것만 같이 보였음에도, 시라베는 그 의지력만으로... 단단하게 체간을 고정시켜 똑바로 섰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뜬 미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아름다운 황금빛 목소리로.
"야! 앞에 똑바로 봐!"
"그 칼 들고 있음 뭐하냐!! 휘두르라고!!"
목소리에 담긴 결의와 의지.
분명 진작 포기했을 터이다. 그런데도... 검을 쥔 미르의 손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소녀가 미르를 노려다보았다. 두려움보다는 분노에 찬 눈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어?" 소녀가 말했다. "그럼 내가 기회를 줄게! 길을 만들어 주겠다고! 앞을 봐!"
시라베는 진실로 그리 하였다.
"자유는 네가 스스로 쟁취해! 너 자신을 위한게 아니더라도, 나를 위해서라도 그 칼을 쓰란 말이야 이 멍청아!"
미르의 이가 갈렸다. 괴물이 하나 그녀에게 날아들어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곧 굳게 닫은 이가 미소를 머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바로 지금이야 말로, 앞에 놓인 길을 나아가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림자 괴물들이 또다시 강하해왔다...
"그래, 알았어." 미르가 조그맣게 말했다. "휘두를 테니까, 머리 숙여...!"
자세를 바로잡고, 발을 한 번 구르고 지면에 고정시켰다.
칼을 뒤로 빼고 숨을 길게 내뱉았다.
...증기처럼, 타오르는 불길처럼.
근육이 수축하며, 미르의 흑요석 검이...
기이한 에너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미르의 힘인 걸까?
...집중하고, 더욱 큰 힘을 검으로 흘려보냈다.
칼을 천천히 치켜들고서...
태풍을 부르듯, 두 팔로, 두 손으로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칼을 내려치고, 길을 열었다.
머리 위로 세차게 부는 강력한 돌풍에 시라베의 은빛 머리칼이 마구 춤췄다.
소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림자들이 찢겨져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르는 관성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미르가 검을 땅에 내리친 후 앞으로 죽 그었다.
또다시 폭풍이 일어나 이번엔 그녀의 왼쪽의 하늘로 칼날같은 바람이 몰아쳤다.
찰나의 시간동안 멈춘 후, 똑같은 바람을 오른쪽 하늘에도 일으켰다.
우아함과 분노가 자아내는 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미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곧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중요한 건... 싸움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야.
아니, 나의 목적은...
검이자, 방패가 되는 것.
미르는 마지막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림자 괴물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미르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것을. 그 짜증나는 사실을.
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팔을 꼭 껴안은 소녀를 보며,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작이라는 것을.
미르가 칼날을 찌르듯 앞으로 내밀자 강력한 힘이 그림자들을 뚫고 솟구쳐올랐다.
구름과 하늘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태양을 향해...
그리고 기억의 경계선 너머로.
'운명'? '필연'? 그런게 아니다.
이것은, 그녀의 '자유'였다.
기억이 멈추었다. '이 장소'의 현실 그 자체가 뒤틀리고 풀어헤쳐지고 찢겨나갔다.
이미 결말이 난 비극에 행복한 끝이 찾아오다니, 용납할 수 없다. 운명의 계획이 어긋나가고 말았다.
깨진 유리 조각과 공기와 함께, 이 조그마한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끝난 후 미르가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직감과 지식, 그 보든 것과는 상충되는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적의 군세를 섬멸한 후 돌아온 익숙한 아르케아의 황량한 땅.
멎은 기억의 잔향이 미르 주변의 '공간'에서 반짝거렸다.
그리고 소녀가... 살아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미르는 아르케아에서 깨어난 이후로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웃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 백색의 세계를, 미르가 웃음과 울음으로 덧칠했다.
둘은 잠시 앉아있기로 했다. 미르는 무언가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소녀는 조용히 천 조각에 무언가를 바느질해 넣고 있었다. 새빨간 사각형 천에 새겨지는 익숙한 검은 형상...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미르는 마침내 떠올렸다.
그 기억 속의 괴물들이다. 조금... 귀여워진 형태였다. 미르의 목에서 조그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세계에서 시라베는 미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미르가 그저 자신의 절망감을 잘 숨기지 못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잠시 후, 소녀가 마침내 바느질을 끝내고 실과 바늘을 주섬주섬 챙겨넣었다.
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때 치웠던 생각들이 다시 미르의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기억의 결말을 바꾼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그보다도, 이 세계는 도대체 뭘까? 나는 누구일까? 이 세계 이전에 존재하던 사람일까?
'이전'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낡은 의문들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숙고할 가치가 있는 의문들이었다.
미르는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 몇 걸음, 또 몇 걸음...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르가 뒤로 돌아보고 말했다. "같이 안 갈거야?"
소녀는 마치 미르의 의중을 재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아니, 가야지."
"그래." 미르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제야 앞을 보는구나."
"음... 그러게."
미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안심이 되서 그런가봐."
미르가 등 뒤로 눈길을 흘리자, 시라베의 창백한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치." 소녀가 말했다. "또, 또 그런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렇지... 그래도 네가 말한 것 처럼, 반드시 뒤에서 너를 지켜봐주겠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럼 나도 나아갈거야." 소녀가 말했다.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세상 반대편에 있어도? 절벽 아래에, 산중턱 한가운데에..."
"응... 상관 없어."
황금빛 목소리도... 조용할 수 있는 법이구나.
미르는 한 번 더, 그 목소리를 믿었다. 어깨의 힘이 풀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상관 없지."
그렇게 두 소녀는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
소녀는 조용히 천 조각에 무언가를 바느질해 넣고 있었다. 새빨간 사각형 천에 새겨지는 익숙한 검은 형상...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미르는 마침내 떠올렸다.
그 기억 속의 괴물들이다. 조금... 귀여워진 형태였다. 미르의 목에서 조그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세계에서 시라베는 미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어쩌면 미르가 그저 자신의 절망감을 잘 숨기지 못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잠시 후, 소녀가 마침내 바느질을 끝내고 실과 바늘을 주섬주섬 챙겨넣었다.
미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때 치웠던 생각들이 다시 미르의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어떻게 기억의 결말을 바꾼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걸까?
그보다도, 이 세계는 도대체 뭘까? 나는 누구일까? 이 세계 이전에 존재하던 사람일까?
'이전'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낡은 의문들이지만, 지금이야말로 숙고할 가치가 있는 의문들이었다.
미르는 소녀를 한 번 쳐다보고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또 몇 걸음, 또 몇 걸음...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르가 뒤로 돌아보고 말했다. "같이 안 갈거야?"
소녀는 마치 미르의 의중을 재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아니, 가야지."
"그래." 미르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이제야 앞을 보는구나."
"음... 그러게."
미르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안심이 되서 그런가봐."
미르가 등 뒤로 눈길을 흘리자, 시라베의 창백한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치." 소녀가 말했다. "또, 또 그런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그렇지... 그래도 네가 말한 것 처럼, 반드시 뒤에서 너를 지켜봐주겠어."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럼 나도 나아갈거야." 소녀가 말했다. "너를 찾아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세상 반대편에 있어도? 절벽 아래에, 산중턱 한가운데에..."
"응... 상관 없어."
황금빛 목소리도... 조용할 수 있는 법이구나.
미르는 한 번 더, 그 목소리를 믿었다. 어깨의 힘이 풀리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상관 없지."
그렇게 두 소녀는 함께, 앞으로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