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8:47:52

강범진

파일:강범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강대규(康大奎), 강팔금(康八金)
본관 신천 강씨[1]
출생 1907년 6월 26일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창촌
(현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창말)
사망 1981년 3월 18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두동 서울특별시 동부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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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범진은 1907년 6월 26일 충청남도 공주군 신상면 창촌(현 공주시 유구읍 유구리 창말)에서 아버지 강문경(康文璟)과 어머니 달성 서씨 서상순(徐相順)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홍성군 광천면 광천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겼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군에 가담하여 하사로 복무했으며, 이후 진급을 거듭해 1931년 대한독립군 준위가 되었고, 1932년에 소위로 진급했다.

그는 얼마 뒤 중국 항일구국군 총사령부 특무 소위로 부임했으며, 그해 2월 헤이룽장성 퉁허현(通河縣)[2]에서 중국군과 합작해 일본군과 대항했다. 그러나 마잔산(馬占山)[3]이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만주국군에 투항하면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곧 신의주로 압송되어 1933년 3월 2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5년 만기 출옥한 뒤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 29군 지하공작대에 입대, 정보임무 담당으로 복무하던 중 1944년 또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이후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2가에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1981년 3월 18일 동대문구 용두동 서울특별시 동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범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 충주·은산파(곡산계) 39세.[2] 현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퉁허현.[3] 1932년 2월 당시 흑룡강성 정부주석이었던 한간 장징후이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 등에게 포섭되었었다. 그래서 이후 만주국 건국원훈에도 서훈되고 초대 군정총장 겸 흑룡강성장에도 임명되었으나, 일본 측의 끊임없는 불신과 삼엄한 통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껴 그해 4월 만주국을 이탈하여 다시 항일운동전선에 뛰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