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4:17:01

강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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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강태선
姜太善 | Kang Tae-seon
파일:강태선 애국지사.jpg
출생 1924년 6월 15일 ([age(1924-06-15)]세)
전라남도 제주도 정의면 시흥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1]
거주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2]
본관 진주 강씨
자녀 강대성
몸무게 45kg[3]
서훈 대통령표창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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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24년 6월 15일 전라남도 제주도 정의면 시흥리[4]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세 때인 1942년오사카로 유학가서 신문배달을 하며 전문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주불해(周佛海)가 지은 <삼민주의(三民主義)> 등 사상 서적을 탐독하며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길 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1942년 8월경 친지인 지원호(池源鎬)·심종보(沈宗輔) 등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해 협의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히 봉기하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뜻을 같이 했다.

또한 그들은 징병제는 독립운동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제가 강요하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은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것이므로 강력히 저항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봉기의 시기 등을 협의하고 동지 포섭에 힘썼다. 그러나 1944년 6월 3일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4년 8월 25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해방 후 제주도로 돌아온 그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으며, 그의 생가는 '위인선현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동생 강영배 하사 6.25 전쟁 당시 가칠봉전투에서 활약 후 피의 능선 전투 1952년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1] 현오봉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일본 활동 당시에는 오사카시 히가시구 빈고마치의 마에다에서 거주하였다.[3] 광복 이후 풀려날 때의 몸무게[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